새 계절, 2023 F/W 컬렉션을 본격적으로 맞이할 때다. 트렌드에 유연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사진가와 모델, 비디오그래퍼, 디자이너, 헤어와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비슷한 듯 다른 각자의 무대에서 활동하는 그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물었다. 같은 장면에서 다른 답이 나왔다.
PHOTOGRAPHER
(왼쪽부터) JACQUEMES, DIOR MEN, HERMÈS
PHOTOGRAPHER
장기평
가장 촬영해보고 싶은 룩은?
JACQUEMES 베르사유 궁전에서 선보인 ‘르 슈슈’ 컬렉션은 정말 자크뮈스다웠다. 화이트, 블랙, 레드를 베이스로 풍성한 실루엣과 모델의 살갗이 비치는 얇은 시스루 소재를 적절히 믹스한 강약 조절이 아주 훌륭했다. 리본, 페더, 레이어드한 란제리 디테일을 곳곳에 더해 입체감 역시 놓치지 않는 센스까지. 특히 아주 얇고 작은 깃털이 달린 블랙 맨즈 슈트가 꼭 촬영하고 싶은 룩 1순위.
DIOR MEN 부드러운 크림 컬러로 시작해 베이지, 옐로 그리고 그레이와 브라운으로 이어지는 디올 맨의 컬렉션은 마치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했다. 여러 겹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니트 케이프, 와이드핏의 퀄로트 팬츠, 아이코닉한 컬러의 레인 재킷이 특히 돋보였다. 이번 시즌 디올맨은 파리 남성복 패션위크의 베스트 컬렉션 중 하나라는 평을 들었다고 하니, 촬영장에서 만날 날만을 고대 중이다.
HERMÈS 톤온톤 무드에 각기 다른 광택감의 소재로 차원이 다른 우아함을 보여준 에르메스는 F/W 시즌 느낌이 나는 고풍스러운 컬러로 그 위상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깊은 역사를 지닌 에르메스의 질 좋은 소재감은 카메라에 담았을 때 특히 빛을 발한다. 과도한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사르륵 떨어지는 소재에서 이미 게임 오버. 에르메스는 그냥 에르메스 그 자체다.
(왼쪽부터) MIU MIU, BOTTEGA VENETA, CELINE
PHOTOGRAPHER
배준선
가장 촬영해보고 싶은 룩은?
MIU MIU 반짝이는 액세서리에는 약하지만, 안경만큼은 누구보다 깊게 안다고 자부한다. 최근 패션 잡지를 휘리릭 넘기는 와중에 페이지를 멈추게 만든 건 바로 미우 미우의 안경이었다. 안경에 모든 스타일링을 맞춘 것처럼 그 룩 자체가 완벽했다. 안경이 없었더라면 되레 불완전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부스스한 머리,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입은 것 같은 스타일. 하지만 각각의 디테일은 놀랍도록 완성도가 높았다.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해 일상적 모습을 표현한 미우 미우의 2023 F/W 컬렉션을 나만의 시선으로 재해석 해보고 싶다. 안경은 필수다.
BOTTEGA VENETA 지난 시즌 화이트 탱크 톱과 데님 팬츠로 완성한 룩은 정말 ‘쿨’했다. 케이트 모스가 입고 나온 플란넬 셔츠는 평소 즐기는 아이템이라 당장 따라 사고 싶을 정도 였으니까. 편안하고 베이식한 룩도 면면이 가죽으로 만든 걸 알아차렸을 땐 무릎을 탁 쳤다. 2023 F/W 시즌 역시 가죽을 입기 쉽게 디자인한 점이 흥미롭다. 힘을 모두 뺐지만 조용하고 우아한 한 방이 있는 룩을 카메라에 담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대된다.
CELINE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단언컨대 록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불태운 록 음악. 그때의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서 따라 입기는 어렵지만 록 시크 패션이 마음속 로망 중 하나다. 셀린느의 이번 시즌 컬렉션은 그런지한 아이템의 완벽한 조합이었다. 화이트 셔츠, 루스한 타이, 스키니 진. 공연을 마친 록 스타의 애프터 파티가 연상된다. 2000년대의 록을 배경음악 삼아 마음 가는 대로 찍어보고 싶다.
(왼쪽부터) JIL SANDER, LEMAIRE, MIU MIU
PHOTOGRAPHER
박현경
가장 촬영해보고 싶은 룩은?
JIL SANDER 사진가 데이비드 심스가 작업한 1990년대 질 샌더 캠페인을 시작으로 브랜드의 패션 아이덴티티에 대해 꾸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2023 F/W 컬렉션에서는 그동안 보여주던 룩보다 자유로움을 선보였으나 질 샌더만의 감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고유한 무드를 이미지화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브랜드 중 하나다.
