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는 2001년 카이스트 재학 시절 PC 원격 제어 플랫폼 에빅사를 창업했다. 이후 곰TV 해외사업개발 이사로 합류했으며 엔써즈 공동 창업자를 거쳐 2015년부터 소프트뱅크벤처스 투자 부문에 합류했다.
소프트뱅크벤처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달라.
창업자 손정의 회장이 세운 일본의 IT 기업이자 세계적인 투자회사인 소프트뱅크 그룹 내에서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이다. 한국에 거점을 두고 있지만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와 멀리 인도까지 다양한 지역을 아우르며 ICT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초기 벤처기업을 발굴, 육성한다(참고로 소프트뱅크벤처스의 영문 사명은 ‘소프트뱅크벤처스 아시아SoBank Ventures Asia’다).
초기 스타트업은 기업 가치 산정이 어려울 텐데 어떻게 판단 하는지 궁금하다.
시드 머니의 경우 그야말로 창업자와 사업 계획서만 보고 판단하지만 소프트뱅크벤처스에서는 그 이후의 초기 투자를 진행한다. 제품이 어느 정도 완성되고 난 뒤 시장 판매를 위한 자금이 필요할 때 파트너십을 맺는 것으로, 사업 지표나 시장의 크기 등 여러가지 조건을 복합적으로 고려한다. 하지만 평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역시 창업가의 자질이다. 우선 그 사람이 지나온 인생, 여러 가지 경험에 대해 듣고 어떤 생각으로 사업에 임하는지, 인고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지를 본다.
새로운 기술이나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판단하면 리스크가 크지 않나?
스타트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한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분쟁이 있을 수도, 자금이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을 견디면서 자신의 철학과 꿈을 유지하고 구성원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리더십과 실행력이 중요하다. 실제로 우리가 초기 단계에 진행한 투자 보고서를 보면 사업 계획서에 쓴 그대로 이루며 성공한 회사는 거의 없다. 잘 안되더라도 버텨서 피봇pivot을 하고 전략을 바꾸어가며 오늘의 성공을 이룬 것이다. 바로 이것이 벤처 세계의 묘미이기도 한데, 추구하는 가치는 변치 않되 시장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줄 알아야 한다.
ICT 같은 기술집약적 분야도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닌, 이 기술을 활용해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가 중요하겠다.
물론이다. 좋은 기술이라는 것은 성공을 이루기 위한 여러 조건중 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다. 예를 들어 얼굴 인식 기술을 가지고 누군가는 보안 소스 시스템을, 또 누군가는 ‘스노우’ 같은 AR 카메라를 만들 수도 있다. 우리의 파트너사인 타다는 ICT 기술로 자동차 소유의 개념을 바꾸었고, 런드리고 역시 더 이상 집에서 세탁을 하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처럼 자신이 이 사업을 통해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주겠다는 목표가 명확해야 한다. 초기 단계부터 얼마큼 진정성을 가지고 사업에 임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다. 마치 종교와 같이 자신의 꿈을 믿어야하고,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함께하는 구성원 모두가 그 꿈을 향해 집중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뛰어난 프로덕트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가치로 발전시키느냐는 창업자의 손에 달린 것이다.
이준표 대표 역시 창업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카이스트 재학 시절에는 ‘에빅사Evixar’라는 회사를 만들었다고.
당시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이 산업디자인학과에 다니던 룸메이트였다. 개인적으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어머니 덕분에 어릴 때부터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창업할 땐 늘 디자이너와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빅사는 PC 원격 제어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로 로고부터 브랜딩까지 당시에는 카이스트 대학생이 만든 회사치고 세련됐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로고 같은 브랜딩 영역은 물론 소프트웨어 버튼 하나를 디자인해도 추구하는 가치에 맞게, 일관된 느낌을 주도록 했으니까. 무엇보다 회사의 철학을 디자인으로 가시화하고 이를 제품에 녹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품 개발의 시작이 머릿속으로 원하는 것, 상상하는 것을 그려내는 디자인에서 출발한다면 마지막 역시 고객의 눈에 보이는 디자인으로 끝나기 때문에 디자인은 가치 평가에서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VC로서 파트너사를 선정하는 데에서 디자인의 가치나 디자인 싱킹이 중요한 영향을 미치나?
