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호랑이,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하는 소리에 모두 기세등등하기를. 한 해의 첫머리, 삿된 것을 멀리하고 복을 구하는 마음을 담아 우리 문화 속 호랑이를 들여다본다.
오죽하면 최남선은 조선을 ‘호담국虎談國’이라 했을까. 그는 “중국의 용, 인도의 코끼리, 이집트의 사자, 로마의 이리처럼 조선에서는 신성한 동물을 첫째 호랑이라고 한다. 신화, 전설, 동화를 통하여 나타난 호랑이 이야기들은 설화 세계에서 최고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단군 신화에서 국조國朝의 상징이 된 것은 호랑이 대신 곰이건만 수많은 설화에서, 민담에서,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곰이 아닌 호랑이다. 견훤의 어린 시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삼국유사> 권2, 후백제 견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를 호랑이가 가호했다는 이야기(설화집 <가문총화>)에서도 호랑이는 나라를 세우는 조력자이자 영웅의 보조자다. 그뿐인가. 할머니가 등 긁어주며 들려주던 이야기 ‘해님 달님’ 속에서도 곰 대신 호랑이다. 마을 뒷산을 지키는 산신, 인간의 시공간을 지키는 십이지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사신四神(동 청룡, 서 백호, 남 주작, 북 현무)까지 늘 우리 곁에서 수호신으로 함께한 호랑이. 동물 세계 으뜸인 이 영물 앞에서 우리는 ‘좋으면서 싫고, 무서우면서 우러러보는 양가 감정’을 드러내왔다. 한국인에게 신앙과 숭배의 대상, 해학과 질타의 대상 사이를 넘나드는, 부정과 긍정의 모순을 모두 안은 존재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호랑이는 우리에게 단지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가치를 지닌 영물이라는 것이다.
민화 수집가 김세종 씨가 말하는 호랑이 그림
한국인은 호랑이 그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수집가들은 왜 호랑이 그림에 열광했나
88 서울 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는 동안 수집가들 사이에서 까치호랑이 그림의 인기가 대단했다. 미술품 수집가라면 잘생긴 호랑이 그림 한 점 소장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그 열풍이 거셌다. 작품성 뛰어난 그림 한 점이 변두리 주택 한 채 가격 정도로 거래되었다. 물론 작품성이 떨어지는 그림도, 가짜 그림도 많아 수집가들이 애를 먹기도 했다. 당시 30대 초반의 나도 사전 지식과 경험없이 까치호랑이 그림을 한 점 구하려다 결국 비싼 돈으로 가짜 작품을 사는 고통을 경험했으니, 까치호랑이 민화에 대해 특별한 애증이 있는 수집가라 하겠다.
종이에 채색, 105×73cm, 20세기 초
이 그림은 무속화의 일종이다. 일본 도쿄의 어느 화랑에서 처음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호랑이 두상과 몸통·꼬리·다리의 표현이 처음 본 도상이기도 했고, 현대적이면서 추상적이고 완숙한 회화미에 감동받아서 꼭 구입하려고 많이 노력한 그림이다. 가격도 꽤 비싸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일본에 우리 호랑이를 그냥 두고 올 수 없어 오랜 시간 동안 흥정해 기어코 한국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고 한참 후 일본 오사카 뒷골목에서 고미술 상점을 하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그는 예전에 도쿄의 한 미술관에서 열린 <이조까치호랑이 특별전> 큐레이터로 일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할머니에게 까치호랑이 작품을 구해달라고 보챘다. 그 할머니가 전하기를, 당시 그 전시에 출품한 이들은 모두 부유한 상류층 컬렉터로, 조선의 호랑이 그림을 무척 귀한 소장품으로 여겨 쉽게 팔지 않는다고 했다. 이후 ‘조선의 까치호랑이 민화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과 명분으로 몇 년 동안 소장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했고, 한 점 한 점 어렵게 국내로 들여왔다.
