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도널드 트럼프라는 전대미문의 예측 불허 캐릭터가 백악관을 차지했다. 그 후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 트위트 몇 줄에 주식 그래프가 널뛰고 세계가 쿵쾅거렸다.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건 지난 시간이 확인해주지만, 링 위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난폭한 레슬러처럼 요란하게 힘을 과시하는 ‘천조국’ 대통령을 지켜보는 건 꽤 불편한 경험이었다. 아무려나, 트럼프에게 주어진 4년 임기가 끝나는 중이고, 수많은 방송 채널이 경마 중계하듯 전해준 차기 대선 레이스 결과는 그의 패배였다. 트럼프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백악관에서 짐을 빼지 않겠다며 몽니를 부리는 중이지만, 어차피 시간은 다음 대통령 조 바이든의 것이라는 걸 세계가 인증하는 중이다.
최근 미국 온라인 곳곳에서 시 한 편이 화제가 되었다. 트럼프 재임 기간, 미국 국민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온전한 백악관, 역대 대통령의 사적이고 인간적 포즈가 사라졌음을 안타까워하는 시는 “이제 백악관에는 문학과 시가 없습니다”로 시작해 “사랑과 행복의 모든 재미와 기쁨, 표현은 어디로 갔나요?”로 마무리된다. 흥미로운 건 한 매체에 실린 칼럼에서 이 시를 인용한 칼럼니스트의 코멘트. “질 박사가 그 시간을 다시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질 박사? 그가 누구길래 백악관의 우울을 달래고 이스트윙의 등대가 될 수 있다는 거지?
눈치챘겠지만 미국의 제46대 대통령 당선자 조 바이든의 아내 질 바이든Jill Biden이 그 주인공이다. 궁금한 건 차기 영부인에게 거는 기대에 ‘여사’라는 관례 대신 ‘박사’를 붙인 이유다. 2015년 미국 부통령의 아내로 한국을 방문한 질 바이든의 보좌관이 우리 언론에 “질 바이든 여사가 아닌 박사로 불러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다. 당시 백악관 사이트에 실린 공식 프로필 역시 ‘질 바이든 박사’였다. 조 바이든이 부통령이던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질은 부통령의 아내이면서 영어 교사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질은 세컨드레이디 역할 외에도 자신의 직업을 계속 유지하면서, 정치인의 아내뿐만 아니라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가며 균형을 맞추는 드문 사례다.” 2008년 당시,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의 평가다. 대선 레이스가 무르익던 지난 8월, CBS 뉴스가 질 바이든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컨드레이디 때처럼 퍼스트레이디가 되어도 계속 일을 할 건가요?” 질의 대답은 명쾌했다. “계속할 겁니다. 가르치는 일은 단순히 내 직업이 아니라 나 자신이니까요.” 교육자로서 당당한 프라이드가 느껴지는 이 대답의 배경에는 그가 지나온 시간이 자리한다.
교사이자 엄마이자 할머니인 질 바이든은 영문학 석사와 교육학 석·박사 등 학위를 네 개 땄고, 40여년 동안 공립 고등학교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작문을 가르쳤다. 남편의 영향력이 엉겨 붙는 걸 차단하기 위해 당시 상원의원이던 바이든과의 관계도 숨겼다. 세컨드레이디 시절엔 온갖 명문대에서 출강 요청을 했지만, 학교를 옮기는 일에 응하지 않았다. “남편의 삶과 내 삶은 별개이며 내 정체성은 교사”라는 소신에 미국 국민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질 바이든은 2백31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백악관에서 출퇴근하는 투 잡 퍼스트레이디가 되기 직전에 있다. 이는 우리가 알던 영부인의 모습이 아닌 ‘21세기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일 것이다. 트럼프가 싫어서 바이든을 찍었다는 유권자가 허다하던, 그만큼 바이든도 매력 없긴 마찬가지이며, 미국식 민주주의의 쇠락한 민낯까지 여과없이 노출한 이번 미국 대선에서 유의미한 장면을 꼽으라면 이 코멘트는 꼭 남겨야 할 것 같다. “여사 대신 박사라고 불러줘요.”
문일완은 <바자> <루엘> <엘라서울> 등 독자층이 제각각인 패션 잡지, 남성 잡지,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넘나드는 바람에 무규칙한 문법이 몸에 밴 전직 잡지쟁이다. 그래픽 노블을 모으고 읽는 것, 아무 골목길이나 들어가 기웃거리는 게 요즘 취미 생활. 칼럼니스트로 여러 지면에 글을 쓰느라 끙끙대고, 사춘기 코스프레 중인 딸과 아웅다웅하며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