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호텔 브랜드 노스텔지어가 네 번째 공간 슬로재를 오픈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집’이라는 뜻을 담은 당호처럼, 모든 게 빠르고 복잡하게 흘러가는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이곳에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진정한 쉼을 누리게 해줄 콘텐츠와 디테일이 숨어 있다.
슬로재 마스터룸의 벽면 한쪽은 유리로 마감해 자연을 안으로 들여왔다. 중앙에 현판처럼 걸린 숙박객의 목소리와 움직임의 파동을 감지해 그림을 그리는 키네틱 드로잉 아트 작품은 추후 선물로 제공한다. 오른쪽 벽의 패브릭 아트 작품과 스툴 및 방석의 패브릭은 모두 제이든 초가 만들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순간’의 밀도는 저마다 다르다. 가벼이 스친 찰나는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흩어지지만,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 감지한 일순은 사금처럼 깊숙이 가라앉는다. 그렇기에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말은 관용적 표현만은 아니리라. 밀도 높은 순간들이 촘촘하게 엮인 시간은 분명 다른 속도로 흐른다. 적어도 경험자의 감각 체계 속에서만큼은 말이다. 밤낮으로 수많은 관광객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북촌, 그 중에서도 메인 로드라 할 수 있는 북촌로11길 중심에 지난 4월 ‘슬로재’가 오픈했다. 대문을 지나는 순간 감도는 고요함, 그 틈을 비집고 흐르는 음악과 향기가 소란 속 무뎌진 감각을 슬며시 깨우는 이곳은 하이엔드 독채 한옥 호텔 브랜드 노스텔지어가 블루재, 히든재, 힐로재에 이어 네 번째로 선보인 공간이다.
왼쪽 구조목 사이에 딱 맞게 침대를 들이고 헤드 대신 제이든 초의 비즈 패브릭 작품으로 벽을 장식한 침실.
오른쪽 싱크대 너머로 보이는 제이든 초의 패브릭 아트 작품. 실크를 감물로 염색하고 소금으로 무늬를 내는 작업 방식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슬로재의 당호와 어울려 설치했다.
“인테리어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처음 노스텔지어를 기획하며 가장 중시한 것은 어떤 콘텐츠와 서비스를 공간에 채워 넣을 것인가였어요.” 박현구 대표의 말처럼 노스텔지어의 한옥 호텔은 기와, 서까래, 대들보, 창살, 정원 등 한옥의 본질적 요소는 지키되 기존 건물의 특성과 상태에 따라 각자만의 개성이 살아 있는 이야기와 미감으로 완성한다. 그 때문에 노스텔지어라는 한 브랜드일지라도 공간마다 각각 다른 건축사 사무소 혹은 디자인 스튜디오가 레노베이션을 맡는데, 슬로재의 새 단장은 이혜인 디자인 스튜디오와 함께했다. “대부분 한옥이란 단어를 들으면 거주 공간을 떠올리지만 한옥 호텔은 철저히 상업 공간이에요. 커머셜한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해본 디자이너와 함께하고 싶었죠. 동시에 ‘힐링 큐레이션’이란 콘텐츠를 뻔하지 않게 풀어내는 것이 중요했는데, 때마침 과감하고 혁신적인 공간을 선보이는 브랜드 젠틀몬스터에서 경력을 쌓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스튜디오를 오픈한 이혜인 대표을 알게 되었어요.” 인스타그램을 통해 독창적 감각이 돋보이는 포트폴리오까지 확인하고 나니 적임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이혜인 디자이너에게도 슬로재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개인적으로 호텔은 공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걸 함축한 장소라 여겨요. 먼 훗날 나의 것을 단 하나만 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 호텔이지 않을까란 막연한 생각도 했을 만큼 항상 관심을 둔 공간 유형이기에 반가운 제안이었죠. 더불어 첫 한옥 프로젝트인터라 더욱 도전 정신이 불타기도 했고요.”
툇마루에 앉아 있는 노스텔지어 박현구 대표. 마모륨으로 마감한 툇마루가 모던한 느낌을 자아낸다.
뜻이 맞은 두 사람이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 보일 무대는 ㄱ자형 안채, 사랑채와 문간채가 결합한 ㄴ자형 건물이 배치된 한옥이었다. 대지 면적 126.9㎡(38.39평), 레노베이션 전 건축면적 71.09㎡(21.51평)로 독채 호텔로서 부족하지 않은 크기지만 답사를 마친 이혜인 디자이너의 첫 소감은 ‘작고 답답한 느낌’이었다고. “부부와 자녀가 살던 기존 건물은 실용성에만 초점을 맞춰 증축과 개량을 거듭한 곳이었어요. 부엌, 안방, 대청, 자녀 방 등 공간이 잘게 쪼개져 건축면적 대비 좁아 보였죠. 방마다 레벨이 다른 것도 한몫했고요.” 공사는 내부의 불필요한 벽을 허물고 바닥을 파 공간 높이를 맞추는 동시에 층고를 높여 개방감을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사랑채는 화장실을 포함해 세 개 방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를 하나로 터 박현구 대표가 기획한 슬로재의 메인 콘텐츠이자 숙박 기본 옵션인 물레 도자기 성형 수업을 위한 세라믹 스튜디오로 탈바꿈시켰다. “슬로재를 기획하던 초기부터 숙박객의 감각을 깨울 수 있는 클래스 공간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죠. 싱잉볼·다도·족욕 등 여러 가지를 고심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물레로 도자기를 빚을 때의 촉각적 자극은 비할 데가 없더라고요.”
