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종종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정해진 방향 없이도 이어지고, 때로는 돌아가고, 예상치 못한 풍경을 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기업 임원으로 일하고 정년 퇴임을 맞이한 신유호. 늦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은 결심이 됐고, 그는 반평생을 함께해온 동반자 아내 박은영 씨와 함께 버킷 리스트이던 로드 트립을 실행에 옮겼다. 러시아와 조지아를 비롯한 38개국을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캠핑카 ‘봉봉이’와 함께 떠난 길 위의 삶을 기록했다.

루마니아 트란스파가라산Transfagarasan의 급경사.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과 스릴을 즐길 수 있다.
시동을 걸다
본래 해외를 오가는 일이 잦았다. 흔히 말하는 랜드마크부터 각지의 대표적 관광지까지 무수히 많이 다녔다. 그때마다 어딘지 수동적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이라는 게 정해진 동선을 따라가고, 정해진 풍경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히 발길 닿는 대로, 보다 능동적으로 세상을 볼 수는 없을까. 다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 돌리는 삶에서, 온전히 나만의 길을 그려보면 어떨까. 고민 끝에 선택한 게 캠핑카였다. 정해진 루트 대신 우리만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운전대 위에 삶을 올렸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냐”는 말에 아내도 흔쾌히 동행을 결정해주었다. 장고 끝에 구매한 캠핑카 ‘봉봉이’를 타고 출국 전 6개월간 국내를 돌며 테스트 주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출국 당일. 페리에 짐과 몸과 차를 실었다. 어언 25시간의 장정 끝에 도착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항. 2024년 5월 29일.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됐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마주한 곳 중 가장 큰 호수, 바이칼. 마음속에 그려오던 장소에서의 하룻밤은 너무나 짧았다.
길 위에서 만난 따뜻한 손길
전쟁 중인 러시아는 어딘가 차갑고 경직된 곳처럼 느껴졌다. 주변에서도 걱정이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작으로 하바롭스크Khabarovsk를 지나 치타로 향했다. 러시아 국경은 가급적 도로 위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치타Chita에 도착했을 때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다. 4채널 블랙박스가 녹화되지 않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규모가 큰 캠핑카 특성상 전후방 및 좌우 측방을 확인하고 녹화하는 장치는 필수인데, 여행 초반부터 녹록지 않은 상황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아내와 함께 자료를 검색해 근처 내비게이션 수리 센터를 찾아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미샤. 꽤 차가운 인상에 내심 겁이 났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계를 뜯고는 무려 다섯 시간 동안 한자리에 앉아 수리를 해주었다.

모스크바 즈나멘스키 수도원 성당. 17세기에 지은 곳으로 붉은 벽돌 벽과 다섯 개의 황금빛 돔이 특징이다.

러시아 발다이 호수 위 이베르스키 수도원. 1653년 건립한 이후 러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문화적·영적 중심지 중 하나다.
모스크바에서 발다이Valdai로 넘어가던 날,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이번엔 캠핑카 문손잡이가 고장나버린 것.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식탁 겸 작업 테이블의 철제 다리 용접도 떨어졌다.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이번에도 사람이 있었다. 근처 카센터에서 만난 이고르는 부러진 금속 다리부터 능숙하게 수리하고, 고장 난 외부 문손잡이까지 개조해 우리 부부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이것도 모자라 그는 우리 부부를 근사한 클래식 자동차 뮤지엄이 있는 근처 숲속 음식점으로 안내해 점심 식사까지 대접했다. 이 외에도 주유소에서 윈도 스프레이를 건네주던 이름 모를 부부, 마트에서 자신의 회원 카드를 내밀던 아주머니, 주차장에서 요금 결제에 난감해하던 우리에게 손길을 내밀어준 친절한 청년까지.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수집하는 게 아닌, 오래된 선입견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해를 쌓아가는 일이었다.
자연이 열어준 또 하나의 세계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어딘지 점점 더 단순해졌다. 도시의 밀도는 옅어지고, 풍경은 비워지듯 펼쳐졌다. 러시아에서 핀란드로, 핀란드에서 1만 4000km를 달리고 6.8km의 해저 터널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세상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르웨이의 최북단, 노르카프Nordkapp에 다다랐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묘하게도 끝이 아니라 시작처럼 느껴졌다. 절벽 끝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압도적 고요였다. 백야를 보기 위해 이곳 주차장에서 하루 묵기로 결정했다. 발아래로 펼쳐진 북극해는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넓었고, 물과 하늘의 경계는 거의 지워져 있었다. 구름은 느리게 흘러가며 또 하나의 대륙처럼 바다 위를 떠다니고, 그 위에 걸린 빛은 낮도 밤도 아닌 어딘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색을 띠고 있었다.

노르웨이 로포텐 국립공원에서 하이킹 코스로 인기 있는 장소 뤼텐Ryten.

