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반브룩이 디자인한 맨슨 서체. 미국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에서 이름을 따왔다.
공포 영화의 고전인 〈엑소시스트Exorcist〉(1973)에서 랭캐스터 머린 신부(작년에 타계한 거장 중의 거장 막스 폰쉬도브 분)는 12살 리건에게 빙의한 악령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라고 엄명한다. 그때까지 리건의 엄마는 수많은 의사를 만나 온갖 시달림으로 고통받는 딸의 원인 모를 병을 고치려 했다. 인근 성당의 신부 역시 소녀에게 악령이 씌었다는 데에 반신반의하지만 퇴마 베테랑이었던 머린 신부는 바로 리건에게 퇴마 의식을 올린다. 주기도문을 외우듯 몇 번 반복하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소녀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지만 소용이 없다. 오히려 리건을 사로잡고 있는 악마는 그 작은 소녀의 허리를 꺾거나 머리를 돌려 공포와 괴로움을 더한다. 그렇게 이길 수 없는 영체와의 싸움에서 마침내 그 정체가 악마의 왕인 파주주Pazuzu(*)로 밝혀지자 어린 리건을 사로잡고 있던 힘이 약해져 결국 퇴마 의식이 성공한다(퇴마와 타이포그래피의 상관관계가 궁금하다면 계속 읽어보길 바란다).
1980년대 초 그래픽 디자이너 수전 케어Susan Kare는 애플이라는 작은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며 동료 앤디 허츠펠드Andy Hertzfeld와 함께 내장용 비트맵 스크린용 폰트를 하나둘씩 디자인했다. 두 사람은 이 폰트들의 이름을 고민하다 함께 다니던 고등학교의 등굣길 거리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이를 알게 된 스티브 잡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뭐, 도시 이름을 쓰는 건 좋지만 동네 거리보다는 세계적인 도시로 해야지!” 그리하여 뉴욕, 제네바, 토론토, 런던, 시카고, 모나코가 서체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
이처럼 서체 작명에는 고민이 담긴다. 고전적인 세리프 서체 계열인 가라몬드, 캐슬론, 바스커빌, 보도니 등은 서체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그만큼 디자인에 신중을 기했음을 의미한다. 에릭 길의 길 산스나 아드리안 프루티거의 프루티거도 마찬가지다. 물론 예외도 있다. 소위 그래픽 디자인계의 반항아로 알려진 조너선 반브룩은 자신이 만든 서체 이름을 1970년대 미국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에서 따와 ‘맨슨Manson’이라 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헬베티카도 사실 개명 전에는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라는 다소 길고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었는데, 1960년대 초 미국 광고업계에 진출하기 위해 좀 더 발음하기 쉽고 접근이 쉬운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한편 곧이곧대로 성실하게, 생김새 그대로 이름 붙어 운명처럼 이름에 맞게 쓰이는 서체도 있다. 1989년 캐롤 트웜블리Carol Twombly가 어도비에서 디자인한 트라얀Trajan은 트라야누스 기둥에 새겨진 글자를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우아한 서체로 사용되고 있다(한동안 미국 할리우드 영화 포스터의 비공식 전용 서체이기도 했다). 마커펠트를 비롯해 코믹 산스나 파피루스 같은 서체 역시 그 속성을 그대로 보여줄 만큼 이름이 잘 들어맞는다. 한편 ‘헬로키티폰트’로 더 잘 알려진 쿠퍼블랙은 자그만치 100년 전에 디자인한 서체로 이름보다 별명이 더 유명한 예다.
수많은 아류작을 낳은 헬베티카. 공기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 서체는 개리 허스트윗Gary Hustwit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헬베티카〉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름은 다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아무리 봐도 그게 그거인 서체들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헬베티카는 1960년대 미국 광고업계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복제와 아류를 낳았다. 1980년대에는 뉴 헬베티카 격인 노이에 헬베티카를 자족을 대폭 늘려 발표했고, 그 후 유니카Unica, 님버스Nimbus, 아쿠라트Akkurat, 포마Forma, 에이리얼Arial, MS 산세리프를 비롯해 최근 들어 헬베티카의 ‘응답하라 1957’ 격으로 등장한 노이에 하스 그로테스크와 헬베티카 나우까지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고 있다. 헬베티카 또한 당시 대표적인 산세리프 서체인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를 업데이트한 것이라고 하니 아류작의 아류작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어디 헬베티카뿐일까. 고전적인 서체, 이를테면 앞에서 언급한 가라몬드, 보도니, 캐슬론과 바스커빌 등의 아류작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결국 서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태어남과 동시에 이름이 붙지만,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서체가 어떻게 활용되어 훗날 어떻게 이름을 남기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부모처럼 서체 디자이너도 자신이 디자인한 서체가 널리 쓰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디에 쓰일지, 누가 쓸지 모르는 일이기에 마치 이름에 힘을 부여하듯 유독 신경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름 그 자체가 아니다. 디자이너들이 퇴마 베테랑 머린 신부처럼 작업에 적합한 서체를 선정하고 각 서체의 성질을 파악한 뒤 적재적소에 독특하게 활용하는 인사이트를 발휘할 때 비로소 서체의 힘과 그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
* 파주주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악마의 왕이다. 저승에 살며 죽은 자를 불러오는 서풍과 서남풍을 지배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자신을 파주주 알가라드Pazuzu Algarad로 개명한 어느 백인 사탄 숭배자가 두 남자를 살해하고 그 유해를 자신의 집 뒷마당에 묻은 기괴한 사건도 있었다.
** 현재는 시카고와 모나코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후 애플은 가라몬드, 미리어드, 헬베티카 를 기업 전용 폰트로 제작해 사용하는 데에 이어 현재는 샌프란시스코를 사용한다. 흥미롭게도 애플은 지금도 특정 주제(도시 이름)를 하나의 프로그램에 적용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한동안 OSX의 업데이트 버전에 고양잇과 이름을 붙이더니 몇 년 전부터는 미국의 주요 산맥으로 이름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