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T 플랫폼 서비스 회사를 운영하는 전원근 대표와 럭셔리 브랜드 이벤트 기획 회사를 경영 중인 이윤경 대표. 둘만의 안식처를 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소셜라이징 공간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함께 꿈꾸는 공동의 목표다.
어쩌다 보니 취재일이 1월 1일. 새해 첫 인터뷰를 위해 제주도로 날아가며 올해도 일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하. 공항에 도착해 “출발합니다” 하고 문자를 보내니 곧 이윤경 대표에게서 회신이 왔다. “지난밤 모임의 흔적을 열심히 치우고 있겠습니다. ㅎㅎ” 서울은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날이었는데, 제주는 그저 봄날 같았다. 겨울에도 봄 같은 땅.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고 출발! 오후에는 눈이 예보돼 있어 가급적 일찍 촬영을 마치고 돌아올 심산이었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집의 입지는 조금 과장해 말하면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 온 듯한 분위기였다. 김창열미술관을 지나 잘 지은 단독주택에 들어선 몇몇 갤러리를 거쳐 저 안쪽에 부부의 집이 보였다. 양쪽으로는 드넓은 초지뿐. 택시에서 내리면 100m가량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동선이었다. 검은색 벽돌로 쌓아 올린 견고한 사각 박스 형태의 집은 단정한 박력으로 아름다웠는데, 파사드에 창을 하나도 내지 않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마디로 위풍당당한 집이었다.

그야말로 전망 좋은 방이라 할 수 있는 부부의 침실. 창밖으로 저지예술인마을의 원림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날 부부가 각자, 또 따로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어서 계속 생각날 정도였다. 아내 이윤경 대표의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둘 다 40세 때 결혼을 했어요. 나이가 있다 보니 결혼을 안 하면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아이는 안 갖기로 하고 양가 어른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왜 제주도였느냐? 궁금하실 텐데, 남편의 역할이 컸어요.
이 사람이 캠핑광이에요. 저는 캠핑 같은 건 평생 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함께 모험을 하게 됐지요. 백패킹으로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까지 갔다 왔으니까요. ‘제주도 일주도 하자’ 하고 의기투합했고, 노지 캠핑 2박을 하고 1박은 펜션에서 자는 일정으로 길게 여행을 했어요. 하루는 제대로 씻어야 하니까요.(웃음) 그렇게 제주를 여행하는데 이곳 풍광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바다와 오름도 매력적이고요. ‘안 되겠다, 이곳에 집을 마련하자’ 하고 타운하우스 한 채를 계약했고, 그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2년간 제주를 여행하다 ‘아예 집을 짓자’ 하고 결론이 난 거예요. 이곳은 지인 소개로 와봤는데, 아티스트들이 모여 사는 별장촌 같았어요. 마음도 편하고요. 그렇게 집 짓기의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2층에서 내려다본 거실과 주방. 낚싯대처럼 쭉 뻗은 다비데 그로피 조명이 이곳의 아이콘 중 하나다.
취재진을 맞으며 산미가 있는 커피 혹은 구수한 커피로 옵션을 제안할 만큼 세심한 멋쟁이 전원근 대표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저희 아버지가 은퇴하시고 환갑 때 양평에 집을 지으셨어요. 제법 큰 집을 짓고 전원 생활을 하셨는데, 그곳에서 누린 시간이 얼마 안 돼요. ‘60에 집을 지으면 안 되겠다, 그건 너무 늦다’ 생각했죠. 아버지보다 딱 10년 정도 일찍 집을 지은 셈인데, 이곳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다 보니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이 시간을 누리고 싶어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합니다. 나이가 들어 종국에는 실버타운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우리의 행복을 찾자’ 하는 마음이 큽니다.”

