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 사진이나 화보를 보면 브랜드의 제품 대신 의외의 피사체에 포커스를 두는 경우가 있다. 제품과 옷을 걸친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패션 사진의 정형화된 문법에 따라 소비를 진작시키는 대신 작가 개인의 색채를 주입해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런 작품 같은 이미지들의 시작점엔 예술과 패션 두 세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흔적과 자취를 남기는 ‘사진가’가 있다.
<에르메스> 매거진 2015 S/S 시즌 에디토리얼.
셀린느 2016 프리폴 시즌 캠페인.
(왼쪽) 끌로에 2021 시즌 캠페인. (오른쪽) ‘Gather Sweet Nectar’, 2019 © Zoe¨ Ghertner 2020
조에 거트너
“사진가 조에 거트너가 촬영한 끌로에의 새 비주얼 프로젝트는 플리츠 곰팡이부터 용암 웅덩이, 벌집, 알몸의 여인에 이르기까지 묘하게 추상적이면서도 실제 같은 자연 이미지의 집합체를 보여준다. 그간 조에 거트너의 발자취를 따라온 내게는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익숙한 비주얼이기도.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는 무용과 미술을 전공했고, 초기에는 정물 사진을 주로 찍었다. 유명세를 탄 건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의 지휘 아래 있던 셀린느 광고 캠페인을 비롯해 <에르메스>와 <젠틀 우먼>, <더블> 등의 매거진에 이름을 올리면서부터다. (개인적으로는 2015년도 <에르메스>에 실린 에디토리얼을 가장 좋아한다.) 조에 거트너는 자연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하는 사진가다. 그가 이름을 새긴 결과물들에는 꽃, 과일, 나무 등 자연적 요소가 곧잘 등장한다. 또 사회가 정의 내린 기준을 벗어나 자신만의 또렷한 주관에 기대어 여성이 지닌 강인함을 필름 속에 담아낸다.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환시키려는 오늘날 사회 분위기를 의식하면 패션이라는 영역 안에서도 여성의 이미지는 과거에 비해 꽤나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는데, 그 가운데 조에 거트너는 여성 본연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이끌어내는 사진가 중 하나다. ‘저는 여성들에게 그들의 가림막을 내려놓으라고 해요.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저는 그들의 역사가 담긴 얼굴이 보고 싶거든요.’ 그의 여성관이 잘 드러나는 대목. 조에 거트너는 개인 작업물과 일련의 패션 비주얼을 통해 ‘여성’과 ‘자연’ 두 지점이 교차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지어 올린다.” _ 포토그래퍼 채대한
질 샌더 2019 F/W 시즌 캠페인.
‘루스 온 더 폰Ruth on the Phone’ 시리즈 중 아내 루스의 발을 비춘 사진.
‘워싱업Washing-up’ 시리즈, 2000
질 샌더 2019 F/W 시즌 캠페인.
나이젤 샤프런
“나이젤 샤프런의 뷰파인더는 대부분 집에서 출발해 그의 일상이 깃든 공간 어딘가에 멈춘다. 이사 준비로 비어 있는 아버지 사무실을 찍은 ‘아빠의 사무실Dad’s Office’ 시리즈(1997-1999), 건조대에 놓인 식기를 찍은 ‘워싱 업Washing-up’ 시리즈(2000), 슈퍼마켓 계산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쌓인 물건들을 담은 ‘슈퍼마켓 체크아웃Supermarket Checkouts’ 시리즈(2005) 등 그는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행위와 장면에 시선을 둔다. 평범하고 쉽게 목도할 수 있는 물건과 장면을 담는 현대사진가가 나이젤 샤프런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경우 사진의 소재뿐 아니라 표현 방식에서도 카메라의 시선이 일반 사람의 시선과 매우 닮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수직이나 수평 같은 구도 계산에서 자유롭고, 적정한 노출값에 대해서도 관대한 편. 사진 비평가 샬럿 코튼Charlotte Cotton은 ‘나이젤 샤프런은 사진을 찍기 위해 의도적으로 장면을 구성하려는 충동에 저항한다’라고 말했다. 사진을 대하는 이 담담한 태도는 패션 사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질 샌더 캠페인이 대표적. 특히, 스코틀랜드에서 로드 트립이라는 콘셉트로 촬영한 2019 F/W 시즌 질 샌더 캠페인, 그 가운데 젖은 땅 위에서 샛노란 실크 의상을 입은 모델을 촬영한 사진은 아내 루스를 찍은 사진처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구도를 담고 있다. 나이젤 샤프런은 이처럼 개인 작업과 커머셜 작업 모두에서 자신의 색깔을 간직하고 이를 표현하는 몇 안 되는 사진가다. 또, 후대 사진가들에게 패션에 천착하기 전 세상을 보는 독자적인 관점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 인물. 영국 사진가 제이미 호크스워스와Jamie Hawksworth의 일화도 흥미롭다. 런던으로 이사를 간 제이미 호크스워스가 나이젤 샤프런에게 그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싶다고 제안했는데, ‘저는 어시스턴트를 쓰지 않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고. 대신 두 사람은 애틋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제이미 호크스워스는 여러 매체 인터뷰를 통해 나이젤 샤프런이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_ 사진 전문 서점 ‘이라선’ 김진영 대표
질 샌더 2020 S/S 시즌 캠페인.
