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 흩어진 가족에게 대구의 한 땅은 오랫동안 쓰임을 찾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건축가 박도현은 그곳에 마당 있는 집을 짓고, 흩어진 가족이 다시 모일 수 있는 베이스캠프를 만들었다. 머무르기 위한 집이 아니라, 다시 돌아와 새로운 길을 떠나는 출발점. 그렇게 고향에 지은 집은 이제 가족에게 또 하나의 여행지가 되었다.

박도현 건축가가 가족들을 위해 지은 대구 읍내동 주택. 그의 부모님 박완석, 박현수 씨와 아내 김유미, 그리고 아들 박시환 군은 날 잡아 함께 모여 바비큐 파티를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각자 찾아와 온전한 휴식을 취한다. 이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대구 인근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우리 가족에게 숨은 땅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드라마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대학을 막 졸업할 무렵, 박도현 건축가가 어머니 박현수 씨에게 들은 말도 그런 내용이었다. 약사인 어머니는 오래전 대구 북구의 한 땅을 매입했다. 그 맞은편으로 아파트가 들어설지 모른다는 소문에 상가를 짓고 약국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진 것. 하지만 소문은 소문으로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녹지가 들어서 땅은 맹지나 다름 없이 돼버렸어요.” 어머니는 땅을 다시 팔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활용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애물단지로 전락할지 모르는 땅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레 건축사인 아들에게 전해졌다. 건축을 공부한 아들이라면 언젠가 그 땅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 하지만 이제 갓 학부를 졸업한 박도현 건축가에게 당장의 복안은 없었다. 그 땅을 고이고이 접어둔 채 9년의 시간 동안 실무 경험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자신의 건축사무소를 열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기억 속 땅을 다시금 펼치기로 했다.

지붕 사이에는 빛이 스며들도록 입체적 창을 내고, 그 아래에 침실을 배치했다. 안으로 스며드는 햇빛이 실내를 부드럽게 밝히며 시간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창밖 담장 사이에는 대나무 정원을 조성했다.
집 짓기 전 그의 고민은 ‘이 땅을 어떻게 다시 의미 있게 사용할 것인가’였다. 생각의 가지는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갔으니 이는 하나의 문장에 다다랐다. ‘우리 가족은 한 번도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아파트 중심의 삶 속에 자란 박도현 건축가의 가족에게 ‘마당’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주거 양식이었다. 그는 도래할 미래보다 지금 이 집을 통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가족에게 제안하고 싶었다. “지금은 각자 사정으로 흩어져 살지만, 주기적으로 대구에 올 일이 있었어요. 부모님의 오랜 지인이 계셨고, 누나의 시댁 또한 대구에 자리하고 있었거든요.” 하여 대구에 올 가족이 잠시 머물 수 있는 베이스캠프, 구심점으로 집을 설계했다. 익숙한 도시 대구를 새롭게 다시 만나는 경험이 되길 바랐다.
닫힌 땅에서 열린 풍경으로
20년 넘게 방치되어온 기존 건물이 허물어진 자리. 박도현 씨는 머릿속에 그려둔 삶의 양식을 렌즈 삼아 땅의 면면을 살폈다. 폐가를 걷어내자 목적이 달라졌고, 이에 따라 땅도 전혀 다른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마치 무엇이든 써 내려갈 수 있는 새하얀 노트를 손에 쥔 것처럼 말이다.

집의 전면뿐 아니라 곳곳에 목재를 사용해 자연광과 어우러진 포근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한때 집 앞 공원은 어떤 의미에서 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요소였죠. 그런데 이 대지를 활용하는 방식을 달리 생각해보니, 오히려 하나의 매력적인 장치로 보이더라고요.” 인식의 전환 속에서 그는 건물과 공원 사이에 마당을 두고, 담장 너머 환경을 안으로 끌어오는 ‘포켓 공원’ 구조를 떠올렸다.
입면은 기존 건물이 그러했듯 남쪽 담장을 향하도록 설계할 예정이었으나 집 안에서 공원이 보이지 않고, 공원 밖에서도 집의 측면이 보이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이에 그는 집을 하나의 얼굴로 보고, 옆을 보던 집을 공원과 눈을 마주치게끔 고개를 돌리기로 했다. 지반이 높은 쪽에는 건물을 집약적으로 배치하고, 마당이 자리할 서쪽 방향에 최대한의 여백을 확보했다.

