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극장을 강타하는 초호화 액션물들은 러닝 타임을 온통 CG로 도배하고 있다. 서사로 영화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관객을 현혹시키는 장면을 즐비하게 만들어놓고,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느낌이 더 강하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뮤직비디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는 요즘 영화 제작 트렌드에 부합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크리에이티브 산업에서도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 지난 530호에서는 1980년대 MTV의 대두와 함께 뮤직비디오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MTV, 뮤직비디오와 뉴웨이브 음악으로 세운 대중문화의 틀’). 데이비드 핀처나 마이클 베이 같은 영화감독은 뮤직비디오에서 시작했고, 여기서 익힌 영상 기법이 고스란히 영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했다.
이 대목에 다시 주목하는 것은 1990년대가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영상 제작 전반의 전성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보다 훨씬 짧은 3~4분가량의 뮤직비디오를 음반사들이 어마어마한 예산으로 무장시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했던 시기다. 특수 효과뿐 아니라 서사, 기법, 심지어 편집 기술에도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곧 소개할 감독들이 장편 영화로 옮겨가면서 짧았던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매체로서의 뮤직비디오는 서서히 매력을 잃기 시작했고, 그저 홍보 영상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비록 지면 기사지만, 여기서 검색창을 띄우고 다음의 영상을 보면서 읽기 바란다. ‘MoR이 뽑은 뮤직비디오 거장들의 베스트 5’를 정리했으니 ‘꼬-옥’ 검색해서 찾아보도록.
Björk ‘All Is Full of Love’(1999)
Portishead ‘Only You’(1998)
크리스 커닝햄 Chris Cunningham
첫 번째로 소개할 감독은 영국 출신의 뮤직비디오 감독 크리스 커닝햄이다. 비디오 아티스트이면서 음악 프로듀서로도 활동한 그의 이름은 생소할 수 있지만 전자음악의 대가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의 뮤직비디오는 어디선가 한 번쯤 봤을 것이다. 커닝햄의 스타일은 상당히 독창적이라 그의 손길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이펙스 트윈뿐 아니라 플라시보Placebo, 포티셰드Portishead, 심지어 비요크Bjork와 마돈나Madonna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커닝햄은 공포 영화의 음산함을 뮤직비디오로 이식한 장본인이고 지금 봐도 손색없는 컷을 자랑한다. 특히 에이펙스 트윈의 1997년 히트곡 ‘컴 투 대디Come to Daddy’는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장면이 여럿 있다. 현재 커닝햄은 별다른 활동 없이 은둔하고 있다는데 아마 영국 어딘가의 침침한 다락방이나 지하실에서 세상을 놀라킬 다음 장관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스파이크 존즈, 미셸 공드리와 공동으로 제작사를 차리기도 했다.
크리스 커닝햄의 뮤직비디오 베스트 5
Björk ‘All Is Full of Love’(1999)
Placebo ‘36 Degrees’(1996)
Aphex Twin ‘Come to Daddy’(1997)
Portishead ‘Only You’(1998)
Leftfield ‘Afrika Shox’(1999)
Wax ‘Southern California’(1995)
Fatboy Slim ‘Weapon of Choice’(2001)
스파이크 존즈 Spike Jonze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한 영화 〈그녀 Her〉(2014)로 더욱 인정받은 스파이크 존즈는 오래전부터 이미 ‘힙’하다 못해 ‘쿨’한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 각본의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1999)와 〈어댑테이션 Adaptation〉(2002)으로 극장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것. 스케이트보드 문화와 보더들에게 빠져 있던 그는 이 도시 곡예사들의 행보를 사진과 비디오로 기록하다가 소닉 유스Sonic Youth, REM,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와 인연을 맺으면서 뮤직비디오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중 위저Weezer라는 얼터너티브 록 밴드의 데뷔 앨범 수록곡 ‘버디 홀리Buddy Holly’(1994)의 뮤직비디오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1970년대 미국의 국민 시트콤 〈해피 데이스Happy Days〉의 장면을 1990년대 밴드의 모습과 뒤섞은 이 영상은 마치 추억의 드라마에 특별 출연한 듯한 신선함과 ‘저걸 어떻게 했지?’라는 의아함을 동시에 남긴 대작이다. 다음 해에는 펑크 밴드 왁스Wax의 ‘캘리포니아 California’(1995)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했는데, 실제 몸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남자(CG가 아니다!)가 뛰어가는 모습을 2분 20초 이상 롱테이크로 촬영했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요즘 영화나 다른 영상 콘텐츠에서 보기 어려운 참신함과 도전 정신이 돋보여 필자 같은 이들의 ‘아재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존즈는 현재 바이스Vice TV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면서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연출하거나 간혹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한다.
