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을 조각이라고 믿는 에르빈 부름. 유쾌함으로 무장한 그의 작품은 기존 관념을 해체하고 상상의 틀을 확장하며 관람객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한다. 작가가 구축한 조각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이다. 사랑스러운 외연을 지나 감춰진 어두운 진실 속으로.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조각가. 자본주의, 이민, 비만 같은 동시대적 문제들을 유쾌한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전통적 조각의 개념을 깨고 사진, 영상, 퍼포먼스, 회화를 그의 조각적 문법으로 선보이고 있다. 2017년 제57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오스트리아 국가관 작가로 선정되었다.
2017년 이탈리아의 더운 여름날,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에르빈 부름의 작품을 처음 만났다. 그냥 걸어 다니기도 힘든 날씨였다. 눈은 즐겁지만 몸은 지쳐가던 순간 들어선 오스트리아 국가관에 작가가 펼쳐 놓은 풍경은 수일간 머물르던 비엔날레 일정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관람객들이 거꾸로 선 25톤 트럭 내부에 설치한 좁고 높은 계단을 즐겁게 오르내렸고, 캠핑카를 개조해 만든 작품 ‘바보들이 탄 배Ships of Fools’에 들어가 몸을 사리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전시를 즐기고 있었다. 에디터 역시 캠핑카 안의 간이침대에 누워 벽에 뚫린 2개의 구멍 사이로 기꺼이 두 다리를 내밀었다. 그 순간, 에르빈 부름의 조각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작가에 대해 더 공부한 이후의 일이었다.
에르빈 부름은 조각가다. 하지만 재료를 깎거나 빚어 만든 입체 덩어리만을 만드는 조각가는 아니다. 사진, 영상, 퍼포먼스 심지어 회화까지 폭넓은 작업을 아우르지만 이 모든 장르는 에르빈 부름의 세계 아래 조각으로 명명된다. 작가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대표작은 ‘1분 조각One Minute Sculptures’. 이 작품은 관람객이 참여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의자, 냉장고, 빈 플라스틱 샴푸 통 등 일상적 물건이 좌대 위에 놓여 있다. 단상 한 편에 새겨놓은 짧은 지시문과 드로잉을 참고해 1분 동안 그 동작을 따라 했을 때 온전한 조각이 된다. 시간도 조각의 주요한 구성 요소라고 믿는 그는 짧은 시간과 관람객의 행위를 작품으로 끌어들인다.
에르빈 부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대표작은 ‘팻 조각Fat Sculptures’ 시리즈다. ‘팻 컨버터블(팻 카)Fat Convertible(Fat Car)’은 자동차를 의인화한 작품으로 마치 살이 찐 듯 크게 부풀려 변형했다. 지방이 넘치다 못해 흘러 내리고 있는 집을 구현한 작품 ‘팻 하우스Fat House’도 있다. 집과 차뿐인가. ‘8일 만에 L 사이즈에서 XXL 사이즈 되는 법 From L to XXL in 8 Days’이라는 작품에서는 작가 본인이 직접 조각이 된다. ‘초콜릿을 곁들인 크레페 4개 먹기 그리고 우유 3잔 마시기’ 등 아침, 점심, 저녁으로 고열량 음식을 섭취 하라는 지시문이 써 있는 두꺼운 전집 형태의 ‘텍스트 조각’이다. 이 지시문대로 몸을 불린 자신의 모습을 촬영해 ‘나/ 뚱뚱한 나Me/ Fat Me’라는 ‘사진 조각’을 선보이기도 했다. 작가는 “음식 섭취를 통해 살이 찌고 빠지는 과정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먼저 겪을 수 있는 조각적 경험”이라고 말한다.
유쾌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외형의 작품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유쾌함은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앞서 소개한 작품을 유심히 생각하면 모두 갈등을 일으키는 현대의 사회 문제와 맞닿아 있다. 캠핑카는 난민 문제를 은유하고, 집과 차는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도상이다. 팻 시리즈는 비만과 외모 지상주의라는 이슈를 꼬집는다.
에르빈 부름이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국내 두 번째 개인전 <나만 없어 조각>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작가의 대표작 61점을 총 3개의 섹션으로 나눠 심도 깊게 감상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로, 3월 19일까지 이어진다. 전시는 1990년대 초반에 발표한 ‘13 풀오버’부터 지난해 선보인 ‘스킨 조각’, 올해 작업한 회화 ‘평면 조각’의 신작까지 작가의 세계를 총망라했다. 에르빈 부름을 만나 그의 조각적 삶과 유쾌한 작업 이면에 숨겨진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나만 없어 조각> 1부 ‘사회에 대한 고찰’ 전시 전경.
