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으로도 계절의 감각을 소환하는 영화가 있다. 여행도, 바닷가도, 록 페스티벌도 마음껏 즐기기 힘든 2020년 여름. 눈부시게 푸른 이 계절을 눈과 귀로 만끽하게 해줄 영화를 찾았다. 업계 전문가와 자타 공인 영화광이 엄선한, 뜨겁고 찬란한 여름을 닮은 영화 5.
햇빛 쏟아지던 날들
“실패한(혹은 성공한?) 혁명의 잔상은 쓸쓸한 법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몰락한 한 집안의 16세 소년 마소군. 그의 가슴에 어느 날 한 여자가 들어온다. 시대는 가족의 일상을 무너뜨렸지만, 소년의 매일은 자유분방하다. 영화의 내레이션 중 한 대목. “(시대) 변화로 내 기억은 가물거린다. 진실과 환상이 뒤섞여버렸다. 어느 여름, 작열하는 더위.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냈고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 여름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 너무 뜨거워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나의 찬란했던 열여섯 시절처럼.” 누구에게든 강렬하게 남아 있는 성장기의 순간이 있다. 소년과 남자의 ‘에네르기’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순간, 나는 그 아련한 순간을 아프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마소군의 그해 여름도, 나의 그해 여름도, 그렇게 아름다운 열정으로 남아 있다.” _ 정기영(모비딕북스 대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첫사랑은 한여름 햇빛처럼 피할 길 없이 뜨겁지만, 어느 날 돌아보면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레 우리 곁을 떠난다. 안드레 애치먼Andre Aciman의 장편소설 <그해, 여름 손님>을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감독의 섬세한 연출로 그려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은 모두가 한 번쯤 겪을 더운 여름날과 같은 영화다. 주인공 엘리오는 이제 사랑을 알아가기 시작한 열일곱 소년. 본인을 좋아하는 타인의 눈과, 누군가를 좋아하는 본인의 눈에서 사랑을 배우고 있다. 그에게 여름은 사랑의 기억이다. 시간이 지나 눈발이 날리는 계절, 문득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엘리오의 눈에서는 그해 여름이 다시 빛난다. 붙잡을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고 찬란한 첫사랑 같은, 풋풋하고 서정적인 여름이 가득한 영화다.” _ 강경근(<남산의 부장들> 조명팀 퍼스트)
화양연화
“전할 수 없는 감정이 새어 나와 스크린을 예열하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심정이 찰나를 붙들다 영원으로 흘러간다. 왕자위(왕가위)의 시간은 그렇게 끝없이 윤회하는 어떤 계절이 된다. <화양연화>는 늦여름에 찾아온 열대야 같은 러브 스토리다.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된 남자와 여자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에게 스며들기 시작한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예기치 않게 마음을 덥히는 감정은 좀처럼 꺼질 줄 모른다. 뜨거운 언어로 발화되지 않아도 서서히 드러나 되레 치명적인 진심. 애저녁에 사라진 왕조처럼 과거의 것이 됐다고 믿었던 격정의 계절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 그 마음의 열기로부터 피어오른 <화양연화>의 시간은 끝내 애틋한 밀어가 된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여름이 계속된다. 그 남자, 그 여자에게.” _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 &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스위밍 풀
“영화감독 프랑수아 오종Fran ois Ozon은 유약하고 불안한 인간의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작품을 여럿 선보여왔는데, 그중 2004년 개봉한 <스위밍 풀>은 여름과 섹슈얼리티의 교집합을 가장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는 성공한 추리소설가 사라가 프랑스의 어느 별장으로 휴양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탐스러운 금발과 탄력 있는 몸매의 줄리를 만나며 이야기가 촉발된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미스터리한 사건, 주인공의 무의식을 헤집는 기묘한 소란이 벌어지는 장소는 모두 별장 안뜰의 수영장이다. 여름과 욕망, 젊음과 죽음, 현실과 상상이 잠겨 넘치는 수영장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맘때면 <스위밍 풀>을 찾게 된다.” _ 전여울( 피처 에디터)
여름 이야기
“여름 특유의 경쾌함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을 무장해제시키는 열기 속에서는 날을 세우기보다 조금 느슨하게 한 템포 쉬어 가거나 살짝 망가져도 좋을 것 같은 여유가 감돈다. 에리크 로메르`Eric Rohmer 감독의 <여름 이야기>에는 이런 여름의 공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계절 시리즈’ 중 여름편으로, 감독 특유의 감수성과 섬세함, 유머와 지혜가 영화 곳곳에 가득하다. 배경은 프랑스 브르타뉴의 휴양지 생뤼에르. 홀로 입사 기념 휴가를 떠난 주인공 가스파르는 이곳에서 3명의 여자를 상대해야 할 운명에 처한다. 친구 같은 마고, 정열적이고 글래머러스한 솔린, 이상형 레나. 이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가스파르의 모습이 때론 한숨을, 때론 웃음을 끌어낸다. 프랑스 해변의 풍경, 어디로 향할지 모른 채 흩날리는 마음, 위트와 재치 가득한 대사까지 모든 것이 여름 그 자체인 영화다.” _ 김수진(<럭셔리>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