노르웨이 3대 절경 중 하나로 꼽히는 프레이케스톨렌Preikestolen. 웅장한 수직 절벽 모습에 ‘제단바위’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유라시아 대륙 최북단에 있는 노르카프. 새벽 3시, 307m 절벽 아래 구름으로 덮인 북극해가 장관을 연출했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해는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머물다가, 이내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일몰과 일출을 연이어 보게 되는 것이 현실감을 떨어뜨렸다. 이곳에서 ‘하루’라는 감각은 흐르기보다 정지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에는 오랜 시간을 달려온 여행자, 자전거로 대륙을 건너온 사람, 침낭 하나로 밤을 견디는 젊은이 등 각자의 방식으로 도착한 여행자로 가득했다. 누구 하나 말을 걸지 않아도 우리는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끝과 시작의 경계가 흐려지는 자리에서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델바Nidelva 강변을 따라 지은 전통 노르웨이 목조 건축물. 다채로운 색상의 외벽이 강물에 반사된 모습에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의 정의를 다시 쓰다
캠핑카 ‘봉봉이’에 몸을 싣고 길을 나선 지 1백90일을 조금 넘긴 무렵, 우리는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세우타를 거쳐 모로코에 들어섰다. 처음 머문 곳은 테투안. 이곳에 도착해 가장 먼저 다가온 감각은 다름 아닌 여유였다. 유럽에서는 솅겐 체류 기간에 쫓기듯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리며 여행해온 시간이었다면,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하루를 온전히 멈출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캠핑카에 머무는 하루. 그 낯선 정지는 오히려 여행의 리듬을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중간중간 멈춘 적은 있지만, 그 정적은 언제나 미세한 긴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모로코는 달랐다. 이곳의 고요는 불안이 아닌 안정으로 다가왔다. 멈추자 비로소 주변이 또렷해졌다. 셰프샤우엔Chefchaouen으로 향하던 길, 악슈르 계곡 입구에서 만난 소녀가 건넨 따뜻한 빵과 비스킷의 온기, 계곡 아래에서 먹은 모로코 전통 스튜 타진 한 그릇. 푸른 골목의 도시에서는 나귀가 오르내리는 언덕길과 거리에서 달팽이를 삶아 먹는 사람들의 모습, 메디나의 시장과 오래된 골목, 상인들의 분주한 하루가 고국의 가족과 친구들을 떠올리게 했다.

수백만 년 동안 모로코 다데스강이 붉은 사암을 깎아 만든 아틀라스산맥의 다데스 협곡을 보며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사하라 사막 풍경은 바람이 썼다 지우는 곡선으로 가득했다.
겨울이지만 따뜻한 모로코의 사막.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길과 풀 한 포기 없는 풍경도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깊은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타만나르트 협곡을 지나 황톳빛 계곡과 낭떠러지 절벽을 마주했을 때는 과거에 보았던 그랜드캐니언과 호스슈 벤드보다
더 강렬하고 장엄하게 느껴졌다. 노르웨이를 제외하고 아내가 가장 많이 감탄사를 쏟아낸 곳도 모로코였다. “창조주의 위대함을 구현해놓은 아름답고 조용한 곳, 눈을 즐겁게 하고 영혼을 여행하게 하는 풍경”이라는 누군가의 표현이 그제야 실감 났다. 황량한 풍경 속에서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마음, 그리고 낯선 땅에서 반복해서 마주하게 되는 따뜻한 손길. 여행은 다른 장소로 이동해 풍경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에 가까웠다.

모로코 남서부에 위치한 타루단트Taroudant. 둘레 6km 성벽과 그 안에 빼곡히 들어찬 점토빛 건물은 고대 도시가 지닌 역사와 생명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흔히 길을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 나만의 길을 만든다고 말할 때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한다고 말할 때도 우리는 자연스레 길의 형상을 겹쳐 말한다. 한데 우리는 길 위에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걷고 있을까? 눈앞의 도시를 바라보기보다 목적지를 설정한 채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좌표를 따라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일은 과연 길을 걷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그어진 궤적을 되짚는 것에 불과할까? 신유호·박은영 부부의 캠핑카 여행기는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예상치 못한 사건, 그리고 그 순간마다 다가와 손을 내미는 이름 모를 인연, 길 위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삶의 감각을 다시 배우는 과정, 여행은 분명 떠나는 행위로 시작하지만 끝내는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여정에 가깝다. 세계를 한 바퀴 돌아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그들은 더 많이 본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캠핑카 여행에 도전하려면 알아야 할 필수 정보
여행 전 준비해야 할 것
캠핑카 세계 일주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차량 정비 지식은 필수이며, 엔진오일 교체나 소모품 관리까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출발 전 최소 6개월간 국내에서 실전 연습을 거치는 것이 좋다. 또한 상비약과 비상 연락망, 캠핑카 동호회 네트워크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는 통신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오프라인 자료를 내려받고 지도 보는 방법도 훈련해두면 좋다.
동선 짤 때 고려해야 할 요소
솅겐 조약 가입국과 미가입 국가에서의 체류 기간, 그리고 계절을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베리아의 경우 겨울에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일정을 짤 때 고려한다.
숙박 위치 정하기
‘파크포나이트park4night’라는 앱을 활용하면 각국의 주차 및 캠핑장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과 전기, 세탁, 폐수 처리 시설이 있는 장소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좋다. 더불어 시설 이용료를 할인받을 수 있는 카드 등을 활용하면 장기 여행 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신유호는 삼성전자에서 삼성디자인연구소(SADI)를 설립했다. 이후 배상면주가에서 ‘산사춘’을 론칭하며 마케팅을 총괄하며 본격적인 F&B 시장에 발을 들였고, SPC 파리크라상 사업본부장(전무), 이디야 총괄 부사장을 거치며 브랜드의 방향을 다지는 데 세월의 절반을 할애했다. 동시에 캠핑 1세대로 활동한 그는 30~40년 전부터 가족과 함께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낸 ‘길 위의 사람’이기도 하다. 현재는 섬유 디자인을 전공한 아내 박은영 씨와 함께 캠핑카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두 눈과 발이 버티는 한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남은 생을 보내는 게 꿈이다. @yooho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