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의 아트 디렉터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설수빈 씨의 집엔 그동안 축적한 그의 미감과 기억이 박물관처럼 전시돼 있다.
1 수빈 씨가 가장 이상적인 의자 디자인이라 손꼽는 토네트 플렉스 2000. 스태킹한 모습이 특히 아름다운데, 이를 연출하기 위해 두 개를 구입했다.
2 이케아의 천장 램프 프레임에 직접 패브릭을 씌워 리폼했다.
3 그의 대표적인 도자 제품 CC 플레이트의 프로토타입. 다양한 색상과 질감으로 만들었다.
4 영국에서 구입해 한국까지 가지고 온 비트라의 판톤 체어에 앉아 있는 수빈 씨. 얼핏 보면 일반 화이트 컬러 같지만 사실 야광이라고.
5 미러클 모닝 루틴 중 하나인 디톡스 주스를 위한 레몬. 요즘 그의 주방 필수 식재료다.
6 목공을 처음 시작할 당시 제작한 인사이드아웃 스툴. 목선반으로 직접 깎아 만들었다.
7 위는 헬싱키 빈티지 마켓에서 구입한 아라비아핀란드의 커피 잔, 아래는 영국 빈티지 마켓에서 구입한 오텐시아의 컵이다. 예쁜 테이블웨어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사는 것도 좋아한다.
모든 사물에는 소유자의 취향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것만을 두는, 가장 사적인 공간인 집은 사는 이의 삶의 지형도와 다름없다. 마치 박물관처럼 가구, 공예품, 오브제, 책, 심지어 계단 손잡이 조각까지 전시한 이 집의 주인은 제일기획에서 아트 디렉터이자 브랜드 익스피리언스 디자이너로 활약 중인 설수빈 씨. 회사 업무 외에도 개인 작업으로 가구와 도자기를 만든다. 대학에서 환경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공예과로 입학한 그가 흙을 빚고 목재를 다듬던 1년 남짓한 시간은 해소와 분출의 순간으로 각인되었고, 이 기억을 토대로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참고로 내가 쓸 기물을 만드는 취미 정도라 생각하면 섣부른 판단이다. 수빈 씨는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으로 자신의 가구를 대중에게 처음 선보이고, ‘2023 코리아+스웨덴 영 디자인 어워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집에 있을 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실. 손님 초대하기를 좋아해 커다란 테이블을 두었는데, 이는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주방의 선반에는 여러 여행지에서 사 온 테이블웨어와 직접 만든 것, 알도 로시가 디자인한 알레시 쿠폴라 모카 포트 등이 자리한다.
지금의 집에 자리 잡은 것은 올해 1월 1일, 회사를 휴직한 후 영국 왕립 예술학교 대학원에서 시작한 인테리어 디자인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서다(그의 유학 이야기는 디자인하우스에서 6월 말~7월 초 출간 예정인 책 <디자이너의 유학: 영국 왕립 예술대학 출신 아트 디렉터의 유럽 디자인 유학 가이드>을 통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유학 생활을 하며 여러 방면에서 생각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그중 하나는 집에 대한 인식이에요. 예전에는 조금 아쉽더라도 월세를 아끼는 것이 우선순위였다면, 지금은 마음에 드는 보금자리를 위해서라면 월세를 좀 더 내고 대신 다른 부분에서 절약하죠. 집이 주는 만족감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런던에서 생활하며 느꼈거든요.”
일명 무드 보드라 부르는 거실 한쪽을 차지하는 선반. 유학 전 제작한 가구와 도자기부터 런던에서 공부할 당시 디자인한 것, 친구와의 추억이 담긴 오브제 등을 두었다.
분리된 침실에는 침대와 최소한의 아이템만 두었다. 이곳의 조명 셰이드 또한 직접 패브릭을 씌워 만들었다.
살인적인 집세로 인해 셰어 플랫에서 시작한 타지 생활은 아늑한 나만의 안식처가 삶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에게 깨우쳐주었다. 이후 이사해 작지만 마음에 꼭 드는 집에 살게 되었는데 그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귀국을 준비할 때도 가장 눈에 밟히던 것은 바로 그 집이었다. 비록 같은 집은 아니지만 못지않게 만족스러운 지금의 보금자리는 11평(36.36㎡) 남짓되는 분리형 원룸이다. 주 생활공간은 거실로 중앙에는 커다란 테이블, 토네트 플렉스 2000과 S320, 비트라 판톤 체어, 직접 디자인한 후프 체어 등이 놓여 있다. 그리고 거실 벽 한쪽에는 수빈 씨가 일명 무드 보드라 부르는 검은 선반이 있다. 골반 높이 선반에는 유학 전 초기 가구 작업인 인사이드아웃 스툴, 도자기 작업 CC 플레이트의 프로토타입, 대학원 재학 시절 철거 예정 건물을 기억하기 위해 건물 계단의 핸드레일을 재조립해 의자와 리빙 아이템으로 만든 프로젝트 ‘리멤브런스Remembrance’의 촛대와 핸드레일의 일부, 친구와의 추억이 담긴 오브제 등 그가 지나온 시간이 깃든 아이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왼쪽부터)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영 디자이너 프로모션에 선발되며 선보인 코리안 아르데코 시리즈 중 가장 주목받은 후프 체어. 리멤브런스 프로젝트를 통해 선보인 캔들 홀더. 독일과 파리에 기반을 둔 디자인 숍 블레스Bless에서 일하는 친구가 졸업 전시 준비를 도와주기 위해 베를린에서 런던으로 올 때 이고 지고 와 선물로 준 추억이 담긴 오브제.
“유학 전 디자인한 가구를 보면 느껴지겠지만, 현대적이고 모던한 형태와 매트한 질감을 좋아했어요. 컬러도 모노톤을 선호했고요. 그러나 ‘reuse’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취향이 바뀌더라고요. 덤으로 빈티지 가구에 대한 애정도 커졌어요.”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레드 컬러의 글로시한 도자기 작업이나 하나둘씩 수집하기 시작한 빈티지 체어 등이 이를 방증한다. “몇 번의 클릭과 스크롤링으로 찾을 수 있는 기성품과 달리 빈티지 가구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영영 다시 못 만날 수도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살까 말까 고민한 시간, 결국 사고 나서 ‘잘 샀네’ 하며 뿌듯해하는 순간이 모두 스토리가 되어 남죠.”
요즘 미러클 모닝을 실천 중이라는 수빈 씨는 새벽 일찍 일어나 한강 조각 뷰(건물에 가려진 한강이 군데군데 보인다 하여 붙인 별칭)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바쁜 일상을 속 틈틈이 친구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고, 휴일에 책을 읽으며 술을 한잔 곁들일 때면 행복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집에 홀로 머무를 때도 혼자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나의 삶을 묵묵히 응원해주는 누군가의 품 안에 머무는 기분이죠.” 변화하는 취향이 쌓여가는 모습처럼 집에 대한 수빈 씨의 애정과 유대감 또한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