전원근 대표는 낚시와 마라톤, 캠핑과 스쿠버다이빙을 즐기는 취미 부자. 관련 도구를 모아 놓은 ‘취미방’이 따로 있다.
이윤경 대표가 다시 이야기의 바통을 받았다. “이곳에서 남편은 수렵을 담당하고, 저는 채취를 담당해요.(웃음)

바깥으로 벽을 한 번 더 둘러 프라이버시를 강화한 디자인.
이 사람은 취미광이에요. 철인 3종 경기도 뛰고 전자 기타도 쳐요. 스쿠버다이빙도 좋아해서 함께 자격증도 땄어요. 필리핀 팔라우섬에서 눈물을 흘리면서요.(웃음) 수렵 이야기가 뭐냐면, 남편이 바다낚시도 좋아해서 물고기를 잡으러 자주 나가거든요. 그렇게 잡은 많은 생선을 서울과 제주도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나눠주고요. 바다를 워낙 좋아해서 연애할 때도 섬으로만 돌아다녔는데, 제주도에 집을 짓고 나니 다른 나라 섬을 다닐 필요가 없어요. 반면 저는 자연 생활을 너무 좋아해요. 제주도는 나물의 천국이잖아요. 3월에는 달래를 캐고 4월에는 고사리가 나지요. 고사리 산지를 알려고 ‘당근’에 물어본 적도 있는데, 잘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다행히 한 곳을 알게 됐고, 4월이면 신나게 따서 말리고 엄마한테도 갖다 드려요. 가드닝은 이 집을 지은 강력한 이유 중 하나예요.

중정으로 나가 앉으면 승호 소장이 설계한 이 집의 매력을 십분 체감할 수 있다. 한옥의 보처럼 뜬 벽이 허공을 가로질러 안전하면서도 아늑한 공간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설계 단계부터 서울가드닝클럽 이가영 대표와 함께 나무를 골랐지요. 은목서, 유칼립투스, 배롱나무가 그렇게 들어온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은 금릉이나 협재 바닷가를 뛰고, 마음만 러너인 저는 스트레칭을 하고 정원으로 나가요. 요새 그림 그리기에 취미를 붙였는데, 제 정원에 있는 아이들을 주인공 삼아 정원 도감을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옛날엔 집 마당에 작은 꽃밭이 있었잖아요. 저희 집도 그랬어요. 큰 라일락나무가 있었는데, 봄날에 낮잠을 자다 일어나면 창가 가까이 있는 가지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오는 거예요. 그 향기를 잊을 수 없어요. 탐스러운 장미 넝쿨도요. 정원에서 수확한 걸로 뭘 만드는 것도 좋아해서 딜 버터도 만들고, 무화과 잼도 만들고 그래요. 정원에 나와 꽃을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터집니다.” 두 사람의 제주 생활 이야기를 들으면서 든 생각은 역시 삶의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는 것. 생업과 분리된 취미 생활이 한쪽에 딱 버티고 있을 때 삶은 비로소 견딜 만한 것을 넘어 즐길 만한 것으로 바뀐다.

돌가루를 이용해 유럽식 미장으로 마감한 벽면. 에이치디 서페이스와 함께 했다.
“그래서 이분들은 제주도에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집 짓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취재를 하다 보면 집 짓기는 왜 이렇게 죄다 고난의 연속인지. “주체적이고 풍성한 삶을 위해 내게 꼭 맞는 집을 짓고 사세요” 하고 자주 말하는데, 집이 완공되기까지의 과정과 에피소드를 듣다 보면 어느새 ‘집 짓지 마세요’ 하는 결론으로 기우는 것 같아 찜찜할 때가 많다. 이 부부의 집 짓기도 웃음보다 눈물, 희망보다 좌절의 연속이었다. 골조를 올리고 1차 목공을 마쳤는데 비가 새서 공사 기간이 길어지고, 현장에 가보니 약속한 타일이 아닌 타일이 깔려 있고, 햇빛 쨍쨍인데 눈이 올 것 같다며 현장에 나타나지 않고…. 하지만 이런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며 겁을 주고 싶지는 않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굳은 마음가짐. 어떻게든 이 어둡고 축축한 터널을 통과하고 말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어떤 일이든 그 안에 고난은 있게 마련이잖아요. 좌절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을 달래가면서 어떻게든 목표를 달성하는 거지요. 모든 업자가 약속을 안 지키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지만, 또 돌아보면 내 편에 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구세주 같은 분이 꼭 있어요.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많았지만 남편하고 그랬어요. ‘됐다. 사람 안 죽었으니까 됐다.’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시간과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된 거예요. 돌아보면 좋은 날도 많았어요. 남편과 함께 현장을 챙기다 오후 5시쯤 일하는 분들이 퇴근하면 둘이 자동차에 캠핑 의자와 맥주를 챙겨서 월령 포구로 나갔어요. 이곳이 서쪽으로 일몰이 또 기가 막히거든요. 남편은 맥주, 저는 새우깡을 먹으며 일몰을 보는데, 또 달콤하더라고요. 집 짓기가 이래요. 눈물과 당근이 함께 있지요.(웃음)”

