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나는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새 게시물을 보았다. 그는 1930년에 그린 ‘Simulacrum of the Night’이라는 작품을 포스팅했다. 누군들 달리가 죽은 것을 모르겠느냐마는 적어도 내 타임라인에서는 그가 마치 현업 작가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작가의 작품을 큐레이팅하는 페이지와 마치 그 작가가 직접 포스팅하는 것처럼 보이는 페이지는 팔로워에게 다른 감각으로 느껴진다. 후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유령 같아 보인다.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에는 해커들의 영웅 딕시 플랫 라인이 등장한다. 한때 천재적인 해커였던 그는 해킹 사고로 죽음에 이르지만 인격과 기억을 기록해둔 롬을 통해 다시 부활한다. 그의 능력을 계속 이용할 필요가 있던 세력에 의해 그는 죽음 이후에도 노동하는 존재가 된다. 급기야 몇 가지 미션이 끝난 후 이 무한한 삶이 지겹고 무의미해진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발 나를 삭제해줘.” 한 인물에 대한 기록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재가공마저 용이해진 지금, 수많은 딕시 플랫라인이 네트워크의 유령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러시아 코스미즘을 주창한 니콜라이 페도로프(1828~1903) 는 만약 인민의 혁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세대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전 세대 조상들의 노력과 헌신에 의한 것 이므로 진정한 혁명은 조상들을 부활시켜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해괴한 주장은 100여 년 전에는 공상 수준의 헛소리였지만, 네트워크 공간이 열리고 ‘과거인’들의 데이터가 아카이빙되고 재조합이 가능한 현재, 의외의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물론 되살아난 조상들의 의지는 아니며, ‘현재인’의 필요에 의해 소환된 좀비에 가깝다. 그러나 동시에 이 되살아난 좀비들에 의해 현재인들은 그들과 무한한 경쟁을 치러야 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 미술 비평가 임우근준이 21세기의 특징은 ‘오래된 것의 충격’이며 이러한 시대를 ‘좀비-모던’이라 명명하길 원했다는 점을 상기해도 좋을 것 같다.
데이터베이스적 공간은 현실의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모든 과거와 현재를 혼합해 게시하는 곳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과거라는 개념이 희미해진다. 문제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실제 현실이 혼합되어 하나의 우주를 이루는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 무시간적 공간과 만날 때 발생한다. 이제 살바도르 달리는 현실의 미술관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처럼 굴 것이다. 증강현실 글라스를 착용한 당신에게 작품을 세심하게 안내할 수도 있고, 자신의 굿즈를 사도록 영업 멘트를 던질 수도 있다. 그리고 수많은 관람객과 상호작용하면서 얻은 데이터로 더욱 인간적인 대화를 구사하며, 이미 조사를 통해 파악한 당신의 미적 취향을 저격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당신은 도대체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 것일까? 상품인가? 작품인가? 유령인가?
최근 방영한 엠넷의 AI 음악 프로젝트 〈다시 한번〉 같은 프로그램은 인공지능 기반 합성 기술을 이용해 고인이 된 가수가 전혀 부르지 않았을 새로운 곡을 부르게 했다. 이 공연을 보면서 가수의 유족과 팬들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누군가 악의를 품고 그의 목소리를 타락시킨다면? 우리는 당장에라도 유령의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제발 나를 삭제해줘.”
시간에 대한 무심한 버무림이 데이터베이스적 공간의 특징이라면, 공간에 대한 무심한 버무림은 메타버스적 시간의 특징이다. 하나의 시간 속에 다중의 공간이 혼재하고, 하나의 공간 속에 다중의 시간이 혼재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숙명이라면 우리가 가진 기존 시공간의 관념부터 재조정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유령은 인간의 유한한 감각 밖의 존재들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유한함은 근대적 시간과 공간에 종속된 육체 덩어리의 한계 안에서 구성된 것이다. 그 한계 밖으로 넘어서는 존재가 등장하는 순간 그것은 당장 유령처럼 보일 것이다. 과거 에디슨의 축음기가 발명되었을 때, 처음 그 물건을 접한 사람들은 레코딩된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 두려움부터 느꼈다.
지금의 메타버스 패러다임은 가상공간의 자유로움과 다양한 인격 표현이 가능한 아바타의 유연함을 찬양한다. 그리고 이활동과 현실 경제의 교환 관계를 연결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 네트워크의 유령은 혼합현실에서 통용 가능한 뼈와 살이 있는 신체를 부여받게 된다. 이 반대 방향의 역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질문해야 할 시점이 오고 있다. 최근 필자는 〈가상정거장〉이라는 공공 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에란겔: 다크투어〉라는 작품을 연출했다. 이 공연은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 룰을 그대로 사용해 100명의 일반 관객이 가상공간인 에란겔섬에 다이빙한 뒤 본 게임 방식인 살육전을 버리고, 순전히 관광객으로 공간을 유랑하는 실험이었다. 놀랍게도 총기를 소지하고 발사할 수 있도록 허락했음에도 공연을 망치려는 관객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미수자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술적 오류로 공연 초반 튕겨 나갔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이 평화에 대해 의아한 생각이 들어 참가자인 김승범(PROTOROOM) 작가에게 물었다. 그는 의외로 명료하게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은 무한히 죽고 되살아나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이 공연은 게임 공간을 사용할 뿐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나는 이 경험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이들은 공연 속에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점프력을 보여줬고, 지치지 않는 체력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신체적 능력을 바탕으로 에란겔섬을 구석구석 탐색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일회적 공연이라는 형식 속에서 무한히 되살아나는 게이머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약한 인간 신체 능력에 종속된 존재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이 공연을 통해 참가자들이 경험한 신체성은 메타버스 담론에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메타버스라는 개념은 가상과 현실이 적당히, 각각 절반쯤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신체적 감각을 만들려는 기획이며, 우리 스스로가 과거인과 단절한 채 미래의 유령이 되자는 제안인 것이다. 자, 다시 질문해보자. 우리는 네트워크의 새로운 유령을 맞이하고 우리 스스로 유령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오영진은 한양대학교 에리카 한국언어문학과 겸임교수다. 2014년 잡지 ≪쿨투라≫에 문화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문학과 문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글을 써 왔다. 주요 논문으로는 “컴퓨터게임과 유희자본주의”(2016), “공감장치로서의 VR”(2017)가 있다. 『 한국 테크노컬처 연대기 』(공저, 2017), 『 81년생 마리오 』(공저, 2017), 『 금지된 것들의 작은 역사 』(공저, 2018) 등을 집필했다. 인문학협동조합의 3기 총괄이사와 총무이사를 역임했으며 2015년부터 한양대학교 에리카 교과목 ‘소프트웨어와 인문비평’을 개발하고 ‘기계비평’의 기획자로 활동해 왔다. 컴퓨터게임과 웹툰, 소셜 네트워크 등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의 미학과 정치성을 연구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을 소재로 한 웹반응형 인터랙티브 스토리 〈햇살 아래서〉(2018)의 공동개발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