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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은 분노와 저항을 가득 담아 기세를 떨치던 펑크 음악이 MTV 개국, 음악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세와 맞물려 상업적으로 변질되던 시기다. 갈수록 말랑해지는 펑크 음악에 싫증이 난 대중은 새로운 무언가를 갈망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1960년대 후반 블랙 사바스와 레드 제플린으로 대표되었던 초기 헤비메탈 사운드에 펑크의 공격성까지 결합한 새로운 헤비메탈 사운드를 시도하는 밴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음악은 더욱더 강력한 음악을 원했던 사람들의 니즈를 완벽히 충족하며 무서운 기세로 주류 음악 신에 자신의 등장을 알렸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NWOBHM(New Wave Of British Heavy Metal)이라 칭했다. 이름대로 헤비메탈의 의미를 재정립하고 변화된 음악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춰 이미지 구축에도 신경을 썼다.
MTV 친화적인 비주얼 마케터까지는 아니더라도 잡지와 라디오가 전부였던 과거에 비해 확실히 늘어난 미디어 노출의 기회를 잡기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들은 반항적인 아이덴티티를 비주얼로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라이더 재킷과 할리 데이드비슨 바이크 등으로 마초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며 빼쭉빼쭉한 철제 스터드가 알알이 박힌 액세사리와 긴 머리로 원초적인 야수성을 드러내었다. 금속음만큼이나 날카롭고 각진 형태로 밴드 로고의 타이프와 심벌을 만들었으며 앨범 아트워크나 공연 포스터도 쇠 비린내 물씬 풍기는 이미지로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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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익히 아는 ‘헤비메탈’ 밴드의 사전적 이미지는 NWOBHM 등장과 함께였다. 주다스 프리스트Judas Priest의 로고와 앨범 커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폴란드 출신의 디자이너 로스와프 샤이보Rosław Szaybo가 디자인한 로고타이프[1]와 앨범 〈British Steel〉 커버[2]를 보면 마치 면도날처럼 직선적이고 공격적이다. 캐나다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더그 존슨Doug Johnson이 디자인한 〈Screaming for Vengeance〉[3]〈Defenders of the Faith〉[4]〈Turbo〉[5] 연작 시리즈는 헤비메탈 밴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앨범 커버 3부작으로 남아 있다.
더그 존슨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만화풍의 그림체, 금속 질감의 표현이 인상적인 이 작업은 티셔츠를 비롯한 각종 굿즈로 끊임없이 재생성되어 오늘날까지 주다스 프리스트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주다스 프리스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메탈 밴드이자 라이벌인 아이언 메이든 Iron Maiden의 앨범 아트워크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주다스 프리스트가 색감 대비와 강렬한 임팩트의 아트워크로 밴드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했다면 아이언 메이든은 에디Eddie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그들만의 세계관을 앨범 커버에 투영한다.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데릭 리그스Derek Riggs가 디자인한 캐릭터 에디는 아이언 메이든의 데뷔부터 함께했고 그들이 발매하는 앨범의 메인 이미지로 커버를 장식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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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그들의 두 번째 앨범 〈Killer〉(1981)[6]에선 살인마로, 세 번째 앨범 〈The Number of the Beast〉(1982)에선 악의 화신으로, 또 〈The Trooper〉(1983)에선 영국 기병대[7]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오늘날 제임스 본드나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 캐릭터를 수많은 배우들이 연기하듯 에디도 여러 개의 탈을 쓰고 메탈 세계를 평정했다. 게다가 에디는 티셔츠, 피겨, 가방, 만화책과 PC 게임 등 다양한 매체에 판촉물로 활용되며 아이언 메이든의 세계관을 문화 전반에 걸쳐 전방위로 확장했다. 이는 오늘날 아이폰이나 줌, 각종 메타버스에서 아바타를 만들거나 연예 기획사가 K-팝 뮤지션의 또 다른 자아를 창조해 새로운 비즈니스 가치를 창출하는 마케팅과도 유사하다. 이렇듯 NWOBHM 시대의 밴드들은 음악과 함께 그 비주얼과 마케팅 전략이 그 전에는 본 적 없던 헤비메탈만의 아우라를 다지며 금속의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1980년대 헤비메탈은 비주류에서 주류 시장의 핫 아이템으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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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WOBHM의 세계관을 발전시키되 보다 깔끔한 느낌으로 정제된 ‘멜로딕 스피드 메탈’이라는 하위 장르가 탄생하기도 했는데 이 중 몇몇 밴드는 아이언 메이든의 에디처럼 가상의 캐릭터에 유럽 신화나 전설 같은 요소를 가미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시각적으로도 장식적이고 극적인 장치를 앨범이나 외모, 무대 연출에 두루두루 활용했다. 반대로 미국 헤비메탈 신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그 유명한 메탈리카나 메가데스, 앤스랙스, 메탈처치 등이 주다스 프리스트나 아이언 메이든 같은 반질반질한 메탈의 모습을 채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항적이고, 으깨어진 모습이 다반사였다. 무대 의상 또한 야수 같은 긴 머리, 미니멀한 검정 티셔츠 한 벌에 어두운색 스키니진 정도가 전부였다. 1980년대 하면 빠질 수 없는 MTV 뮤직비디오의 대두와 긴밀히 맞닿아 있는 상업적 메탈 밴드도 존재했다. 그들은 메탈의 표면 이미지만 끌어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팝 음악에 대입시켰고, 보다 가볍고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를 장착해 10대들에게 어필했다.