이것만은 어떻게든 가지리! 이윤경 대표의 ‘욕망’이 고스란히 들어간 사각 노천탕. 2층 한쪽에 단정하게 자리 잡았다.
이윤경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녀의 내공을 바로 감지할 수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고, 말과 질문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곧장 파악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리드하면서도 꼭 들어가야 하는 어젠다를 놓치지 않는다. “2000년대 초에 럭셔리 브랜드에 입사해 이벤트 디렉터로 8년간 일했어요. 쇼부터 전시까지 안 해본 이벤트가 없어요. 몇 년 동안 그 일을 하다 보니 이제 그만해도 되겠더라고요. 제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퇴사하자마자 이 브랜드 저 브랜드에서 연락이 막 오기 시작했죠. 저는 하우스 경험이 있잖아요. 브랜드에서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커뮤니케이션이 수월한 거예요. ‘그대가 힘든 거 내가 대신 다해주겠다’ 하는 마음으로 일했어요. 본사를 설득할 땐 대신 힘을 실어주고 풀어줄 때는 또 앞장서 풀어주고. 그때 한국은 럭셔리 격전지였어요. 글로벌 스케일의 전시와 행사가 봇물 터지듯 많았지요. 그들과 일을 하다 보면 현실적으로 무리한 요구도 많아요. 그럴 때 저는 대등한 파트너 입장에서 정확하게 이야기해요. 그래야 파트너십이 생기고 결과도 더 좋게 나와요. 그렇게 오랫동안 치열하게 일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 싶은 거예요.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저는 제주에서의 시간을 좀 더 늘려가고 싶은 거지요. 신기한 게요, 제주공항에 내리면 (전투) 스위치가 딱 꺼지고 모드가 전환돼요. 제주에서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할 필요도 없고, 정장을 챙길 필요도 없지요. 이렇게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을 더 오래, 더 자주 즐기고 싶어요.”

이윤경 대표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 중 하나. 정원에 있는 꽃과 나무를 주인공으로 직접 ‘우리집 정원 도감’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그 힘든 고난을 넘길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STUDIO 승호를 이끄는 건축가 이승호 소장을 향한 믿음 덕분이었다. 가마에서 구운 검은색 전돌로 마감한 외관부터 두 겹으로 견고하게 세운 벽체까지 ‘안전한 개방감’을 구현해준 건축가에게 온전한 신뢰심을 지니게 되었다. 서두에 창 없는 파사드를 언급했는데, 실내로 들어가면 그런 폐쇄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거실에 있거나 중정으로 나와 앉으면 ‘뜬 벽’ 아래로 정원이 펼쳐지고, 그 너머에 있는 또 한 단의 외벽 위로는 저지리의 야생 숲과 제주의 하늘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한마디로 바깥에서는 닫혀 있고, 안에서는 활짝 열려 있는 집! 천고를 최대한 높여 안전한 동굴에 있는 듯한 느낌을 부각하고, 이윤경 대표의 로망이던 노천탕을 큰 설계와 미감에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단정하게 마련해 넣고, 남편의 아지트를 2층 모서리에 별도의 공간처럼 배치하는 등 집주인을 위한 배려도 곳곳에 담겨 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맑던 제주의 하늘은 금세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제주에는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1년이라도 빨리 우리의 행복을 찾자”던 부부의 말은 올해의 다짐으로 머릿속에 저장해놓고 틈날 때마다 되새겨도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