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전면 철거 예정인 우리나라 최대 시계ㆍ귀금속 상가 예지동 시계 골목. 디자인문화연구자 이정은과 함께 도시 공간의 변화가 가져온 도심 제조업의 위기를 살펴본다.
©이종구, B급사진
예지동 시계 골목의 이력은 화려하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시계 수리 골목, 우리나라 최대의 시계ㆍ귀금속 상가 보유, 종로와 강남의 시계ㆍ귀금속 기술자들을 배출한 기술의 고향이자 시계 장인들의 작업실로 불렸다. 한국 산업 발전의 흥망성쇠를 함께하며 약 70년간 시계ㆍ귀금속의 메카였던 예지동은 서울주택도시공사가 시행하는 세운4구역 도심재정비사업으로 올해 전면 철거될 예정이다.
종로4가 대로변에 인접한 시계 골목은 커다란 시계 조형물이 입구를 장식한 작은 골목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상가와 노점이 들어선 곳이다. 최근 청계천을 끼고 불고 있는 이 일대의 재개발 사업이 단기간에 정해진 것은 아니다. 1982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후 예지동의 지역 발전은 그대로 멈췄다. 재개발을 기다리며 건물을 보수하거나 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포기해 곳곳이 노후한 모습이다. 한편으로 큰 변화 없이 오래된 골목길의 풍경은 시간이 멈춘 듯 예스러운 정취를 자아내 오히려 이 지역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 모습을 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사진을 찍고, 드라마와 영화 제작진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전미영 연구자의 예지동 시계 산업 연구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부터 시계 기술자와 세공인들이 본격적으로 예지동에 자리를 잡았다. 시계 수리 기술을 가진 이북민들이 수리와 판매를 겸하는 만물상을 운영하며 시작된 시계ㆍ귀금속 상권은 1970년대 당시 우리나라 최대 규모였던 예지상가(1974년 준공)가 들어서며 정점을 찍었다.
전국의 나까마(중간 상인)들이 모여들고 점포와 다방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예지동에서 팔려나간 시계와 귀금속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80년대에는 국내 중소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시계를 생산했으나, 간소화된 혼례 문화와 더불어 중국의 저가형, 스위스의 고급형 시계에 모두 자리를 빼앗겼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시계 마니아들이 증가하고 빈티지 시계가 유행하면서 시계 복원과 수리에 관심이 높아져 다시 활기를 찾았다.
©조현균, B급사진
예물 시계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사실 이곳의 명성은 부속별로 수리를 담당하는 전문 시계 기술자들 덕분이다. 노후한 모습과는 다르게 이곳의 시계 수리와 복원에 대한 축적된 노하우와 기술은 전혀 나이 들지 않은 셈이다. 고급 시계의 정밀 부품을 깎아 만들거나 시계의 문자판을 복원하는 까다로운 작업은 이곳에서만 가능해 아직도 전국에서 많은 주문이 들어온다. 상가나 점포 안으로 들어가 시계 장인들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시간이 빠르게 느껴질 정도.
오랜 역사가 쌓인 예지동에는 도제식으로 전달되는 시계 기술과 정보를 공유하는 기술 네트워크, 기술자와 상인, 판매자를 연결하는 유통 네트워크와 더불어 시계 수리 산업을 떠받치며 공생하는 식당과 재료상, 공업사, 철공소, 다방 등 여러 산업 네트워크가 끈끈하게 얽혀 있다. 예지동의 해체는 사실 시계 수리 생태계 자체의 해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지동의 상황은 디자인 산업을 뒷받침하는 도심 제조업이 앞으로 처하게 될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다.
물리적 장소로서 예지동은 곧 사라지지만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는 것은 아직 이르다. 여러 시계 장인들과 점포가 종묘 인근에 자리한 세운 스퀘어로 이동했고, 다른 공장들도 종로3가 등 인근 지역으로 점포를 이전해 운영을 계속한다. 골목길 노점의 경우 골목이 폐쇄되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킬 예정이며, 한 장소에 모여 운영할 방법을 고민 중이다. 시계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기술자들과 노점의 사장님들은 어디서든 이른 아침부터 출근해 시계를 수리하고 판매하는 성실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시계 기술과 공장 정보, B급사진 소속 작가들이 모여 예지동을 기록한 사진, 예지상가에서 개최된 전시 〈예지동 작은 발표회〉 등 연구자들의 예지동 기록 및 연구 활동은 전미영 연구자가 운영하는 ‘예지동 시계골목 이야기’ 사이트(clock-alley.com)에서 볼 수 있다.
예지동 시계 골목을 방문할 기회는 남아 있다. 방문할 예정인 사람에게 예지상가 옥상에서 보는 아름다운 일몰을 추천하고 싶다. 예지동 일대를 덮고 있는 함석지붕에 드리우는 노을을 바라보며 종로의 빌딩 숲 사이에서 건물 높이는 가장 낮지만 가장 번영했던 예지동을 기억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