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모두 아는 얘기지만, 지난여름까지는 모두 모르는 얘기였다. 금융 회사의 TV 광고에서 전문 댄서에 견줄만한 춤 실력과 외모를 선보인 모델 얘기다. 이름은 ‘오로지’. 패션에 관심 많은 ENFP 유형의 인간으로 올해 나이 스물두 살. 짧은 시간에 1천만 뷰를 넘긴 광고 조회 수가 말해주듯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자연스럽게 모델 ‘로지’의 이력이 랜선을 타고 흘러 다녔다. 지난해 8월 인스타그램에 등장해 고작 1년 만에 10만 명의 팔로워를 거느린 전문 크리에이터로 성장한 인플루언서. 반전은 그다음이었다. 로지를 소개하는 정식 문구에 ‘버추얼 인플루언서’라는 이름표가 달린 것. 실제 인간이 아니라 MZ 세대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에 8백 개의 표정을 입히고, 대역을 써서 촬영한 신체에 3D 모델링 기술을 적용해 조합한 ‘가상 인간’이라는 거였다. 재미있는 건 주근깨와 점이 박힌 얼굴로 맛집을 찾아다니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사진을 올려놓은 그의 인스타그램에 몰려들던 팔로워들의 관심이 로지의 ‘커밍아웃’에도 식을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로지 인스타그램 @rozy.gram
로지의 등장이 흥미를 부추긴 건 맞지만, 사실 전 세계에서 활동 중인 버추얼 인플루언서는 이미 1백 명이 넘는다. 대표적 사례는 바다 건너 ‘라라랜드’를 거점으로 활약 중인 릴 미켈 라. 뿌가 머리와 주근깨투성이 얼굴이 특징인 열아홉 살 소녀로, 자신의 유튜브에 신곡을 발표하는 뮤지션 겸 모델이다. 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타임>이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에 꼽힌 그녀의 팔로워는 무려 3백만명이다. 지난해에는 샤넬, 프라다 등 세계적 패션 브랜드의 모델로 활약하며 1백억 원이 넘는 수입을 올렸다. 미켈라가 여느 가상 인플루언서와 다른 점은 자신의 SNS를 통해 성 소수자를 응원하고, 청소년 인권을 말하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내건다는 점이다.
릴 미켈라 인스타그램 @lilmiquela
컴퓨터그래픽스로 만들었든 아니든, 인플루언서가 주목받는 이유는 인플루언서 마케팅의 비중 때문이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인플루언서 마케팅 규모는 약 16조 원으로 추산한다. 이 와중에 등장한 가상 인플루언서에게 마케팅 부서들이 목을 빼는 건 이들이 지닌 분명한 장점 때문이다. 흠을 찾아내기 힘든 기술력에 생생한 세계관까지 더한 가상 인플루언서는 공간 이동과 스케줄 등 현실적 제약에서 자유롭다.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피부과를 다닐 필요도, 성형 걱정도 없다. 요즘 연예인의 골칫거리인 학교 폭력 스캔들에 휘말릴 일도 없다. 감정이 널뛸 이유도 없으며 24시간 소통이 가능하다. 디지털 가상현실 세대라 불리는 MZ 세대의 거부감도 없다. 리스크가 적은 신선한 인플루언서의 등장에 버선발로 뛰어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가상 인플루언서는 스스로 사고하고 작동하지 않는다. 애초 개발자가 있으며 활동을 돕는 운영 집단이 존재한다. 가상 인플루언서는 그들이 불어넣은 정체성을 이미지로 만든 가상 인간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디지털 공간의 이용자와 마주하다 보면 정체성과 소통의 한계가 생길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긴 로지의 자기소개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지. “현재 나이 스물두 살에서 영원히 나이 들지 않는 인물.” 그러니까 우리만 나이 먹는 거야?
문일완은 <바자> <루엘> <엘라서울> 등 독자층이 제각각인 패션 잡지, 남성 잡지,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넘나드는 바람에 무규칙한 문법이 몸에 밴 전직 잡지쟁이다. 그래픽 노블을 모으고 읽는 것, 아무 골목길이나 들어가 기웃거리는 게 요즘 취미 생활. 칼럼니스트로 여러 지면에 글을 쓰느라 끙끙대고, 사춘기 코스프레 중인 딸과 아웅다웅하며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