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1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 의식 운동Black Consciousness Movement의 창시자 스티브 비코의 부검 결과는 의아스러웠다. 1977년 8월 비코는 반아파르트헤이트 무저항 운동가로 알려졌음에도 테러 공격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벌거벗겨져 팔다리가 사슬에 묶인 채 포트 엘리자베스의 유치장에 구류되었다가 치료를 위해 무려 1000km 떨어진 남아공의 수도 프리토리아로 긴급 이송된 직후 사망했다. 경찰은 그가 장기간 단식투쟁을 벌이다가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시신을 조사한 결과 머리에 심한 구타로 추정되는 뇌출혈이 사인이었다. ‘상처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자해 흔적일 뿐’이라는 것이 당시 경찰의 주장이었다. 당시 남아공 법무장관은 현장 증인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관련해 단 한 명의 경찰관도 기소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사건 2 그의 팔다리와 목덜미는 폐타이어로 덮여 있었다. 타이어 안에는 휘발유가 찰랑거렸고, 누군가가 던진 돌에 맞아 머리에서 흐르는 피는 멎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군중 중에서 한 남자가 불타는 화염병을 들고 나와 그에게 던졌다. 순간 소름 돋는 괴성과 함께 타이어와 그 안에 갇힌 여인이 불에 휩싸였고 더 이상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잿더미로 변했다. 1986년 남아공에서 처음 영상으로 기록된 네크레이싱necklacing*의 장면이다. 희생당한 여인은 마키 스코소나라는 흑인 여성으로 주변 이웃으로부터 백인 지도층의 끄나풀로 의심되어 배신자로 처형됐다. 그는 네크레이싱에 의해 희생된 첫 사례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다만 최초로 처형 영상이 찍히면서 당시 세계 여러 매체에 보도되어 충격을 거듭 안겨줬다.
이 끔찍한 두 사건은 비록 저 멀리 남아공에서 일어난 과거의 일이지만, 지금 서양 전역에 일고 있는 반인종차별주의 운동 ‘Black Lives Matter’에서 알 수 있듯 현재와 무관한 일만은 아니다. 즉 제도적 인종차별로 인한 무고한 죽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철회함에 따라 인류는 진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발전은커녕 제도적 인종차별은 사회 전반에 더 깊이 스며들었고 그 곪은 정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한 상황에서도 BLM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칠 수밖에 없는 지금,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남아공을 회상함으로써 희망을 불끈 쥘 수 있는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
남아공 진실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는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1995년을 기점으로 남아공에서 과거 청산을 위해 설치한 기구였다. 제도적 차별주의 아래 자행된 국가적, 제도적 범죄는 물론 인권침해 행위를 조사해 이를 종식하고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함이었다. 1996년 백인 가해자와 흑인 피해자로 양분화된 구도로 시작된 위원회 산하 공청회는 이후 마키 스코소나 같은 망자들의 죽음까지 다루며 점차 확대되어갔다. 백인만을 겨냥한 심판대가 아닌 민족 해방 세력의 극단에 치우친 행동에 대해서도 잘못을 물었던 것이다.
수 세대 동안 이어온 억압과 수모 속에서 지낸 남아공 흑인들의 분노가 극히 소수에 달하는 백인에게 난동과 폭력으로 번질 수 있었지만, 공정하게 그리고 법적인 절차에 따라 과거의 잘못을 드러냄으로써 종결지어졌다. 심지어 만델라의 전 부인 위니 만델라도 네크레이싱을 묵인한 살인 교사, 선동 혐의로 공청회에 소환되기도 했다. 1998년 10월 종결된 공청회는 7112명 가운데 5392명에게 처벌을 내리고 849명은 사면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이러한 평화적 종결은 인류 역사에서 보기 힘든 것으로, 그 이전은 물론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한편 이에 대한 상징으로 요하네스버그시 외곽 언덕에 있던 교도소 자리에는 남아공 대법원이 세워졌다. 지금은 컨스티튜셔널 힐Constitutional Hill로 알려진 이곳은 1948년 아르파트헤이트가 시작된 때부터 교도소가 문을 닫은 1983년까지 마하트마 간디, 넬슨 만델라 외에도 수많은 무저항 운동가와 민족 해방 운동가 등 정치범을 수용했으며 그 안에서 미궁 속으로 사라진 이들의 원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즉 남아공 대법원은 새로운 남아공, 평등한 남아공의 상징이자 억압과 탄압으로부터 굳건하게 맞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법원 건물의 내부 사인, 안내 표지에 사용할 서체 개발은 더반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가스 워커Garth Walker가 맡았다. 워커는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투쟁, 목소리를 서체로 대변하고자 했다. 그는 교도소 내부를 거닐면서 유치장 벽에 새겨진 글자들이 그러한 목소리를 대신할 것이라 생각하고 하나둘씩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벽에 새겨져 있던 원혼의 목소리는 오늘날 희망의 목소리가 되어 대법원 정문에 남아공의 11개 공식 언어로 새겨져 있다. 각각의 글자는 마구잡이로 쓴 것처럼 보인다. 대소문자 구분 없이 혼용되어 있으며, 벽을 긁어서 새긴 흔적의 간이화로 몇 군데에선 서로 다른 글자 간의 획이 겹쳐지기도 한다. 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이자 장님이었던 자크 야쿱Zak Yacoob 대법원장 역시 과거 이 교도소에 수용됐는데, 그가 교두보에 새긴 글자 중 B가 새로운 서체에 적용됐다. 비록 정문에 새겨진 글자의 나머지 알파벳은 누구의 필체인지 추적이 불가능하지만 이처럼 무고한 희생자들의 기억을 담은 서체임은 틀림없다.
워커는 이 서체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폰트로 제작하거나 배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서체로 보기가 어려운 만큼 이름은 더욱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자체에 생명력이나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아공의 어두운 과거와 그로부터 벗어난 인류애의 획기적인 사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무기명으로 두기로 했다. 다만 유치장 벽에 새겨진 글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 “Son of Sam, Now Son of Hope(악명 높은 살인마에서 희망으로).”** 워커는 서체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이것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 1980~1990년대에 남아공에서 이루어진 형벌. 주로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저항군에게 내려진 즉결 사형의 한 방식이었다.
** ‘Son of Sam’은 1976년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희대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다. 문맥상 차용한 이름으로 후반부의 “Now son of hope(나는 희망으로 살으리)”와 운율을 맞추기 위한 후렴구 정도로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