우연한 계기로 조각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비엔나 응용미술 대학교의 회화과에 지원했지만 조각과로 배정을 받았다고. 지금처럼 편견 없이 자유롭게 조각 작업을 이어올 수 있는 단초가 된 것 같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돌이켜보면, 입시처에서 내 숨겨진 잠재력을 보지 않았나 싶다. 첫 시작은 새로운 도전이자 발견의 연속이었고, 한계 없이 다양한 생각과 실험을 이어올 수 있었다. 깊숙이 파고들다 보니 이제는 조각의 세계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내 삶이 곧 조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처음 발표한 후 지금까지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는 ‘1분 조각’은 지시 드로잉과 글로 관람객의 정확한 행위를 유도한다. 예상치 못한 관람객의 돌발 행동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그런 경우는 있다. 하지만 내 조각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지시 사항을 모두 철저히 따라야 한다. 만약에 지침대로 하지 않고 본인만의 방식으로 한다면 그것은 내 작품, 내 조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팻 컨버터블’은 차라는 정체성에 맞게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품은 놓이는 곳의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작품은 어떤가?
내 작품은 전시하는 지역의 문화에 따라 아예 존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내년 영국에서 열리는 전시회에는 팻 컨버터블과 팻 하우스는 전시하지 않을 예정이다. 비만인 사람들에 대한 조롱의 우려가 있어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집을 아주 좁게 만든 ‘내로 하우스 Narrow House’를 선보이지 못했다. 너무 좁아 휠체어 진입이 힘들어서다. 같은 맥락으로 러시아와 중국에서도 전시 때마다 소개할 수 있는 작품에 제약이 있던 경험을 마주했다. 아쉬운 마음보다는 흥미롭게 여겨진다.
2019년, 69세의 나이에 처음 회화를 선보였다.
그해 여름은 그리스에서 보냈다. 자연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슬슬 심심해지더라. 캔버스를 사서 ‘Much’, ‘Soft’ 등 이전 작업 제목의 글자를 찌그러트려 그렸다. 길가에 놓인 만두를 차가 밟고 지나갔을 때 뭉개진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쉬우려나?(웃음) 입체적인 글자를 납작하게 만들어 그렸다는 점에서 내 조각적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나는 이를 ‘평면 조각’이라 부른다.
<나만 없어 조각> 3부 ‘상식에 대한 고찰’ 전시 전경.
당신의 작업은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유쾌한 힘을 가지고 있다. 소비 중심주의와 비만 문제 등 동시대적 이슈를 소재로 삼고있지만 지나치게 매력적인 작품이 오해를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팻 컨버터블’은 겉보기에는 매력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진실은 그 이면에 있다. 사람들이 내 작품을 통해서라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보다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을 능동적이고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태도를 갖췄으면 한다. 유머는 내 작품에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사실 더 무겁다. 현실의 부조리함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수많은 문제점이 그것이다. ‘1분 조각’도 마찬가지다. 그저 직접 조각이 되어보는 경험만을 선사하는 작품이 아니다. 사실 심리적 문제와 연결된다. 부끄러움, 수치심 등 내면에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감정들을 내포하고 있다.
최근 가장 관심을 두는 주제가 있다면?
여전히 새로운 조각에 대한 이슈와 사회문제를 연결하는 탐구를 지속하고 있다. 준비 중인 신작은 옷과 관련한 작업이 될 것 같다. 기존에 선보인 옷 관련 작업과는 다른 재료를 실험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래에 나올 작품들이 더 흥미로우리라 생각한다. 하루하루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무려 40년간 조각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해체하고, 당신만의 독자적인 조각 세계를 조직해왔다. 당신이 생각하는 조각이란 무엇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조각이 될 수 있다. 그저 자유롭고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영한사전을 펼쳤다고 가정해보자. 영어라는 언어적 체계에 있는 글자를 녹이고, 이를 다시 한국어 체계라는 틀 안에 굳혀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 역시 조각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조각이 될 수 있다니, 정말 멋진 일이 아닌가.
현시대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아티스트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사람들의 시야를 확장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당연시하던 태도와 편견에 파동을 주입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작가로서 뿐만이 아닌, 나이를 먹어가는 한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고난이 연속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더욱 서로를 위하며 사랑하고, 환경과 지구 그리고 동식물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 작품이 이러한 메시지와 더불어 관람객에게 행복감과 위로를 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COOPERATION 수원시립미술관(031-228-3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