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사와 준지, 폴렌느와 SVRN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최근 10년 내 급성장한 패션 브랜드라는 것, 그리고 WGNB 백종환 대표가 디자인한 플래그십이 있다는 것. 그는 브랜드에 꼭 맞는 룩을 찾아주는 해결사가 되어 공간을 수동적인 제품 전시장이 아닌 브랜드를 표현하는 퍼포머로 변모시킨다.
연희동 WGNB 사옥에서 만난 백종환 대표. 이곳은 30년 된 다세대주택을 고쳐 만든 오피스다. 5층에 있던 그의 공간을 최근 아래층으로 옮기고, 가구와 조명도 배치를 바꿨다.
백종환 국민대학교 공간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실무 경험을 쌓았고, 2015년 WGNB를 설립했다. WGNB는 ‘접화적 사고’를 기반으로 건축, 인테리어, 가구, 제품 등 경계 없는 작업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2018년 iF 디자인 어워즈에서 골드를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독일의 아이코닉ICONIC 어워즈, 프레임FRAME 어워즈 등에서 올해의 디자이너로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wgnb.kr
WGNB 백종환 대표는 여러 가지 수식어로 표현된다. 공간 디자인을 전공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지만, 건축도 하고 필요하면 조명이나 가구는 물론 제품도 디자인하며,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월가 어소시에이트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공동대표까지 올랐고, 2015년 회사를 인수해 WGNB를 시작했다. 이후 해외 유수의 디자인 어워드에서 수상하면서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기 전부터 해외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았다. 빛을 디자인하는 브랜드 비아비주노Viabizzuno의 조명을 만들기도 하고, 해외의 여러 상공간을 작업하며 전 세계를 무대로 삼고 있다. WGNB의 강점이 특히 빛을 발하는 영역은 상공간이다. 신데렐라를 변신시킨 요정 할머니처럼 브랜드에 꼭 맞는 핏을 찾아주기 때문. 이들에게는 음악이나 패션처럼 공간과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는 것도 아이디어를 위한 탐구의 대상이 되고, ‘우리의 생각을 필요로 한다면 컵도 디자인할 수 있지’라는 태도로 업역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렇게 수많은 생각과 직관을 직조해 완성한 공간에는 작가의 작품, 새로운 소재가 WGNB의 디자인에 녹아들기도 한다. 무채색이나 강렬한 형태 같은 특정한 장면보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가 그들의 작품을 설명하는 핵심 코어다. 그리고 이 같은 정체성은 전 세계 감 좋은 브랜드를 만족시키고 있다. 그들이 설계한 SVRN 샌프란시스코는 다음 달, 폴렌느 파리와 런던은 내년 오픈을 앞두고 있다. 이들의 작품이 탄생할 다음 도시는 어디일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SVRN Chicago
스트리트 패션 편집숍 SVRN의 시카고 매장. 서양이 대상 자체를 바라본다면 동양은 대상을 둘러싼 주변의 관계, 여백에 집중한다. 무가 있어야 비로소 유가 존재한다는 의미. 그러한 관점에서부터 시작한 프로젝트다. 매장을 둘러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고객의 시선이 공간의 여백을 채우는 흐름이자 긴장감이라 보고, 이를 중심으로 디자인을 풀어나갔다. 브랜드의 내러티브를 닮은 금속과 돌을 각자의 물성이 온전히 느껴지면서도 모던한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WG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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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주택(In Progress)
두 자녀를 둔 젊은 부부를 위한 집. 이태원의 탁 트인 전망이 아름다운 위치에 자리한다.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동시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장소가 곳곳에 놓인 따뜻한 집으로 설계했다. 전반적으로 하얀 색감인 공간에 채광을 충분히 들이고 목재의 따뜻한 미감을 더했다.
나인원 프라이빗 라운지Nineone Private Lounge
나인원 내부의 투자 상담을 위한 프라이빗 라운지. 다른 고객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복잡한 동선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탄생한 여유 공간에 적절히 배치한 WGNB의 가구, 조명 등 다섯 점의 오브제는 분위기를 환기하는 동시에 이정표 기능을 수행한다.
