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노가 럭셔리 브랜드 최초로 제품과 이미지를 배제한 텍스트 전용 캠페인을 선보인다. ‘발렌티노 내러티브Valentino Narratives’ 캠페인에 함께한 작가 정세랑과 패션과 텍스트가 가진 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010년 장르 문학 전문 잡지 <판타스틱>에 단편소설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3년 후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장편소설상’을, 2017년 장편소설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2020년에는 2015년 발표한 <보건교사 안은영>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화해 대중적 관심을 얻었다. 경쾌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르 문학과 문단 문학을 오가며 꾸준히 활동 중이다. 오버사이즈 셔츠 드레스는 발렌티노.
이미지가 담지 못하는 감정을 텍스트로 전하고자 하는 브랜드와 무한하게 이동하는 내러티브의 영향력을 믿는 작가가 만났다. 화려한 볼거리로 시선을 끄는 브랜드 사이, 발렌티노는 제품과 이미지를 배제한 채 온전히 이야기에 집중했다. 전세계 작가들의 작품을 조명하며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마련한 ‘발렌티노 내러티브’ 캠페인은 지난해 S/S 시즌부터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내재한 감정의 본질에 가닿을 수 있는 렌즈가 되어준다”라고 말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엘파올로 피촐리의 인터뷰에서 발렌티노가 이미지를 향유하는 것을 넘어 텍스트를 채집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올해는 현대문학 작가 17인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 구절을 한데 모았다. 저명한 영국 작가 하니프 쿠레이시Hanif Kureishi,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집필한 안드레 애치먼André Aciman 등 쟁쟁한 라인업 가운데 한국의 정세랑 작가가 이름을 올렸다. 정세랑은 유쾌한 비틀기를 뽐내는 SF는 물론 환경과 여성 등 주목해야 하는 세상의 면면을 따뜻하게 풀어낸 문단 문학으로 사랑받고 있다. 작가는 ‘사랑’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에 즉각적으로 각인되는 모습을 상상하며 발렌티노와 텍스트의 여정에 동행했다.
“언젠가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날이 있었다. 그는 그 말을 초콜릿 바를 받듯 가벼이 받았었다. 나의 마음, 꺾인 부분에서는 잔가루들이 날렸는데.” “너는 모르지.”정세랑이 발췌한 <덧니가 보고 싶어>의 텍스트.
한국을 대표해 발렌티노 내러티브 캠페인의 작가로 선정된 소감은?
기쁘고 영예롭다. 덕분에 동시대 창작자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고 올해의 독서 리스트가 풍성해졌다.
‘사랑’이라는 주제에 첫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의 구절을 발췌한 이유가 궁금하다. 출간 이후 시간이 꽤 흐른 작품이다.
발렌티노로부터 어떤 종류의 사랑이라도 좋다고 폭넓은 선택지를 받았다. 즐거운 탐색이었는데, 사랑에 대해 길게 펼쳐서 쓴 것은 많은 반면 한 페이지로 압축한 것은 별로 없더라. 초기작으로 거슬러 오르다 발견했다. 메시지보다는 표현에 더 집중한 부분이다. 안쪽의 내밀하고 부드러운 중심을 통과시켜 사랑을 말하는 감각 자체를 서술한 구절이다.
의뢰를 받았을 때, 다른 작품의 텍스트도 고려 대상이었나? 어떤 소설이었나?
<지구에서 한아뿐>의 끝부분에 등장하는 입술에서 우주로, 우주에서 입술로 사랑이 번지고 수렴하는 키스 장면도 고려했었다. 근래에는 너무 건조한 내용만 썼나 보다. 역시 초기작이 촉촉하다.(웃음)
럭셔리 브랜드 최초의 텍스트 전용 광고 캠페인에 참여했다. 이미지나 영상과 다른 텍스트의 힘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텍스트 캠페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과감하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더 크고 화려한 정보를 전하려고 할 때 반대 방향을 향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어떠한 목적보다는 ‘세계의 작가
들이 쓴 사랑의 문장들을 꽃잎처럼 실어 보내는 캠페인이구나’ 생각했다가 문득 그게 ‘목적 없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텍스트가 가진 가벼움은 놀라운 확산성으로 전환되고, 여전히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퍼져나가기 좋은 형태로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다. 무형에 가까운 가벼움이 얼마나 멀고 정확히 날아갈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
전 세계 17인의 작가가 본인의 소설에서 ‘사랑’에 관한 구절을 발췌했다.
피엘파올로 피촐리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좋다. 여러 정체성의 조합이 아닌가. 각자의 뿌리, 저마다의 정체성,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는 일이 즐겁다”라며 이야기를 읽는 이유를 전했다. 당신은 왜 책을 읽는가?
마음껏 상상해도 재료가 들지 않아서 좋다. 여러 매력적인 이야기 형태가 있는데 책이 가장 자본을 덜 필요로 하는 점이 마음에 든다. 각자 자신의 머릿속에서 감독이 되어 예산을 고려하지 않고 상상해볼 수 있지 않나. 이런 무한한 매력 때문에 다른 매체를 즐기다가도 결국 책으로 돌아가게 된다.
패션과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새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한다는 것 아닐까? 이번 ‘발렌티노 핑크 PP 컬렉션’ 서두에 “지금 고통받는 이들께, 우리가 당신을 보고, 당신과 공감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선언이 있었는데 문학적인 순간이었다. 패션과 이야기 모두 아름다움을 향하다 보면 선함을 향하게 되고, 평화로 이어지고, 미래로 무한히 나아가게 되는 것 같다.
동 세대 젊은 독자층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완벽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같은 질문을 가진 사람들끼리 연결될 때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응집시키는 것이야말로 문학과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모여 그물망을 짜면 찾아 헤매던 답을 언젠가 건져 올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물망을 정교히 만지는 작가가 되고 싶고, 넘치게 받고 있는 사랑에 대한 보답도 하고 싶다.
당신의 이야기 속 귀엽고 엉뚱한 상상과 따뜻한 문장들은 세상을 향한 다정한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최대 관심사는 무엇인가?
지속 가능성. 패션계에서도 지속 가능성을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그 시도들이 보편화되길 바란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디자이너가 다수 포함될 거라고 믿는다. 디자인은 자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내곤 하니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있다면?
사람마다 다른 형태의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 각자 그것을 힘껏 찾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 그들의 행복을 파괴하지 않는 세계를 원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