, RVB Books, 2019
크리스 로즈
“오래 다니던 잡지사를 그만두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던 시기, 그러니까 예쁜 이미지를 ‘만들기’보다 ‘들여다’보는 일에 흥미를 느낄 때쯤 사진가 크리스 로즈를 알았다. 그즈음 <눈> 매거진과 <어나더 맨> 매거진에서 촬영한 그의 제품 화보를 본 것 같다. 멋 부리지 않고, 오래 봐도 질릴 것 같지 않은 이미지들. 크리스 로즈는 사진에 관심이 많던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관찰하고 기록하는 세계에 발을 들였다. 현재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주로 패션 작업물을 선보인다. 매거진과 <어나더 맨> 매거진을 비롯해 미우 미우, 질 샌더, 보테가 베네타, 루이 비통 등 굵직한 패션 하우스로부터 러브 콜을 받고 있다. 그의 작업물 중 특히 질 샌더 광고 캠페인을 눈여겨봤고 그중에서도 볼 때마다 아련한 기분을 전하는, 도시를 옮겨 다니며 촬영한 프로젝트를 애정한다. 그리스 끝자락 밀로그섬에서 촬영한 질 샌더의 2020 S/S 시즌 캠페인이 그렇다. 그날의 온도가 상상될 만큼 빛으로 가득 채워진 사진들은 한 폭의 풍경화 같기도. 초현실주의와 뉴 포토그래픽스(개발로 인해 변해가는 자연을 찍는 풍경 사진)로부터 영감을 받는 그이기에, 패션이라는 상업적 카테고리 안에서도 대상을 보기 좋게 포장하려 하기보다 자신만의 시각을 진솔하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그려낸다. 이때 빠지지 않는 주 소재가 인간이 만든 풍경과 우연 속에 놓인 정물이다. ‘나는 내 주변을 본능적으로 포착한다. 계획하거나 구성하지 않고 장면을 바꾸지도 않는다.’ 이처럼 일상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자연스럽게 포착하는 작업 방식은 개인 작업물에도 선연히 드러난다. 크리스 로즈의 사진집 <호텔 머메이드 클럽>은 여행지에서 지나쳤을 법한 이국적이면서도 익숙한 사진들로 빼곡하다. 그가 어시스턴트로 일하던 시절 다양한 여행지에서 마주한 7년간의 기록이 담긴 작품집으로, 35mm 카메라로 일상의 단편을 차곡차곡 채집한 다큐멘터리와도 같다.” _ 프리랜스 에디터 이선화
, Galerie Buchholz, Berlin 2020
, Riehen, Switzerland, 2017
볼프강 틸만스
“먹다 버린 음식물이나 쓰레기 더미, 클럽의 힙스터들···. 무의미해 보이는 것 혹은 날것 그대로의 피사체를 담은 스냅사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출발점에 독일 사진가 볼프강 틸만스가 있다. 그는 현대미술계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현재까지 ‘유스 컬처youth culture’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예술가다. 2000년대에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현대미술상인 터너 상을 수상한 첫 번째 사진가이기도. 그의 사진은 ‘이게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싶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오히려 이런 친밀함과 장난스러운 시도가 새로움과 도전을 추구하는 젊음을 향해 일관된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1988년 유럽 클럽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업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같은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비롯해 패션 사진으로 작업 스펙트럼을 점차 넓혀갔다. 내가 창간호부터 수집해온 <판타스틱 맨> 매거진 표지에 볼프강 틸만스의 사진이 등장한 2010년, 이 작가의 활동 무대가 순수 예술에서 패션 세계로 확장되었음을 비로소 ‘실감’했다. 그는 <아레나 옴므 플러스> 매거진 2016년 10월호 표지에도, 심지어 후드 바이 에어Hood by Air의 런웨이에도 등장했다. ‘사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영역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의 시선과 태도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 여전히 사람과 사물의 일상적 측면에 주목하며, 모델과 스타일링, 디스플레이 등 여러 요소에서 비전형적인 패션 사진을 창작해냈다. 티셔츠만 걸친 모델의 뒷모습이나 창가 배경의 평범한 정물 사진을 담은 <아레나 옴므 플러스> 표지 등이 대표적. 볼프강 틸만스는 갤러리에 사진을 전시하는 방식에서도 예상 경로를 벗어난다. 마치 미국이나 유럽의 틴에이저들이 자기 방을 좋아하는 이미지로 채워나가듯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진을 자신의 질서대로배열해 그만의 미학과 스토리텔링을 구현한다.” _ 아트 디렉터 이용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