회사의 투자 정책에 그러한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공동 창업자 중에 디자이너가 있으면 훨씬 관심 있게 볼 것 같다. 대부분의 기업은 일단 사업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성공에 이르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야 디자인에 신경을 쓰는데, 만약 초기부터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더 빨리 성공하리라 생각한다. 고객의 눈에 보이는 부분에서 승패의 절반이 결정 나는 거다. 물론 창업자가 꼭 디자이너 출신이 아니어도 디자인 싱킹이나 역량이 돋보이는 회사에는 관심이 간다. 한 예로 인공지능으로 폐암, 유방암 등을 진단하는 회사 루닛의 경우 제품 자체의 UI/UX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디자이너의 관점이 제품에 녹아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의 파트너사이기도 한데, 로고 디자인 같은 브랜딩 영역은 물론 사용자인 의사들의 생활 패턴, 라이프스타일까지 감안해 잘 패키징한 디자인 싱킹이 눈에 띄었다. 이 외에도 다국적 방송 네트워크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 번역, 자막, 더빙 등을 제공하는 ‘아이유노’, 오디오 방송 플랫폼 ‘스푼라디오’ 역시 디자인 싱킹이 돋보이는 사례다.
창업자가 디자이너 출신이고 디자인이 뛰어나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맞다. 제품의 상품성을 높이려면 자신의 디자인 관점을 융통성있게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창업자가 엔지니어인 경우에도 최고의 기술을 보여주기보다는 적정 수준으로 상품의 가치를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은 파트너, 팀이 있어야 하고,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즈니스 모델을 유연성 있게 잘 진화시켜야 한다. 일례로 우아한형제들의 김봉진 의장 역시 처음에는 사용자 위치를 기반으로 일정 거리 내 배달 음식점의 정보를 제공하다가 오늘날 로봇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기업으로 확장, 진화하지 않았나. 한마디로 스타트업은 아트의 영역, 종합 예술에 가깝다.
요즘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스타트업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꿈꾸는 사람도 많아졌다. 이와 관련하여 관심 있게 보는 분야가 있나?
코로나19 발생 이후 사람들이 집에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 시간의 대부분을 콘텐츠를 보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콘텐츠 큐레이터들에겐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고 본다. 예전에는 자신의 창작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선 방송국 같은 중간 미디어가 필요했지만 요즘엔 OTT와 같이 독자와 직접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이 많아졌다. 또 드라마나 영화 역시 제작자에서 작가 중심으로 권력이 이동하면서 스토리, 지식재산권(IP)의 가치가 높아지는 추세다. 여기에 실시간으로 번역, 자막 서비스를 해주는 아이유노 같은 서비스가 있기 때문에 한국 크리에이터들의 해외 진출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재택근무와 관련해, 새로운 근무 환경에서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는 여러 가지 서비스가 비즈니스 모델로 유효할 거라 생각한다. 이 외에도 헬스 케어 분야, 미·중 무역전쟁 이슈와 관련한 반도체 분야를 빼놓을 수 없다.
원론적인 질문이지만, 스타트업은 꼭 VC 투자를 받아야 할까?
물론 투자를 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회사의 규모는 꿈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들고 싶은 회사의 자산 가치가 크고 엄청난 성장을 추구하는 창업가라면 VC 투자를 받는 게 맞다. 10억 원 규모의 회사를 만드는 것과 1000조 원 규모의 회사를 만드는 것은 프로세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VC가 하는 일이 단순히 돈을 투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프트뱅크벤처스에서는 파트너십을 맺은 회사에 CTO, CFO 같은 주요 인사를 추천하고 소개하거나 정기적으로 마케팅, 재무 등과 관련한 교육을 진행하기도 한다. 다음 단계의 투자를 위한 전략을 짜거나 언론 홍보 등 전반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한 활동을 할 때 역시 적극적으로 돕는다. 단순히 투자를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함께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역량을 더 키울 수 있을지 전략을 짜는 것이 바로 우리 파트너가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