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252’, burnt hanji & hanji by 대성한지 on linen hemp, 13×130cm, 2022.
한지를 이용한 추상적 실험을 선보이는 캐스퍼 강. 2022년 아트부산에서 MZ 세대 컬렉터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화제에 오른 작가이기도 하다.
캐스퍼 강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고 2004년부터 한국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캐나다 칼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건축 디자이너로도 일했다. 프롬프트 프로젝트(2022), 대구 021갤러리(2022), 디 언타이틀 보이드(2021)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갤러리구조(2022), 라흰갤러리(2022), 분더샵 청담(2021)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커미션 작업으로 강남 인터컨티넨탈 호텔 아트워크(2022)와 탬버린즈 하우스/ 플래그십 스토어(2021) 등에서 활동한 바 있다.
갤러리 지우헌의 새해 첫 전시는 한국계 캐나다 2세 작가 캐스퍼 강의 〈겨울 계단〉. 이방인의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며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작가의 전시다. ‘허물을 아는 것이 한층 더 아는 것’이라는 지우헌知尤軒의 의미와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없다. 그의 작품에서 전통, 예술, 장인을 찾아보려는 생각일랑 접어두길.
진정한 가치는 무의미함 그 자체에 있다
한지를 찢고, 불로 태우거나 그을리고, 락스로 표백하고, 석회질 가루와 반죽하고, 일부러 해지게 해 그 성질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작가 캐스퍼 강. 한지의 오라에 사로잡혀 ‘전통’ ‘계승’ ‘의미’ ‘상징’부터 찾아대는 우리에게 캐스퍼 강의 작업은 그야말로 파격破格이다. 그가 2021년 개인전 <속속속속세세세세>를 위해 쓴 작가 노트를 한번 보자.
“세상의 무의미함. 변치 않고 변화를 일으키는 그 무의미함. 절대 새롭지 않고 절대 새롭지 아니하지 않다. 무의미함 속에 모두 별처럼 화려하게 타오른다. 한시적이며 끝을 향해 활활 타오른다.”
일부러 한지의 물성을 해체하고 변형해 전혀 다른 추상의 상태로 만드는 캐스퍼 강. 그는 작품으로 메시지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애써 의미를 배제한다. 진정한 가치는 무의미함 그 자체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참 맞는 말이다. 한지가 어디 스스로 ‘전통’ ‘상징’ ‘장인’ ‘예술’의 대명사로 살고 싶었을까. 그저 무의미함 속에서 별처럼 태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생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순간 새로운 삶이 열리듯, 그의 작품을 통해 세상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순간 새로운 인식이 열릴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에서 나는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반대쪽에 항상 진리가 있다’고 믿는 도가 사상을 떠올려버렸다. 그리고 그의 추상에 ‘열린 추상’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지 추상 작품은 ‘별 242’, ottchil, hanji, burnt hanji & ink on linen hemp, 136×143cm, 2022. 바닥에 놓은 자개 작품은 ‘사물’ 시리즈, mother of pearl & hanji on concrete masonry unit, 2022.
구글 시학으로 웅얼거린 문장들
“계단, 계단참, 계단 참, 겨울로 오르는 계단, 참 반가운 계단,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춥고 건조한 까닭,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까닭 없는 저주, 저주받은 갑옷 얻는 법, 법은 어떻게 부자의 무기가 되는가.”