LEMAIRE 르메르 컬렉션은 도회적이고 서정적이다. 채도를 한껏 덜어낸 단색 톤의 조합, 중앙을 벗어났지만 균형 잡힌 단추의 위치, 질감이 다른 소재의 레이어링까지. 각각의 요소를 보면 서늘해지는 계절이 곧장 떠오른다. 말로 설명할 수조차 없는 그 미세한 온도를 사진에 담아보고 싶다.
MIU MIU 패션은 모양과 기능 사이에서 변화한다. 그 사이를 명민하게 오가며 줄타기를 잘하는 브랜드를 꼽자면 미우 미우가 꼭짓점에 있을 것이다. 뺄셈의 미학이 느껴지는 이번 2023 F/W 컬렉션을 아주 담백한 이미지로 풀어내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HAIR & MAKEUP ARTIST
(왼쪽부터) VERSACE, MIU MIU, PRADA
메이크업 아티스트
임정인
눈에 띈 헤어와 메이크업은?
VERSACE 아이 메이크업 하나만으로도 메이크업의 인상이 좌지우지된다. 베르사체는 이번 시즌 볼드하지만 깔끔하게 떨어지는 아이라인으로 컬렉션에 힘을 불어넣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아이라인에서는 안정감마저 느껴질 정도. 강렬하고 묵직한 한 방이 필요한 현장에서 꼭 적용해볼 예정.
MIU MIU 모델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본연의 피부 톤과 컬러를 똑똑하게 활용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추럴한 듯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완벽하게 정리된 피부 표현은 감탄을 자아낸다.
PRADA 프라다는 매 시즌 메이크업이 가장 기대되는 브랜드다. 컬렉션 룩과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독특한 텍스처를 제대로 활용하기 때문. 이번 시즌에는 포슬포슬한 질감의 오버사이즈 컬러 래시 메이크업을 선보였는데, 모델과 룩마다 컬러를 다르게 적용하는 섬세함까지 발휘했다. 모델이 걸을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컬러 래시가 어찌나 탐이 나던지.
(왼쪽부터) ALEXANDER MCQUEEN, MIU MIU, ROKH
헤어 아티스트
강지원
눈에 띈 헤어와 메이크업은?
ALEXANDER MCQUEEN 요즘 깔끔하고 담백한 헤어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이번 시즌 알렉산더 맥퀸의 헤어는 이 깔끔함에 약간의 위트를 담았다. 헤어 제품을 이용해 잔머리를 연출한 스타일링은 과하지 않고 심플하지만, 알렉산더 맥퀸다운 기교를 부린 것이 느껴졌다.
MIU MIU 평소 내추럴한 헤어스타일링을 좋아하는데, 그 어떠한 헤어보다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그 점에서 이번 시즌 미우 미우의 헤어는 내추럴함의 교과서다. 자연스러운 머릿결과 컬러를 십분 활용해 완벽한 내추럴 헤어를 구현했기 때문. 머리에
풍선을 붙였다 뗀 것처럼 부스스하게 일어난 잔머리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였다.
ROKH 가르마의 비율을 1:9까지 나눠 강렬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헤어 트렌드도 눈길을 끌었다. 로크는 가르마를 나눈 후 긴 앞머리로 얼굴 한쪽을 가려버리는 초극단적인 헤어를 연출했다. 모델의 헤어 기장에 따라 얼굴이 가려지는 면적이 달라져 쇼 내내 지루하지 않게 연출한 점도 흥미로웠다.
(왼쪽부터) PRADA, GUCCI, DIOR
메이크업 아티스트
장소미
눈에 띈 헤어와 메이크업은?
PRADA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 생기를 살린 메이크업으로 끝냈다면 아쉬웠을 텐데, 기막힌 한 방이 있었다. 바로 룩의 텍스처와 비슷한 느낌으로 연출한 파스텔 색상의 속눈썹. 모델들이 런웨이를 걸으며 눈을 깜빡이는 모습조차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만들어버렸다.
GUCCI 선연한 노란색과 쨍한 핫 핑크가 한데 섞여 그러데이션 효과를 낸 입술 포인트 메이크업은 강렬한 색조의 조합이 신선했다. 어우러질 것 같지 않은 2가지 색의 조화가 의외로 부드러워서 나 역시 실제 현장에서 활용해 볼 생각이다.