그들은 1970년대 초 데이비드 보위가 그랬던 것처럼 글램적 요소를 적극 차용해 가죽 재킷 위로 한껏 치장한 긴 머리를 더욱 부풀렸고, 유약한 미소년 이미지를 내세우거나 퇴폐적인 패션과 퍼포먼스로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대표적인 밴드로는 머틀리 크루 Motley Crue, 포이즌Poison, 트위스티드 시스터Twisted Sister, W.A.S.P, 그웨G’War 등이 있다. 이처럼 여러 하위 장르를 파생시키며 전성기를 맞이한 금속의 시대는 1990년대 너바나를 비롯한 얼터너티브 사운드의 도래로 그 기세가 한풀 꺾였다. 시애틀 그런지를 대표로 한 얼터너티브 음악은 당시 화려한 치장과 가십거리의 양산으로 변질된 헤비메탈의 자리를 밀어내면서 록의 순수성을 모토로 음악계에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모든 장식을 거부하고 조금은 엉성해도 꾸밈없고 거친 이미지가 쿨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반응한 대중 또한 라이더 재킷, 징 박힌 팔찌보단 찢어진 청바지, 올이 풀려 구멍이 난 낡은 티셔츠로 멋을 내곤 했다. 굴러들어온 얼터너티브가 헤비메탈의 금속적인 이미지를 ‘올드한 것’으로 전락시키자 10여 년간 지속된 금속의 시대는 차갑게 식어갔다.
하지만 오늘날 록 음악이 주류 문화에서 멀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헤비메탈이라는 이름으로 파생된 문화적, 시각적 요소는 서브컬처를 넘어 대중문화 곳곳에서 하나의 스타일로 남아 있다. 샤넬과 아이언 메이든의 컬래버레이션 티셔츠나 베트멍의 기괴한 실루엣에 얹힌 그래픽 요소에서도 헤비메탈의 잔상을 볼 수 있다. 또 제리 로렌조Jerry Lorenzo가 이끄는 피어 오브 갓 Fear of God도 트렌디한 힙합과 헤비메탈의 요소를 적극 블렌딩해 요즘 힙스터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가 직접 아트 디렉팅한 저스틴 비버의 ‘Purpose’ 월드 투어 로고타이프와 무대 의상에서 록 스타의 바이브를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헤비메탈의 새로운 가치를 확립시키며 금속의 시대를 활짝 연 NWOBHM 특유의 음악, 비주얼 아이덴티티와 세계관을 만들어낸 입체적인 브랜딩은 멀티버스, 아바타 등 다양한 매체를 적극 활용해 프로모션하는 K-팝 아이돌의 효시라고 보아도 억지는 아니다. 헤비메탈의 이미지가 대중문화의 중요한 지표로
시대에 맞게 적용되며 계속해서 생명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MoR(Master of Reality)
블랙 사바스에서 만나 화이트 라이온에서 갈라진 록·메탈광들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황규철과 디자인 저술가 박경식이 결성한 프로젝트 동아리. 두 사람은 서울, 인천, 경기, 오사카, 교토, 도쿄, 토론토, LA, 베를린까지 바이널을 디깅하면서 나눈 음악과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 유튜브에서 ‘MoR(엠오알)’을 검색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