거실과 주방, 식당, 다락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경사진 지붕이 만들어낸 높은 층고를 적극 활용한 다락은 아들 시환 군이 놀이터처럼 오르내리는 공간이 되었다.
마당을 넉넉히 확보하기 위해 건물은 비교적 작게 계획하되, 내부에서는 충분한 개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거실과 주방, 식당, 다락을 하나로 엮었다. 지붕은 누수 문제를 예방하고자 경사지게 설계하되, 사이사이를 가위질하듯 오려낸 다음 그 틈으로 빛이 스며들도록 입체적 창을 만들었다. 그 아래에는 침실과 욕실을 배치해 남향의 자연광이 깊숙이 들어오도록 유도했다. 경사진 천장을 따라 들어오는 자연광은 실내를 부드럽게 밝히며,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거실 창을 크게 내어 마당의 잔디와 조경수, 담장 너머 공원의 수목과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반듯한 잔디를 중심으로 나머지 공간에는 식재를 더했다. 남측에 맞닿은 담장의 경우, 건물 사이에 약 1m 정도의 자투리 공간을 내고 대나무 정원을 만들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맞닿는 경계를 이 집만의 산책로로 섬세하게 다듬었다.

거실과 마당 사이에는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실내외 공간이 자연스럽게 확장되도록 했다. 덕분에 마당에서 식사 할 때도 실내를 편리하게 오갈 수 있다.
고향에 지은 베이스캠프, 다시 떠나는 여행
독특한 개성과 새로운 가능성으로 축조한 집은 이제 가족에게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오랜 세월 대구에서 살아온 박도현 씨의 부모님은 이곳을 일종의 베이스캠프 삼아 젊은 시절 함께 다니던 김천, 군위, 구미, 성주 등으로 추억 여행을 떠난다. “최근 남편과 함께 제 어릴 적 고향 의성에 다녀왔어요. 외할머니가 살던 동네에 갔는데,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돌다리도 없어지고요. 대신 예전부터 있던 둑 위에서 산수유나무가 가득 피어 있는 풍경을 보고 왔어요. 그 시절을 추억하며 남편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어요.” 2주에 한 번꼴로 대구 집에 오는 두 사람은 대구에 살 때도 가지 못한 사유원도 방문하고, 대전에서 대구로 오는 길 위에서 맛집이나 지역 휴게소를 탐방하기도 한다. 대구 집을 오가는 여정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 된 셈이다.
박도현 씨 가족 역시 이 집을 거점 삼아 아이와 함께 대구 곳곳을 탐험한다. “남편과 저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사실 대구에 대한 기억은 달서구에 한정돼 있었어요. 그런데 이 집을 계기로 북구 일대를 돌아보게 됐고, 자연스럽게 다른 지역으로도 여행을 다니게 됐죠.” 아내 김유미 씨도 대구를 새롭게 알아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아들 때문에 고성공룡박물관에도 다녀왔어요. 아이가 생긴 후 한동안 여행하기 어려웠는데, 이 집을 지은 후로는 이곳을 여행지 삼아 방문하곤 해요. 집을 거점 삼아 통영, 안동으로 가족만의 탐험을 떠나기도 하죠.”

마당 없는 삶에서 마당 있는 삶으로의 변화는 일상의 풍경도 바꾸어놓았다. 캠핑 장비를 갖추게 되었고, 어느새 바비큐를 능숙하게 하는 가족이 되었다.
집이자 마당이 된 대구 집. 가족들은 이곳에 오며 시간의 층위를 넘나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과거 연애사부터 어릴 적에는 몰랐던 지역의 풍경을 새로이 발견하고, 오가며 마주한 풍경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는 늘어나고 그 기억은 아들 시환 군에게도 전해진다. 마당의 식재는 안부 연락을 묻는 또 하나의 소재다. ‘요즘은 뭐가 잘 자라는지, 물은 잘 주고 있는지’를 묻는 과정은 뿔뿔이 흩어져 사는 세가족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을 부여한다.
“이곳은 머무르기 위한 집이 아닌, 다시 찾아오기 위한 집인 것 같아요. 각자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시간의 흐름을 경험하는 장소.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여행지라기보다 여행이 시작되는 방식 자체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죠.” 남겨진 땅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집은 이제 가족에게 새로운 경험의 길을 내주는 나침반이 되었다. 명절이나 연휴는 물론,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대구 집을 찾는다. 그리고 이곳을 거점 삼아 또 다른 장소로 여행을 나선다.
박도현 건축가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다양한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며 프로젝트의 설계부터 감리까지 경험한 이력을 토대로 2020년 박도현건축사사무소를 개소했다. 배재대학교·서울시립대학교·아주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했고, 서울대학교 기획 설계 건축가, 안산시 경관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증축 사업, 향남제약일반산업단지 복합 문화 센터 등의 현상설계에 당선돼 작업 중에 있다. 지구의 한 부분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든다는 믿음으로 작업에 임한다. dhp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