왼쪽 마스터룸 붙박이장 속에 숨어 있는 문간채로 향하는 복도. 문간채의 기와가 보이도록 경사진 천장을 유리로 마감했다.
오른쪽 안채와 문간채가 연결되는 복도 한쪽에 난 화장실의 천장을 유리로 마감해 개방감을 주었다.
숙박객이 주로 머무는 안채 역시 침실과 마스터룸을 구분 지어줄 콩기름 한지로 마감한 미닫이문만 새롭게 설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방했다. 이때 두 ㅡ자가 만나는 벽 한쪽에 전면 유리를 적용하고, 이를 통해 보이는 기존 보일러실은 작은 정원으로 조성해 한 폭의 액자처럼 만들었다. 유리 벽과 창으로 공간을 시각적으로 확장시키는 디테일은 히든 스페이스에서도 이어진다. “마스터룸 끝쪽 붙박이장 보이나요? 문 가운데에 조그마한 사각 거울을 설치했는데, 그중 하나는 거울이 아니에요.” 이혜인 디자이너의 말을 듣고 자세히 보니 네 개 중 하나만 거울 대신 구멍이 나 있는데, 이는 숨어 있는 방으로 연결되는 문의 손잡이다. 슬로재의 안채는 문간방과 통하는데, 둘을 잇는 복도의 출입구가 바로 여기 숨어 있는 것. 문을 열면 앞으로는 안채보다 층이 낮은 문간방이, 왼편으로는 화장실이 있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것은 안채와 문간채의 레벨 차로 인해 경사가 생긴 천장을 유리로 마감해 문간채의 기와를 보이게 한 점이다. 복도에 있는 화장실 또한 천장을 유리로 마감해 개방감을 주며 빛과 풍경을 들였다.
기존 사랑채는 물레 도자기 성형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세라믹 스튜디오로 개조했다. 스튜디오 내부 바닥과 안채와 이어지는 길에는 나무 컬러와 무늬를 닮은 타일을 깔아 한층 자연적으로 연출했다.
“이혜인 대표께 프로젝트를 의뢰하며 ‘큰 테마는 힐링 큐레이션이고, 나머지는 뜻대로 해주세요’라고 했어요.(웃음)” 방향은 명확하되 디자이너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는 박현구 대표와 이러한 기대를 200% 충족할 만큼 다양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이혜인 디자이너의 만남은 공간 곳곳에서 시너지 효과를 냈다. 마스터룸 중앙에 현판처럼 걸려 있는 김은진 작가의 키네틱 드로잉 아트 작품도 그 결과물. “처음엔 미디어 아트나 인터랙티브 아트 작품을 슬로재 안에 들일까 고민했어요. 그때 이혜인 대표가 머무는 사람들의 목소리나 움직임 등이 만들어내는 파동을 측정해 그림을 그리는 키네틱 드로잉 아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했죠.” 그 외에도 일반 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은은한 그린 컬러의 마모륨 바닥재와 패션 디자이너 제이든 초Jaden Cho가 제작한 감물 염색 위에 소금 방염 기법을 더해 무늬를 낸 실크 패브릭 작품, 침대 헤드 자리에 위치한 비즈 패브릭 작품 및 물망초 패턴의 방석과 누비 커튼, 그리고 디 엠파시스트 배민아 금속 디자이너가 스모키 쿼츠·옥·투명 쿼츠 등 원석과 금속을 결합해 만든 손잡이 등은 모두 이혜인 디자이너의 의견을 적극 수렴한 결과다. 여기에 더한 달항아리 모양 삼나무 조각에서 퍼지는 한서형 향기 작가가 조향한 향, 공간에 흐르는 전주현 작곡가가 만든 음악 ‘북촌의 별’은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왼쪽 스모키 쿼츠 원석을 깎아 만든 손잡이. 금속 걸쇠는 비녀 모양을 본떴다.
오른쪽 마스터룸 유리 벽 앞 선반에 놓인 달항아리 모양 삼나무 조각에서는 오직 슬로재만을 위해 조향한 향이 은은하게 퍼진다.
오픈 석달 차, 그동안 방문한 손님의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지 박현구 대표에게 묻자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오겠다며 메모를 남긴 투숙객, 노스텔지어의 다른 공간에 숙박하지만 세라믹 클래스를 듣고 싶어 1박만 슬로재로 옮길 수 있는지 문의한 손님 등 다양한 에피소드가 술술 나왔다. “한옥이라는 공간적 경험뿐만 아니라 신선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을 특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많이 고민했다는 걸 알아봐주는 것 같아 무척 감사할 따름이죠.” 마지막으로 소식을 전하자면, 노스텔지어는 올 하반기 두 채, 내년에도 두 채의 호텔을 더 오픈할 예정이라고. 새 공간에는 또 어떤 콘텐츠와 미감으로 채워나갈지 기대해봐도 좋겠다. 문의 02-3673-3666
이혜인 대표는 건축가 겸 디자이너로 외교부 산하 KOICA에서 무상 원조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건축 PM을 시작으로 주스리랑카 대한민국 대사관 리모델링 총괄을 거쳐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 공간 디자이너로 실무를 익히고 2021년 이혜인 디자인 스튜디오를 설립하며 독립했다. 스리랑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운영하는 이혜인 디자인 스튜디오는 공간의 본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공간과 사물을 만든다. 섬나라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와 협업해 독특한 공간 경험을 선사한다. @studioleehaei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