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관장 황준석)이 개관 8주년을 맞아 상설 전시실을 전면 개편했다. 〈훈민정음〉의 서문을 바탕으로 기획한 전시장에서 디자인과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한글과 우리 문화와 마주했다.
〈훈민정음〉 33장을 형상화한 조형물. 사진 남궁 선
천지인을 모티브로 연출한 3부의 중앙에는 〈훈민정음〉을 전시했다. 사진 최용준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서로 통하지 않으니).” 한글 창제 원리가 담긴 〈훈민정음〉 머리글을 여는 이 문장은 지난 1월 새롭게 개편한 국립한글박물관 상설 전시의 각 공간을 엮는 얼개다. 총 7개의 공간으로 나눠진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전은 ‘(1부)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2부) 내 이를 딱하게 여겨’, ‘(3부)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4부) 쉽게 익혀’, ‘(5부) 사람마다’, ‘(6부) 날로 씀에’, (7부)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라’로 구성되었다. 각 섹션에는 문자의 본질과 감각을 키워드로 한글이 창제된 1443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콘텐츠를 총망라했다.
이전 전시와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텍스트 중심에서 영상과 인터랙션 디자인 중심으로 한글을 보여주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훈민정음〉 33장을 아크릴 모형으로 제작한 조형물이 빛을 내며 시선을 압도한다. 전시대가 완만하게 높아지는 까닭에 저절로 글자에 시선이 머무르며 걸음을 안쪽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는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훈민정음〉이 글을 깨우치지 못한 백성들에게 한 줄기 등불이 된 것을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바닥과 벽면을 활용한 미디어 아트는 한글로 가득 찬 세상을 실감 나게 보여주며 몰입감을 유도한다. 문자가 없던 어둠 속에서 지식의 빛이 한글을 통해 깨어나는 서사를 바탕으로 전시 공간은 어두운 미디어 아트 공간에서 동선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올수록 점점 밝아진다. 이번 전시실 개편에 참여한 양태오 디자이너는 로비 공간과 3부 〈훈민정음〉 전시 공간에 전통 요소를 살려 일관성 있고 세련되게 풀어냈다.
한글로 쉽게 풀어 쓴 각종 언해서가 전시된 4부. 전시대와 바닥에 디스플레이를 설치해 시야를 가리지 않는 개방적인 공간을 연출한 점이 돋보인다. 사진 남궁 선
현대의 한글을 소개하는 7부. 사진 남궁 선
전시에서 눈여겨볼 또 한 가지 포인트는 풍부한 한글 전시 콘텐츠다. 조선인들이 잃어버릴세라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고이 새겨놓은 물건, 양반이 노비에게 쓴 협박용(?) 한글 편지, 주사위를 굴려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르면 이기는 조선 판 보드게임 ‘승경도 놀이’의 한글 말판 등이 웃음을 자아낸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한글 창제 초기 민간에 전파하기 위해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해 보급했다는 깨알 지식도 얻을 수 있다(예나 지금이나 종교의 힘은 강하다). 전시는 조선에 머무르지 않고 일제강점기 주시경 선생을 비롯해 한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운동가들, 조선어학회가 한글에 대한 연구 성과를 알리기 위해 1932년 창간한 잡지 〈한글〉, 광복 이후 한글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를 둘러싼 논쟁, 오늘날 한글 자판의 시초가 된 공병우 모아쓰기 타자기,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시작된 한글 서체 개발 붐 등을 시간순으로 짚어본다. 다만 현대에 이르러 정부 기관과 몇몇 기업에서 출시한 한글 서체들을 나열한 데 비해 독립 한글 서체 디자이너의 활동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은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한글의 우수함과 역사를 살피는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전을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훈민정음, 천년의 문자 계획〉전
전시 디자인 김은재, 이보영, 조현교(국립한글박물관)
로비 디자인 및 자문 양태오(태오양스튜디오)
전시 홍보물·그래픽 디자인 워크룸
웹사이트 hangeul.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