종이에 채색, 106.5×75cm , 조선 후기
배는 불뚝 나오고, 살이 쪄서 한껏 둔해 보이나 웅크리고 앉아 있는 뒷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 호랑이는 편한 자세로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까치의 조잘거림에 귀 기울인다. 까치는 호랑이에게 뭔가 열심히 속살대고 있다. 그림 속 두 주인공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흐르지만, 동시에 안정된 진중함이 느껴진다. 본래 참가치는 서로 당당하게 맞서는 법이다. 안정된 구조, 세련된 필선과 구성 등 수준 높은 회화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렇게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일본에서 구해오면서 자신감이 생겨 12년 전 개인 전시장에서 <조선 까치호랑이>라는 타이틀로 조촐하게 호랑이 그림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다른 민화도 수집하기 어렵지만 민화 호랑이 그림은 워낙 귀하고, 명품을 수집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때 전시 준비도 꽤 어려웠다. 그 뒤 12년 동안 더 좋은 전시를 열고 싶은 욕망이 생겨 민화 호랑이 그림과 호랑이 관련 자료를 열심히 수집했다. 임인년 호랑이해를 맞이해 이번에는 한민족이 선사시대부터 조선 시대, 근대와 미래 호랑이를 어떻게 조형적으로 표현하고 즐겼는가의 관점으로 대규모 전시를 하려고 전시 공간과 후원자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안 됐는지 12년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종이에 채색, 84.5×55.5cm, 조선 후기
누구나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통쾌하게 웃지 않을 수 없다. 굵은 선을 대담하게 처리한 것, 특히 사람이 웃는 모습보다 더 호탕하게 호랑이 두상을 표현한 것까지 구석구석 작가만의 재치와 의인화 기술이 드러난다. 도상이 현대 추상회화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완성된, 한 폭의 그래픽 같은 그림이다. 진주에서 발견되어 일명 ‘진주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은 유명한 호랑이 그림이다.
호랑이 민화는 순수 회화다
민속학자들에 따르면 예로부터 서낭신은 우리 가정의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 서낭신은 까치호랑이를 그의 신탁을 시행하는 사자(심부름꾼)로 삼고, 집집마다 돌봐주는 역할을 부여했다. 역사학자나 민속학자들의 논문과 자료를 보면 유독 우리 민족에게 호랑이는 많은 상징성과 신앙성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온갖 그림과 공예품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물로 용과 함께 상좌를 차지한 영물이 바로 호랑이다. 울산의 선사시대 암각화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호랑이가 등장한다. 호랑이에 대한 역사적 이해나 도상학적 연구를 해야 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사료적 해석이나 도상학적 해석에 집착하다보면 호랑이 그림은 죽은 유물로 박물관 지하 창고에서 잠잘 수밖에 없다. 그 상징성과 해학성이 넘치게 많은 까치 호랑이 그림은 더더욱 세상 밖으로 나와 모두가 감상하고 즐겨야 하는 예술 작품이다. 전문 미술사가나 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거창한 현대 미학 이론에 비추어 해석해야 하는 난해한 예술도 아니다. 그저 따뜻한 마음과 평정심을 지니고 그림의 필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린 이의 감성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조선 말기 사람들도 그렇게 작가와 관객이 자연스럽고 통쾌하게 웃으며 소통했으리라.
종이에 채색, 80×48cm, 조선 후기
아래 눈과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놀란 표정이 흥미롭다. 번개 맞은 듯 머리털이 곤두선 모습이긴 하지만 계면쩍게 혀를 옆으로 날름거리며 귀엽게 웃는다. 그 모습을 동시에 순간 포착해 짓궂고도 기발한 모티프로 표현한 작가의 필력에 감동할 뿐이다. 일반 호랑이 민화보다 좀 거칠지만 순간적으로 능숙하게 그린 그림의 묘미가 있다.
내가 좋아해 수집한 민화 속 까치호랑이는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전 세계 많은 민족이 호랑이를 좋아하고, 호랑이의 용맹성을 내세우지만 우리 민족처럼 가정으로 끌어들여 안녕을 기원하는 영물로 받아들이는 민족은 드물다. 우리 호랑이 그림의 핵심은 의인화다. 사납고 무서운 동물 호랑이에 풍자와 해학을 더해 인간과 친숙한 친구로 만든다. 여기에 조선 민화 작가의 자유롭고 독창적 조형관을 더한다. 그 추상화된 조형은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하나의 회화 세계를 이룩했다. 까치호랑이 같은 우리 민화를 K-art로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펼쳐 보여야 하는 이유다. 민화는 아트이고, 순수 회화이며, 세계적이다.
김세종 대표는 광고 기획을 업으로 삼으면서도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미술품 수집에 발을 들였다. IMF 외환 위기로 애써 모은 미술품과 재력을 비우는 아픔을 겪은 후 예술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평창아트갤러리를 열었다. 40년 수집 인생 이야기를 담은 책 <컬렉션의 맛>을 썼다. 2018년 예술의전당에서 그가 수집한 민화를 전시하는 <판타지아 조선>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