그에게 작품 설명을 청하자 대답 대신 이번 전시를 위한 작가 노트를 건넸다. 그는 구글 시학(Google poetics, 구글 검색창에 검색어를 입력하면 알고리즘에 따라 등장하는 단어 또는 문장을 시로 만드는 것)으로 ‘겨울 계단’이라는 이번 전시의 단서를 전한다. 구글 시학은 사람들이 실제 검색한 이야기, 즉 욕망·비밀·유행을 담은 문장이다. 그가 자신의 추상 작품에 구글 시학으로 완성한 작가 노트를 꺼내는 이유가 짚이는가? 한국어가 낯선 그가 ‘겨울’ ‘계단’이라는 단어를 발음했을 때 느낀 긴장감, 차가움, 조심스러움이라는 정도의 단서만 있다. 여기서 맥락과 의미를 찾는 건 무의미하다.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 따라 ‘겨울로 오르는 계단’이 될 수도, ‘춥고 건조한 겨울의 까닭 없는 저주’가 될 수도 있다. 해석은 보는 이에게 맡기는 게 합당하다는 것. 그가 매번 인터뷰를 고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지 유감, 자개 유감
한국계 캐나다 2세로 2004년 한국으로 건너와 아티스트로 살아온 캐스퍼 강에게 한국은 고국이자 낯선 타국이었다. 모문화母文化에 대한 호기심은 시간이 흐르며 상실감과 무의미함으로 바뀌었다. ‘전 국민의 얼리 어답터화’를 부추기듯 모든 것을 새로움으로 갈아치우는 한국 문화에 대한 상실감은 형상을 비우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무의미함을 깨닫고 받아들이니 비로소 의미가 생겨났다.
“공예도, 미술도, 현대 작가나 장인도 잘 알지 못한다”는 그는 작품 재료로 덕치 전통한지, 원주전통한지, 대승한지마을 등에서 직접 공수한 한지를 쓴다. 지장紙匠의 일이 노동집약적이며, 계승하려는 이가 없고, 돈도 되지 않는 터라 그가 마지막 물량을 구해온 곳도 있다. 나라가 정한 문화재이지만 다른 일을 겸업하는 이도, 그나마 수요가 있는 포장 한지 작업에 전념해야 하는 장인도 있다. 그는 이 이야기 끝에 “속이 들여다보일 만큼 얇고도 질기고 부드러운 것이 한지여서 형태적 실험, 재료적 실험에 사용할 뿐”이라 덧붙였지만, 나는 오히려 그 무심한 이유에서 유심唯心과 유감有感을 생각했다.
‘별 250’의 모서리 부분, ottchil hanji by 안동한지, hanji, 77×146cm, 2022.
별로일 때 별로 가자
“그따위 의미, 별것,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별것 아니다, 별거 아니야, 별로, 별로야, 별로 힘들이지 않고 거의 저절로, 별론데, 별로일 때 별로 가자, 별들, 별들 너머 저쪽 이쪽, 별들 사이의 땅, 별들 사이에서, 별들 사이를 누비고, 별들에게 물어봐, 어떻게, 어떻게 하지.”
역시 이번 전시를 위한 작가 노트 중 한 구절이다. 타다 남은 찰나의 한지 조각, 분채 가루와 반죽한 한지 덩어리, 콘크리트에 붙인 한지, 그 사이로 스미는 빛…. 이번 전시에서 만날 한지 추상회화를 들여다보고 명멸하는 별을 떠올렸는가. 이번 전시 작품 제목 중에는 ‘별 145’ ‘별 245’처럼 행성 이름을 닮은 것이 있다. “멀리서는 단순히 빛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타오르거나 얼어 있는 등 다양한 행성의 모습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보도 자료 속 작가의 유일한 설명도 있다.
별의 탄생과 소멸이 그렇다. 허공에서 태어나 무궁으로 사라진다. 영원 속으로 명멸하는 것이다. 별것 아니거나 별로인 존재로 태어나 별로 가는 세상 만물의 이치가 이 심오한 작가 노트에 담겨 있다. 별로일 때 별로 가자, 속삭이며 말이다.
지우헌
오직 <행복> 정기 구독자 초청 행사 ‘행복작당’에서만 만날 수 있던 북촌 지우헌이 디자인하우스 멤버십 라운지로 탈바꿈했다. 2016년 ‘서울우수한옥’에 선정될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한옥으로 이름난 지우헌의 정취를 상시 즐길 수 있게 된 것. 공예와 아트 전시를 관람하고, 차 한잔의 여유와 디자인하우스가 발행한 잡지·단행본을 탐독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