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사가 깃든 운경고택이 준비한 세 번째 전시 <랜덤 액세스 메모리 3: 기록과 기억>이 9월 3일 오픈한다. 이번 전시의 주인공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하는 이완 작가. 그는 운경고택을 컴퓨터의 메모리(RAM)와 같은 기억 저장소로 상정해 개인의 기억과 역사의 조각들을 펼쳐 보인다.
운경고택 사랑채에 전시한 이완 작가의 작품. 역사성 깊은 고택 안에 이케아 가구를 채워 획일화된 현대사회의 양상을 환기시킨다.
“AI가 우리 삶과 주변과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궁금했고, 이에 대한 탐구가 ‘랜덤 액세스 메모리’ 시리즈예요.”
선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도정궁 터에 자리 잡은, 그의 후손이자 제12대 국회의장을 지낸 운경雲耕 이재형李載灐 선생이 생전에 머물던 집 운경고택.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옥으로 손꼽히는 이곳은 2019년 장응복 텍스타일 디자이너와 하지훈 가구 디자이너가 참여한 운경재단의 첫 기획전 <차경(借景), 운경고택을 즐기다>를 개최하기 전까지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빗장을 걸어 잠가두었다(그러나 <행복>의 오랜 독자들에겐 익숙할 터. 2017년 <행복> 6월호 조용헌의 백가 기행 칼럼을 통해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넸으며, 같은 해 행복작당 서촌에 참여해 티 페어링 행사를 진행했다). 운경재단은 첫 전시 이후 2022년 운경 이재형 선생 30주기 기념전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을 개최했으며, 다가오는 9월 세 번째 전시를 앞두고 있다. 이번 개인전의 주인공은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을 빛낸 이완 작가. 그가 선보일 <랜덤 액세스 메모리 3: 기록과 기억>은 2022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랜덤 액세스 메모리’ 시리즈 전시의 세 번째 챕터이기도 하다. 전시 기획은 리움미술관 학예실장과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부관장을 역임하고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을 큐레이팅하기도 한 우혜수 기획자가 맡았다.
“이완 작가는 리움미술관에서 일하던 당시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리움미술관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의 첫 수상자거든요.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 ‘미스터 K’ 또한 인상적으로 보았고요.” 오래전부터 그의 행보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우혜수 기획자는 지난해 화성ICT생활문화센터에서 개최한 <랜덤 액세스 메모리 2: 계승자>를 관람한 후 운경고택에서 열릴 새로운 전시의 적임자임을 확신했다. “화이트 큐브와 달리 그 자체로 존재감 있는 한옥에서, 그것도 깊은 역사를 지닌 운경고택에서 공간과 작품 어느 쪽도 묻히지 않고 적절히 균형을 이루기가 결코 쉽지 않아요. 그러나 이완 작가라면 운경고택에 깃든 역사성을 조형적으로 풀어내고 한옥의 무게감에 눌리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겠다 싶었죠.”
전시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기록과 기억의 책장’은 작가가 수집한 한국 근현대사의 기록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전시에서 ‘새’는 서로 다른 시공간을 잇는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번 전시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랜덤 액세스 메모리’ 시리즈가 어떻게 시작된 전시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완 작가의 말을 빌려 소개하자면 이렇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제 작품의 시작점은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예요. 나의 성질과 취향 등 나를 이루는 것은 어디서 온 것인지 탐구하며 자본주의 시스템,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 한국의 역사와 문화 등을 탐구하는 작품에 집중해왔죠. 그 와중에 요즘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신기술 AI가 등장했어요. 과연 이 테크놀로지는 우리 삶과 주변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궁금했고, 이에 대한 탐구가 ‘랜덤 액세스 메모리’ 시리즈예요.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직후부터 준비해 인간화된 사물, 사물화된 인간을 주제로 한 2022년 첫 전시 <랜덤 액세스 메모리 1: Displacement 0(Zero)>, AI의 기반이 되는 데이터, 즉 정보를 전달하는 인류의 최초 기술인 종이와 잉크에 주목해 한지·먹·활 무형문화재 장인들과 협업한 작품과 AI 작품을 병치해 선보인 2023년 두 번째 전시 <랜덤 액세스 메모리 2: 계승자>에 이어 올해 세 번째 전시를 선보이죠.”
왼쪽 운경 선생에 대한 기록물을 전시한 ‘아카이브-운경 이재형(1914-1992)’. 오른쪽 툇마루에 설치한 관람객의 말을 따라 하는 새 작품.
이번 전시는 운경고택을 하나의 거대한 기억장치로 상정해 운경재단과 작가가 수집한 역사적 기록물을 기반으로 제작한 조각, 설치, 사운드스케이프, AI 기술이 적용된 영상 등을 선보인다. 지난 두 차례 전시에서 신작 위주로 작품을 선보인 것과 달리, 이번에는 신작과 기존 작품 수를 비슷한 비율로 구성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아우른다. “처음 <랜덤 액세스 메모리 2: 계승자>를 보았을 때만 해도 이완 작가의 작품 세계가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인간의 삶이 어디로 변화하며 흘러가고 있는가’라는 맥락으로 다시 보니, 이전 작품의 연장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작가의 작품 세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꾸려보자고 생각했죠.” 아무렇지 않게 소비되는 공산품과 식자재 등이 우리 곁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을 뿐만 아니라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고(‘메이드-인’ 시리즈), 황학동에서 구입한 1천4백12장의 사진 속 주인공을 추적해 설정한 가상의 1930년대생 한국 작가 미스터 K를 내세워 한국 근현대사를 탐구하기도 하고(‘미스터 K’ 시리즈), 지금의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미지의 존재 AI에 천착하는(‘랜덤 액세스 메모리’ 시리즈) 이 모든 작업은 결국 이완 작가가 작품의 시작점이라 말한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라는 의문과 맞닿아 있다.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사랑채 앞 조각.