셜터 커피SHLTR Coffee
강원도 대표 관광도시인 속초의 바다 옆에 위치한 카페. 클라이언트의 요구 사항은 ‘쉼터’라는 콘셉트, 그리고 기존 건물 중 한 동을 보존하면서 다른 장소 세 개를 하나의 건축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큰 건물 대신 기존에 존재하던 볼륨의 건물 세 동을 배치하고, 작은 마을을 만들 듯 설계했다. 어두운 동굴 같은 공간으로 일상에서 벗어난 낯선 모습과 주변과의 조화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폴렌느 서울Polene Seoul
프랑스 하이엔드 레더 브랜드 폴렌느의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 한국에서는 첫 번째, 전 세계에서는 파리, 뉴욕, 도쿄에 이어 네 번째 지점이다. 프로젝트는 브랜드의 핵심 소재인 가죽을 디자인 언어로 삼고 건물 전체에 가죽 한 장이 녹아든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광물 덩어리를 세심하게 조각하고 바닥과 벽, 천장, 계단까지 가죽을 감싸고 이어지는 듯한 모습으로 하나의 동굴처럼 디자인해 공간 전체가 폴렌느의 가장 큰 가죽 작품이 된다.
“저희 목표는 폴렌느는 폴렌느답게, 무신사는 무신사답게 각각의 브랜드에 맞는 옷을 입혀주는 거예요.”
2015년 WGNB를 시작해 올해 10주년을 맞이했어요. 새롭게 시작할 당시 어떤 사무소가 되고자 했나요?
한국을 넘어 글로벌하게 일하고 싶었어요. 특히 미국이나 유럽에서요. 당시 일본이나 중국의 디자이너는 이미 그런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어요. 이유가 궁금했고 그 문턱을 넘고 싶었습니다. 사실 무엇을 어떻게 시도할지 뚜렷한 방법은 없었어요.(웃음) 그러다 운 좋게 유럽의 어워드에서 몇 차례 수상하며 WGNB가 알려졌고, 그것을 계기로 해외에서 작업할 기회가 생기면서 조금씩 포트폴리오가 쌓였어요.
용도나 업역을 오가며 폭넓게 작업하지만, 특히 상공간에서 WGNB의 저력이 발휘되는 듯해요.
이 브랜드가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알리는 장소를 잘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준지는 서울 플래그십이 생기기 전후가 달라요. 그 전에는 패션을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이 아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없죠. 그게 공간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브랜드는 이름이 있을 뿐 형체가 없는데, 공간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도 있고 물리적으로 실재하잖아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사람들이 느끼게끔 할 수 있는 거죠.
그럼 상공간에서 WGNB가 강점을 발휘하는 비결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저희 목표는 폴렌느는 폴렌느답게, 무신사는 무신사에 어울리는 식으로 각각의 브랜드에 맞는 옷을 입혀주는 거예요. 자주 사용하는 소재나 기법이 패턴처럼 반복되면 회사의 룩이 정해지잖아요. 저는 그런 상황을 경계해요. 예를 들어, 준지 도산 플래그십을 작업하면서 처음으로 블랙을 전면적으로 사용했는데 그 공간을 인상 깊게 본 클라이언트들이 “우리도 어둡게 해줘”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사실 그보다는 브랜드에 맞는 색을 찾는 것이 먼저거든요. 브랜드와 제품, 공간까지 일체화된 감각으로 느껴지는 장소를 만들려 합니다.