스파이크 존즈의 뮤직비디오 베스트 5
Wax ‘Southern California’(1995)
Yeah Yeah Yeahs ‘Y Control’(2004)
Weezer ‘Buddy Holly’(1994)
The Chemical Brothers ‘Electrobank’(1997)
Fatboy Slim ‘Weapon of Choice’(2001)
Kylie Minogue ‘Come Into My World’(2002)
Chemical Brothers ‘Star Guitar’(2001)
미셸 공드리 Michel Gondry
프랑스 출신 감독 미셸 공드리는 3명의 감독 중 가장 다양하고 실험적인 크리에이터일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터널 선샤인〉(2004)으로 더 알려졌지만 그는 뮤직비디오로도 다양하고 재미난 실험을 했다. 서두에서 말했듯 그 역시 뮤직비디오에서 연마한 노하우를 영화의 참신함으로 확장시켰다. 일본의 트립 합 그룹 치보 마토Cibo Matto의 1996년 작 ‘슈거 워터Sugar Water’만 봐도 공드리의 상상력이 엿보인다. 얼핏 콘셉트는 단순해 보인다. 화면을 횡으로 분할하고 한쪽은 재생, 다른 한쪽은 되감기로 진행되는데 중간에 좌우가 바뀌고, 곡의 끝에는 다시 뮤직비디오의 시작과 같은 화면으로 돌아간다. 말하자면 무한 반복 재생의 뮤직비디오인데, 어디서부터 순서가 바뀐 것인지 여러 번 반복해서 봐야 대략 감이 오기 시작한다.
카일리 미노그Kylie Minogue의 2002년 곡 ‘컴 인투 마이 월드Come Into My World’도 아리송한 작품이다. 미노그가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활보하는데, 후렴구가 돌아올 때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이때 또 다른 미노그가 등장하며 같이 동네를 돌기 시작한다. 교묘하게 연출된 안무와 편집으로, 다섯 번째 후렴구에서는 미노그로 화면이 가득하다. 하나 더 있다.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의 ‘스타 기타Star Guitar’(2003)는 기차 안에서 바라다보는 시선으로 시작하는데 영상이 진행되면 차츰 바깥 풍경이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에 맞춰지기 시작한다. 기차역, 신호등, 저 멀리 공장 굴뚝, 울렁이는 언덕과 지평선, 심지어 빠르게 지나치는 다른 기차까지 재생 속도를 절묘하게 조정해가며 전혀 그래픽을 첨가하지 않고도 기억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뮤직비디오를 완성했다.
미셸 공드리의 뮤직비디오 베스트 5
Kylie Minogue ‘Come Into My World’(2002)
Cibo Matto ‘Sugar Water’(1996)
Chemical Brothers ‘Star Guitar’ (2001)
Daft Punk ‘Around the World’ (1997)
The White Stripes ‘Hardest Button to Button’(2003)
Daft Punk ‘Around the World’(1997)
White Stripes ‘Hardest Button to Button’(2003)
지금까지 살펴본 3명의 뮤직비디오 거장들에게 얻을 것이 있다면 바로 아이디어와 실행력일 것이다. 우리의 시각 문화가 점점 상투적이고 뻔해지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이 두 가지의 결여 때문이 아닐까? 할리우드는 재탕과 속편으로 영화 시장을 물들였고 액션, 스릴러, 호러, 시대물, 판타지 할 것 없이 모두 슈퍼히어로물처럼 CG 의존형 장르가 되었다. 비단 영상 산업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아이디어는 항상 넘쳐나고 이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도구와 인력은 여느 때보다 쉽고 편리하게 구할 수 있는데 왜 여전히 우리는 쳇바퀴를 돌고 도는가? 이 말을 듣고 그동안 어딘가 불편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면, 위의 뮤직비디오들을 보고 쳇바퀴에서 내려와 자신만의 작업을 하기 바란다.
MoR(Master of Reality)
블랙 사바스에서 만나 화이트 라이온에서 갈라진 록·메탈광들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황규철과 디자인 저술가 박경식이 결성한 프로젝트 동아리. 두 사람은 서울, 인천, 경기, 오사카, 교토, 도쿄, 토론토, LA, 베를린까지 바이널을 디깅하면서 나눈 음악과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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