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구중정 씨가 직접 디자인하고 고쳐서 사는 집.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집이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준다는 믿음으로 평소 지향하는 분위기를 공간 속에 녹여냈다. 검정을 베이스로 하는 공간이지만 그 속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고 침묵이 흘러도 전혀 어둡지 않았다.
서재는 구중정 씨가 가장 아끼는 공간. 이 집의 유일한 원목 가구인 스툴은 절친한 친구인 김동리 작가가 제작했다. 다리를 기둥이 아닌 벽처럼 디자인해 건축적 미감을 살렸다.
구중정 씨가 직접 그린 반려묘 만두. 만두는 10년 넘게 동거하며 원룸부터 지금 아파트까지 구중정 씨의 자취 일대기를 함께했다.
오전에 방문한 구중정 씨의 집에는 아침 햇살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거실을 지나 부엌 벽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아파트 1층은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힘들다는 단점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낭만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는 집에 열려있는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적당한 긴장과 활력을 부여하고 싶었기에 1층의 위치는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이 집을 디자인하며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어Peter Zumthor의 아틀리에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그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주방으로 출근해서 커피를 내리고, 작업실로 가서 직원들과 일하다가, 오후에는 응접실로 가서 잠시 쉬며 하루를 보내요. 집의 모습에서 삶의 태도가 보이더라고요. 공간 디자인이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이끈다는 믿음을 지니는 계기가 되었죠. 실제로 저도 이 집의 디자인에 맞춰 살아가고 있고요.”
구중정 씨도 ‘재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집을 잠자고 밥먹는 공간이자, 작업실로 활용한다. 그래서 기존 거실 구조를 재구성해 소파와 TV 대신 서재와 작업 공간으로 만들었다. “넓지 않은 집이지만 책 보는 공간, 차 마시는 공간, 일하는 공간 등 구역을 나누니 정리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질서가 잡히더라고요. 직접 디자인한 집에서 사는 것의 장점이기도 하죠.”
환경 보호에 도움이 되고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다. 주변의 걱정처럼 선풍기를 세 대나 틀어도 여름 나기가 힘겹지만, 덩치가 큰 에어컨이 놓여 지금의 완벽한 거실 뷰가 흐트러질 것을 생각하면 무더위를 이겨낼 힘이 생긴다.
바스락거리는 호텔식 침구, 창을 향해 놓은 캠핑 의자, 포인트가 되는 코럴빛 서랍장이 모인 침실 공간에서는 낯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아파트에서 흔치 않게 공간 전반에 검은색을 쓴 것 또한 이 집 디자인의 큰 특징. “벽지를 시공해주는 분이 검정 벽지 위에 하얀 풀 자국이 남아 건축주에게 항의받을 거라고 말리셨어요. 제가 건축가이자 건축주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죠.(웃음) 제가 원하는 차분한 느낌의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검은색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벽지 위에 남은 얼룩을 일일이 지우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결과물이 만족스러워 실제로 제 작업에서도 검정을 더 많이 쓰게 됐어요. 직접 경험한 장점이니 건축주에게도 자신 있게 추천해줄 수 있죠.”
아침마다 나무 그림자가 식탁 옆 벽에 드리우는 1층 집의 묘미. 여름이 되니 나무 그림자도 더욱 무성해져 바라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된다.
구중정 씨의 서재에는 에드워드 호퍼 작가의 회화 ‘케이프 코드 모닝Cape Cod Morning’이 놓여 있다. “호퍼는 그림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과 우울감을 다룬다는 해석이 많아요. 그런데 저는 이 그림 속에서 홀로 창밖을 내다보는 여인이 고독해 보이긴 하지만, 외롭거나 슬퍼 보이지는 않았어요. 고요한 분위기를 차분하게 음미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저도 일상에서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공간을 설계할 때나 삶의 태도를 말할 때 ‘침묵’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거든요. 그러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서 ‘친밀한 침묵’이란 표현을 발견하고, 더더욱 제 뜻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어요. 저는 한 공간에서 함께 있는 이들이 아무 말 없이 그냥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매우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구중정 씨의 집도 친밀한 침묵이라는 표현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차분하고 농밀한 분위기가 흘러서 그와 반려묘 만두, 취재팀 모두 다정하게 첫인사를 나누고 잠시 쉬어 가듯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집은 구중정 씨가 침묵의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게 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며 스스로 더 깊어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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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정 씨에게 집 구석구석을 소개해달라 부탁했다. 그의 손길이 닿아 완성된 작은 세계를 둘러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검은색 벽
국내에서는 한 업체에서만 생산하는 검정 벽지를 구하고 흰색 풀 자국을 닦아내느라 고생할 것을 각오하며 완성한 창가의 벽면. 조명으로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차분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처마처럼 뻗어 나온 상판의 디자인도 매력적이다.
반려묘를 위한 부엌 상부장
“만두의 집에 얹혀산다”고 농담할 만큼 만두의 삶에도 꼭 맞게 디자인했다. 천장에서 이어지는 상부장을 떼고, 냉장고와 높이를 맞춘 낮은 상부장을 달아 만두를 위한 캣타워로 만들었다. 그 의도에 맞게 상부장 위에서 여유를 부리는 만두의 모습을 보면 무척 뿌듯하다고.
집의 중심이 되는 작품
집이 완성되기도 전부터 집 분위기를 미리 그려보게 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검정 몸통에 삼원색과 흰색의 도형이 달려 이 집에 잘 어울리는 볼타Volta사의 모빌 ‘Paris’, 국립중앙박물관의 반가사유상 오브제 등 각종 사물이 놓여 있지만 전혀 지저분하지 않다. 애초에 이곳 책장 위는 이런 사물들을 위한 구역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