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오싹한, 가끔은 유익한 서양 타이포그래피의 숨은 역사를 요긴하게 풀어냅니다.
사전은 전체주의를 ‘개인은 전체 속에서 비로소 존재 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을 근거로 강력한 국가권력이 국민 생활을 간섭·통제하는 사상 및 그 체제’로 정의, 요약한다. 즉 개인보다 전체를, 사회를, 집단을, 국가를 우선해 국가나 민족의 권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나 이득을 희생해야 한다는 사상이자 국가 체제다. 이탈리아 파시즘, 독일 나치즘, 일본제국의 군국주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가 대표적인 전체주의 정치체제다. 여섯 번째 ‘기묘한 서체 이야기’에서는 타이포그래피에서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가며 낱자를 스타일로 예속시키려는 갖가지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위) 어도비 잰슨 프로 레귤러. (아래) 코리어 뉴 레귤러.
고정 폭 글꼴
고정 폭fixed width 혹은 단일 폭 monospaced 글꼴은 각각의 낱글자가 동일한 폭을 차지하는 글꼴을 말한다. 한글은 본래 네모 틀이기 때문에 태생 자체가 고정 폭이지만, 라틴 글꼴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대소문자로 구성되어 있어 더욱 어려운 개념이다. 어도비 젠슨 프로 레귤러Adobe jenson pro regular(이미지 1)는 대표적인 세리프 서체로 가로 폭, 수평 공간이 글자마다 다른데, 코리어 뉴 레귤러courier new regular (이미지 2)는 대표적인 고정 폭 글꼴로, 대소문자에 관계없이 E, i의 가로 폭이 같다. 이렇게 소문자 i 나 대문자 X가 동일한 폭으로 디자인된 글꼴을 고정 폭이라 한다. 이는 독재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글꼴이라기보다는 기술적인 발전으로 인해 파생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산업혁명이 일던 1800년대 중반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모노타입과 라이노타입 조판기가 인쇄 기술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이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온 수기식 조판이 사라지고 납활자를 기계식으로 주조하는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이렇게 자동 조판기에서 글자를 입력하는 인터페이스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키보드, 과거에 사용했던 타자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기로 문자를 기록하는 인쇄 기술에서는 각 글자가 일정한 공간만큼 수평으로 움직여야 입력이 가능했다. 글자 사이 공간을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i든 X든, 대문자든 소문자든 균일한 폭으로 글꼴을 디자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타자기 때문에 단일 폭, 고정 폭 글꼴이 생겨났다. 이는 글자 수를 정량화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과거 할리우드 영화 제작 사무실은 오직 코리어 11pt로 영화 각본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고정 폭 글꼴인 코리어로 각본을 쓰면 종이의 분량만으로도 영화의 대략적인 상영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 제작자는 각본 더미를 손에 쥐어보기만 해도 영화의 러닝 타임이 2시간짜리인지 1시간 반짜리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오늘날 디지털 환경에서는 이러한 글꼴을 필요보다는 기호에 따라 만들고 사용하는 편이지만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경우 수백만 줄의 코드를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일정한 폭의 글자를 선호한다.
브래드베리 톰슨의 ‘알파벳 26’
단일형 문자
글자가 대소문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라틴 알파벳의 매력 아닌 매력이다. 같은 글자에 옵션이 2개인 셈이니까. 대소문자의 유래에 대해 서술하기에는 그 역사에 비해 지면이 적기 때문에 따로 언급하지 않겠지만, 20세기 초에 대문자와 소문자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점만 짚어보자. 19세기 중반에 이미 통합의 외침이 있었고, 스위스, 독일, 특히 바우하우스에서는 소문자주의가 유행하기도 했다. 막스 빌Max Bill, 오틀 아이허Otl Aicher 등 당시 소문자주의를 지지하고 실제로 실행한 모더니즘을 이끌었던 거장 디자이너들을 떠올려보면 된다. 같은 시기에 미국 그래픽 디자이너 브래드베리 톰슨Bradbury Thompson은 알파벳 26(이미지 3)이라는 단일 알파벳 폰트를 발표해 대소문자의 통일을 시도했다.
이미 C, O, S, V, W, X, Z는 대소문자의 형태가 동일하기 때문에 나머지 19개 글자인 a, e, m, n과 B, D, F, G, H, I, J, K, L, P, Q, R, T, U, Y만 조형적으로 통일했다. 기본 형태로 사용한 글꼴은 바스커빌이다. 타이포그래피마저 정치색을 띠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유럽 모더니즘에서 산세리프체는 옛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미래를 함축하는 매개체로 여겼고, 나치즘은 블랙레터에서 아리안족의 영광과 월등함을 찾았다. 또 헬베티카를 중립적인 서체로 명명함으로써 정치적 성향을 한층 더 고조시킨 것도 상기해볼 수 있다. 역시나 인간의 지식과 사상을 전달하는 매체인 서체에도 통제와 규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