운경고택의 대문을 지나면 나오는 사랑채 앞, 1970년대 계몽주의 포스터에나 나올 법한 포즈의 가족 조각을 시작으로 26여 개의 작품은 본채와 사랑채 내부, 그리고 마당 곳곳에 설치됐다. 산책하듯 운경고택을 둘러보면 공간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는 각각의 작품이 시선을 잡아끄는데, 그중 특히 유심히 눈여겨볼 작품은 신작 ‘기록과 기억의 책장’이 있다. 앞서 우혜수 기획자가 밝힌 이완 작가와 운경고택에서의 전시를 기획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인, ‘장소가 지닌 역사성을 작품에 잘 녹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안채 대청마루에 놓인 전시 케이스에 진열된 운경 선생과 이 집에 연관된 기록물(‘아카이브-운경 이재형(1914-1992)’)과 이어지는, 오른쪽 방 책장에 전시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담은 기록으로 구성한 이 작품은 개인의 삶과 역사를 하나로 잇는다. 이를 비롯해 무거움과 가벼움의 대비를 보여주는 마당의 양팔 저울 설치 작업, 전통 방식으로 채집한 소금과 공장식으로 생산해 현대의 식단을 획일화시킨 시리얼 상자를 병치한 주방의 전시 디스플레이 등 전시 전반에는 대비 또는 상충되는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 그리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작품을 잇는 매개체로 신작 조각 ‘새’ 시리즈를 내세웠다. 운경고택 안방의 벽을 장식하는 동양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형태와 컬러부터 네온 컬러까지 다양하게 변주되는 이 ‘새’ 연작은 각기 다른 색깔처럼 시공을 초월해 정보를 전달하고 서로 다른 시대를 연결한다.
실내뿐만 아니라 마당 곳곳에 작품이 설치됐다.
이 외에도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특색 있는 협업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시가 개막하면 근대화를 상징하는 열차 소리가 운경고택을 휘감을 거예요. 이는 전시를 한층 더 공감각적으로 즐길 수 있게 리코딩 아티스트 김영선 작가님께 특별히 부탁해 준비한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입니다.” 여기에 더한 이재윤 안무가와 김영선 작가가 손잡고 준비한 개막 퍼포먼스 ‘몸으로’, 작가와의 대화 등 다양한 프로그램과 우혜수 기획자, 갤러리클립 정성갑 대표, 장남미 기자, 주리아 기자, 철학가 큐리가 필진으로 참여한 매거진 형식의 도록은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란 질문을 우리에게 다각도로 던진다.
Interview 이완 작가와의 Q&A
이전까지의 ‘랜덤 액세스 메모리’ 시리즈 전시를 직접 기획했다. 이번에는 우혜수 기획자와 함께 전시를 준비했는데 어떠한 경험이었나?
얼마 전 폐막한 올림픽을 보면서도 느낀 것인데, 선수의 역량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감독의 능력이다. 작가는 늘 머릿속에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데, 이를 말로 표현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우혜수 기획자는 어지럽게 뒤섞인 나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연결해줄 고리를 찾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되묻곤 했는데,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며 스스로도 한결 수월하게 작업을 정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한층 더 성장하게 된 경험이었다.
서로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잇는 주요 매개체로 새가 등장한다. 왜 하필 새였나?
운경고택을 처음 둘러볼 때 안채의 안방 벽을 장식한 새 그림을 인상 깊게 보았다. 운경 선생이 생전에 남긴 사진 등 자료를 볼 때도 이 방이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더라. 내가 태어나기도 전 운경 선생이 머물던 공간에 있던 새를 지금 내가 이렇게 직접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더라. 종교나 문학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잇는 매개체로 새가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이런 개인적 경험과 상징성에 의한 선택이었다. 곳곳에 설치한 ‘새’ 연작은 채색법도 컬러도 모두 다른데, 우리가 지닌 문화적 다양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기록과 기억’은 이번 전시 제목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기록과 기억에 기반한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나?
내가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는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작업만 할 수 있다”다. 이 말인즉, 만약 44세인 어떤 작가가 있다고 하면 그 작가는 44세까지 축적된 삶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작품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내 작품의 근간에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나의 경험에서 파생한 고민이 깃들어 있는데,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고민일 것이다. 그래서 내 작품이 시대를 반영하고, 누군가가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면 좋겠다. 현재 살아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담론을 담은 작품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보며 공감하기도 하고 반론을 내거나 서로 의견을 나눠보길 바란다.
<랜덤 액세스 메모리3: 기록과 기억>
기간 9월 3일~10월 27일
시간 화~일요일 오전 9시 30분~오후 5시(사전 예약제로 9:30, 11:00, 12:30, 14:00, 15:30 회차당 80분 관람, 추석 연휴와 매주 월요일 휴관)
장소 서울시 종로구 인왕산로 7 운경고택
관람료 1만 5천원(소정의 기념품 증정)
예약방법 네이버 사전 예약(네이버 플레이스 ‘운경고택’에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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