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 북촌을 중심으로 열리던 <행복이 가득한 집>의 행복작당이 초여름 서촌 버전을 처음 공개했다. 여기 오프닝 데이에서 경험한 하루,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일상 속 예술, 예술 속 일상 같은 순간을 전한다.
1950년대 지은 한옥 스테이 썸웨어에 펼친 세븐도어즈의 전시 <서촌 블루스>. 여름의 집을 통해 과거 속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작당과 서촌의 만남
일본에 살면서 서울이 부러울 때는 <행복이 가득한 집>이 북촌, 한남 등에서 ‘행복작당’ 프로젝트를 펼치는 시기였다. 2016년에 처음 시작해 매년 개최하는 이 행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오픈 하우스’. 평소에는 가보기 힘든 아티스트의 작업실이나 스테이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공간을 발굴해 소개하고, 그 안에 국내외 유수의 브랜드나 작가와 협업한 전시를 선보이는 그야말로 ‘일상 속 비일상적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자리다. 일본에서부터 갈고닦아온 나의 오랜 취미로 말할 것 같으면 ‘남의 집 혹은 고택 탐방’. 그래서 내겐 행복작당이 그 어떤 전시보다도 더욱 놓치고 싶지 않은 서울의 귀한 이벤트다.
서촌의 골목과 이웃, 사람들을 잇는다는 것을 강조한 행복작당 서촌 포스터.
6월 4일부터 6일까지 서촌에서 진행된 행복작당 서촌은 초여름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올해가 더욱 독특한 건 평소 사랑해 마지않는 서촌에서 열렸다는 것(다가올 가을 북촌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그도 그럴것이 서촌은 지난번 연재에서 별도의 주제로 다룰 만큼 요즘 서울에서 가장 눈여겨보는 지역이다. 관광객에게도 잘 알려진 명소인 북촌보다는 좀 더 사람 냄새가 나고, 골목마다 개성이 다르며, 저마다 다른 삶의 속도와 기준이 읽혀진다고 할까. 특히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균형 있게 보이는 동네라는 점이 이 지역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리추얼 마인드의 그레이스 최 대표 강사가 진행하는 사운드 배스 프로그램.
고즈넉한 한옥 안에 모던하고 아름다운 오브제, 사운드 세러피 기물이 어우러진 리추얼 마인드 풍경.
한옥 아래 여름의 순간을 즐기다
이번 행복작당 서촌의 콘셉트는 ‘서로서로서로’. 서촌의 곳곳을 유기적으로 잇는 연결성을 강조한 듯, 골목 구석구석을 촘촘하고 세밀하게 파고든 느낌이다. 행사의 시작은 <한국·오스트리아 현대장신구전>을 선보인 서촌라운지부터. 이곳에서 입장 팔찌를 받고 서촌 탐험을 시작해본다. 오전 10시 반, 미리 예약해둔 리추얼 마인드로 향했다. 좁은 골목 깊숙이 자리한 이곳은 아니나 다를까 가정집이자 스튜디오로 운영하는 사운드 세러피스트의 공간. 이곳에서 나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조금 독특한 체험을 했는데, 한옥의 정기를 받아들이면서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레이스 최(최은혜) 대표 강사는 먼저 한옥에 대한 설명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손수 고치며 살고 있는 한옥은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간다면서, 현대인에게는 바람과 자연이 통하는 집에서 여백과 여유를 느낄 수 있는 명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물론 한옥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편함도 많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도 자연스러운 방식인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서 삶을 향한 유연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뒤이어 개인의 몸 상태를 진단하는 워크북을 작성하고, 연꽃차와 다식을 곁들인 간단한 찻자리를 즐겼다. 한옥 툇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니 몸과 마음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듯 편안해지는 느낌. 특히 살짝 단맛이 느껴지는 연꽃차의 향이 오전의 햇빛과 공기, 고즈넉한 한옥과 어우러지니 공간과 교감하는 맛과 향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획일적인 아파트가 아니었기에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요가 수업에서만 보던 싱잉볼 연주도 직접 하게 될 줄이야! 뇌파를 자극해 긴장과 불안감을 감소시키는 싱잉볼은 소리로 치유하는 세러피 방법 중 하나다. 쉽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음색과 진동이 점차 마음을 집중하게 해주고, 어떻게 귀와 몸을 차례로 깨우고 에너지를 끌어당기는지 알게 됐다. 무엇보다 바쁜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쌓이는 부정적 에너지를 해소하고, 현재의 순간에 몰입하게 해주는 명상적 기능이 마음에 들었다. 지속적으로 하면 몸과 정신의 균형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의 창조력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고. 마지막으로는 이번 프로그램의 정점이자 가장 인상 깊었던 사운드 배스 체험이었다. 내가 할 일은 준비한 침구에 편히 누워 아로마 스팀 안대를 낀 채 소리를 느껴보는 것뿐.
