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터의 상용화는 공예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형태와 물성을 지닌 공예품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공예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독창적인 발상으로 물성이 담긴 무언가를 만든다면 그것이 곧 공예 아닐까? 월간 〈디자인〉은 일곱 작가의 작품으로 이것 역시 공예라고 대답하려 한다.
우린
이광호
무뢰배
재료를 손으로 엮는 ‘짜기 기법’은 이광호 작가의 아이덴티티와도 같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뜨개질하는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제작 기법이 3D 프린팅을 만나 소재의 제한이 사라졌다. 대리석이나 구리처럼 손으로는 구부리기조차 힘든 소재도 마치 뜨개질에 사용하는 실처럼 자유자재로 매듭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몬트리올 파인 아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보테가 베네타의 디지털 매거진에 소개되는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kwangholee.com
D 소반
류종대
디지털 크래프트
가구 디자이너이자 요트 디자이너인 류종대 작가는 3D 프린팅 기법과 전통 공예를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가구와 오브제를 만든다. 짜맞춤 같은 아날로그적 가구 제작법과 디지털 가공 기술을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하는 과정에서 ‘의외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자연 소재를 주재료로 하되 새로운 소재와 공법을 연구하는 과정을 즐기며, 아트 퍼니처의 힘으로 현대미술과 관람객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에는 ‘디지털 크래프트’라는 주제로 한국, 일본, 이탈리아 등에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ryujongdae.com
©Yang Ian
레퀴엠 시리즈 중 선반
양승빈
레퀴엠 시리즈 중 캔들 홀더
레퀴엠 시리즈의 모티브는 인체의 뼈다.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지역 박물관의 도움으로 18세기 신원 미상 남성의 유골을 3D 스캐닝한 데이터를 3D 프린터에서 PLA로 출력해 완성했다. 어릴 적부터 잡동사니 모으는 것을 즐기던 작가는 물건의 스토리를 만드는 것에 몰두했다. 마찬가지로 주인 없는 유골에 상상력을 더해 완성한 레퀴엠 시리즈는 캐비닛을 시작으로 스툴, 캔들 홀더, 램프, 선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위 두 작품은 얼마 전 무신사테라스에서 열린 〈써킷 서울〉전에서 선보였다. seungbinyang.com
The Pearl
정령재
The Motion
장신구 작가로 활동 중인 정령재는 ‘움직임’을 주제로 한 3D 프린팅 장신구를 제작하며, 다수의 개인전과 국내외 단체전에 참여했다. ‘The Motion’(2021), ‘Sound in Motion’(2021)을 비롯한 그의 작품 대부분은 나일론의 일종인 폴리아미드를 사용한 3D 프린팅 기법으로 제작해 가벼우면서도 다양한 원색으로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ryungjae.com
양태오
이스턴 에디션
양태오가 지난 5월 발표한 가구 브랜드 이스턴 에디션은 동양 철학과 미감을 현시대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해석한 결과물로, 무작위 혹은 무기교의 미를 말하는 ‘무미’에 근간을 둔다. 양태오는 이를 NFT 작품으로도 선보였는데, 그 과정은 의외로 심플하다.
1. 고대 한반도의 유물을 디지털 스캔해 3차원 데이터로 변환한다.
2. 3D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스캔본을 재편집한다.
3. 3D 프린터를 이용해 오브제를 출력한다.
작품 구매자는 취향대로 소재, 색상을 적용해 자신만의 3D 프린팅 공예품을 소유할 수 있다. ‘디지털 프로그램의 정교한 기술도 결국 사람의 손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양태오 디자이너는 인간과 기계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한다. teoyangstudio.com
©Louis Walpole
Of Lace and Porcelain
니코 콘티
Nico Conti
Black Lace Vase
몰타 출신의 영국 도예가 니코 콘티는 표면에 레이스처럼 섬세한 장식을 3D 프린팅 기법으로 뽑아낸다. 그의 작품은 2019년 영국 왕립예술대학교 졸업 작품전을 통해 알려졌고 이후 컬렉트 아트 페어에 전시되면서 주목받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익숙한 화병 형태에 레이스를 덧입히는 식이었는데 고전적이면서 동시대 감각이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기계가 만들어낸 디테일한 레이스 장식은 금세 바스러질 것 같으면서도 단단하고 예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올해 청주공예비엔날레 본전시에서도 니코 콘티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nicoconti.com
합 시리즈 중 Monster Rabbit - Farewell
윤상희
합 시리즈 중 Immature Spring
합 시리즈는 현대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자아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공예품이다. 사회 제도나 외부의 시선뿐 아니라 스스로 만든 억압과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 심리적 트라우마를 공예로 치유하고자 했다. 이는 곧 작가의 자아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자 해방을 향한 탈출로인 셈이다. 작가에게 ‘공예하기’란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이다. 이 시대 모든 여성에게 건네는 위로인 합 시리즈는 올해 3월 개인전 〈미스티리어스 위먼Mysterious Women〉에서 첫선을 보였다. 3D 프린팅 기술로 형태를 출력해 표면에 옻칠공예의 건칠 기법으로 색을 올리는 방식으로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