상공간은 다른 곳보다 빨리 사라지는 편이에요. 개인적으로 그 상실감을 극복하는 노하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디선가 일본의 디자이너 시로 구라마타倉俣史朗가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완성된 공간은 마치 단막극 같지만, 그래서 오히려 좋다”고 이야기한 것을 본 적이 있어요. 더 많은 걸 표현할 수 있고 내 생각을 투영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라고요. 그 이야기를 보고 같은 마음가짐을 지니게 됐어요. 사라지는 것은 아쉽지만 또 새로운 것이 생길 테니까요. 아주 가끔은 없어지면 좋겠다 싶은 것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웃음)
하이엔드 주거는 상공간을 작업할 때와 어떻게 다른가요?
그 집만이 지닌 편안함을 기반으로 손이 닿는 부분 하나하나 섬세하게 디자인하는 것이 하이엔드 주거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빛이 잘 드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운동에 집중하고, 계절별로 그림을 바꿔 걸어 공간의 분위기를 달리할 빈 벽이 존재하는 그런 집을 디자인하려 합니다.
홈페이지를 보면 “같은 것을 보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는 문장으로 WGNB의 철학을 소개합니다. 프로젝트를 작업할 때 어떤 관점으로 공간을 바라보려 하나요?
제가 최근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접화적 사고’예요. 한국 문화는 접화적 성향이 강해요. A와 B가 있으면 둘을 붙여 C를 만드는 거죠. 이질적인 소재를 섞어 먹는데, 각각의 맛이 죽지 않으면서 새로운 맛이 나는 비빔밥처럼요. 반면, 중국은 기름을 기반으로 모든 음식을 끌어안는 식문화처럼 A와 B가 있을 때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흡수해버리는 ‘동화’의 문화예요. 일본은 자연의 한 장면을 위해 가지를 정교하게 잘라내는 ‘응축’ 문화를 추구합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작가와 협업할 때가 많은데, 이것이 일종의 접화예요. ‘이광호 작가가 전선을 꼬아 만든 스툴이 이 공간에 잘 어울릴 것 같아’라는 생각으로 놓는 것은 디스플레이지만, 그가 선을 꼬아 작업하는 방식을 공간에 어떻게 녹여낼지 생각하는 것은 접화적 작업인 거죠. 일례로 엔드피스 안경점은 이광호 작가가 니팅 작업으로 오브제 월을 제작해 보기에도 아름답고 시야를 차단하면서 빛은 투과하는 벽의 기능도 만족하게 됐어요. 폴렌느 서울은 가죽을 모티프로 디자인했는데, 그 가죽을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로 이다솔 작가에게 협업을 제안했어요. 그는 세라믹으로 가죽 질감을 그대로 재현하는 작업을 하는데, 폴렌느가 추구하는 따뜻함과 잘 어울릴 것 같았거든요. 이때도 단순히 그의 도자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 전시 테이블을 폴렌느에서 가죽으로 마감하는 방식으로 제작했어요.
작업할 프로젝트를 선정하는 것도 디렉터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선택의 기준이 있나요?
브랜드를 유지하기 위해 인테리어를 의뢰하는 경우보다는 변화가 필요하거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은 시기일 때 작업한 것이 더 재미있고 저희에게도 의미 있습니다.
검은색만 사용하는 것은 지양한다고 했지만, WGNB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해요. 소장님에게 검은색은 어떤 의미인가요?
공간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의 제 표현 같아요.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은 단색화, 모노크롬이잖아요. 비슷해 보이지만 모노크로매틱이 하나의 색이라면 검은색은 아크로매틱 achromatic, 없음의 의미예요. 일례로 준지 플래그십은 굉장히 강한 형태를 표현했는데, 반대로 그 형태가 최대한 드러나지 않기 위해 검은색을 사용했어요. 역유 같은 느낌인 거죠.
WGNB의 다음 10년은 어땠으면 하나요?
지금처럼 잘하고 싶은 마음과 지금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합니다. 해외 브랜드와 많이 작업해서 한국을 알리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10년 전과 비교하면 한국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한국의 디자이너가 그들에게 너무 먼 세계의 이야기였다면, 이제는 그 거리가 많이 가까워졌어요. 한국에도 잘하는 디자이너와 건축가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상황이 온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 더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