DIOR 디올은 해를 거듭할수록 색다른 메이크업을 선보이는 대신 어떤 아이코닉한 그림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검은 아이라인을 미니멀하게 그리면서 아주 간결하지만 존재감이 뚜렷한 메이크업이 바로 그거다. 위치를 조금씩 바꾸지만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디올만이 낼 수 있는 느낌을 한껏 드러내는데, 이제는 이 라인만 보면 디올이 떠오른다. 심플한 선 하나로 완벽한 면모를 보여준 메이크업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DESIGNER
(왼쪽부터) JACQUEMUS, PAULA CANOVAS DEL VAS, CAROLINE HU
가방 브랜드 선셋07 대표
이주연
가장 기억에 남는 가방은?
JACQUEMUS 자크뮈스의 빨간색 클러치백. ‘빨간’이라고 말하기보다 ‘시뻘건’이라고 말하는 게 응당한 색감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빵 봉투를 둘둘 말아 접은듯한 디자인 역시 인상적이다. 어쩌면 런웨이에서 모델이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나온 그 모습 때문에 더 뇌리에 박혔을지도 모른다.
디자인과 디테일이 새로웠던 브랜드는?
PAULA CANOVAS DEL VAS 과감한 색조의 조합, 다채로운 소재의 기막힌 믹스 매치, 유기물을 연상시키는 과장된 형태의 액세서리, 조형적 실루엣까지. 이 모든 걸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컬렉션의 면면이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어느 하나 허투루 만든 것이 없어 보여 같은 디자이너로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라이징 브랜드는?
CAROLINE HU 기이하면서도 로맨틱하다. 어울리지 않을 법한 두 단어가 캐롤라인 후의 룩에는 찰떡처럼 어우러진다. 여기에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했을 것 같은 수공예 디테일까지 더해졌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 기대되는, 다음 컬렉션을 기다리게 하는 브랜드다.
(왼쪽부터) GOOMHEO, NO/FAITH STUDIOS, VAQUERA
브랜드 굼허 대표
허금연
가장 기억에 남는 룩은?
GOOMHEO 현재 스스로 전개하고 있는 브랜드 굼허. 컬렉션 전반에 손길이 닿아 애착이 가고 소중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룩은 데님과 퍼를 함께 사용한 립 퍼 재킷과 와이드 퍼 팬츠다. 재킷 패널을 나눈 뒤 사이사이에 퍼 트림을 재봉해 그래픽을 만들었다. 이 룩이 이번 시즌의 테마인 ‘라이더Riders’를 관통해 보여준다 해도 무방하다.
디자인과 디테일이 새로웠던 브랜드는?
NO/FAITH STUDIOS 볼 때마다 “데님과 가죽으로 이게 가능하다고?”하며 놀라게 되는 브랜드다. 정교하고 섬세한 패턴 작업, 독특한 디테일을 활용해 시그너처인 데님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든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라이징 브랜드는?
VAQUERA 라이징 브랜드라고 하기엔 이미 유명한 브랜드지만,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번 시즌은 펑크에 그들의 색깔을 더해 바퀘라만의 펑크를 창조했다. 팬츠 위에 브리프를 착용하고, 티셔츠 위로 브레지어와 하네스를 걸치고, 속옷이 완전히 드러나는 드레스까지. 브랜드의 첫 론칭부터 지금까지 파격적인 실험으로 신선한 옷, 스토리,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앞으로 그들이 보여줄 유쾌한 비주얼이 기대되는 이유다.
(왼쪽부터) VIKTOR & ROLF, PRABAL GURUNG, STELLA MCCARTNEY
주얼리 브랜드 씨시어 대표
김미성
눈에 띈 주얼리 스타일링은?
이번 시즌에 발견한 주얼리 디자인의 특징은 온몸을 감싼다는 점이다. 주얼리 디자이너로서 흥미롭고 반가운 일. 특히 브로치를 활용한 코페르니의 위트 있는 드레이핑, 이너웨어와 언더웨어를 갈음해 연출한 에르메스와 스텔라 맥카트니의 주얼리가 눈에 밟힌다. 번쩍이는 스톤 체인을 직조하듯 엮은 세인트 신트라의 드레스, 프라발 구룽의 톱, 디 펫사의 헤드기어는 꼭 소장하고 싶을 정도. 주얼리와 텍스타일의 경계가 무너질 날이 머지 않았다.
주얼리 디자인에 영감을 얻을 만한 2023 F/W 컬렉션은?
빅터앤롤프의 리본 장식에 눈이 번쩍했다. 질서정연하게 반복되지만 모순적이고 난폭한 디자인. 기능과 재료의 한계를 핑계 삼아 나태해지기 쉬운 주얼리 디자인의 뭉친 실마리가 풀린 느낌이었다. 철옹성처럼 뭐하나 끼어들 틈 없이 검게 물든 발렌시아가 컬렉션에는 세련되지 않은 크고 거친 주얼리를 끼워 넣고 싶었다. 문화유적에 제 이름을 낙서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