심리적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는 싱잉볼 연주를 직접 경험해본 시간.
아티브가 전개하는 지노리 1735의 테이블웨어가 헤브레 한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옥에세이 서촌에 전시된 신세계 뷰티 브랜드 연작.
대표가 직접 연주하는 소리는 음악인 듯 아닌 듯 귀에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이내 서서히 사라졌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니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고 나는 그제야 내가 잠시 잠들었다 깼다는 걸 알았다.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잠과 현실을 자유로이 유영한 듯한 실로 신기한 체험이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나른한 노천 온천을 만끽한 후의 기분이라 해야 할까. 온몸이 이완된 듯 긴장이 풀려 있었고, 고질병이던 허리도 어쩐지 편안해진 느낌이었다. 시간과 여유가 허락한다면, 가끔은 마사지 대신 사운드 배스를 체험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 전시 중 가장 돋보인 것은 한옥 스테이 썸웨어에서 펼쳐진 <서촌 블루스>이다. 인왕산 수성동 계곡 근처 구불구불한 골목 끝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리빙 스타일링 스튜디오 세븐도어즈의 민송이·민들레 대표가 우리 모두가 오래전 경험해본, 지극히 한국적인 여름의 기억을 소환해냈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과거 한국의 세트 버전으로 만들면 이런 느낌일까. 꽃과 과일이 있는 여름 정물로 시작해 자개장이 있던 할머니의 거실, 쿰쿰한 냄새가 날 것만 같은 정겨운 벽장, 한 여름 밤의 촉감 등 소주제로 꾸민 방들은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어느 여름의 낭만적 냄새와 공기, 촉감을 기억하게 했다. 김동해, 이혜미, 최희주, 아르노 부에이 등 공예·회화 작가들을 비롯해 디자인 가구와 빈티지 소품, 그리고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들었다는 수향의 향기까지. 나른하고도 푸르르던, 뜨겁고도 서늘하던 여름의 그리운 기억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춤추는 느낌이었다.
유예소에서 열린 미술 평론가 유경희 소장의 미술 강연.
초여름의 이른 뙤약볕에도 많은 독자와 관람객들이 행복 작당 서촌을 즐기러 나왔다.
일상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오후에는 미술 평론가 유경희 소장이 운영하는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유예소에 초대됐다. ‘내 안의 예술가를 창조하라!’는 주제로 미술 강연이 열린 것. 사실 그간 서촌을 지나다니며 늘 이 집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드디어 이날 이곳에 처음 발을 딛게 된 것이다. 곳곳에 아름다운 예술 작품도 멋졌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캔버스 같은 공간 자체였다. 한옥의 마당이 마치 중정처럼 열려 있는데, 알고 보니 착착 건축사무소 김대균 소장-그는 저서 <집생각>을 통해 동양의 투명한 공간 감각을 강조하기도 했다-의 작업이었다. 유 소장은 강연에서 예술가들의 풍부한 사례를 통해 창조의 메커니즘을 소개하며 다음의 네 가지를 강조했다. ‘떠날 것’ ‘결핍을 활용할 것’ ‘되기를 실천할 것’ ‘낯선 것끼리 연결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오랜 시간 연구하며 얻은, 삶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삶이 될 수 있는 유용한 키워드였다. 그가 곱씹고 정리한 깨달음을 나도 일상에서 되새김질하며 나만의 예술을 그려보리라 다짐했다.
진료복 브랜드 호퍼의 쇼룸인 난호재와 오뚜기, 프리미엄 소파 브랜드 에싸가 꾸민 ‘스위트 홈’ 컬렉션. ⓒ박찬우
식물 스튜디오 서간에는 학과꽃이 준비한 ‘서촌퍼니처’의 가상 쇼룸이 펼쳐졌다.
그 밖에도 오뚜기가 소파 브랜드 에싸와 손잡고 한옥 난호재에서 선보인 ‘스위트 홈’ 컬렉션, 한옥을 소개하는 책 의 저자 박나니 작가의 한옥 헤브레에 꾸민 라이프스타일 숍 아티브의 감각적인 브랜드들, 이번 행복작당 서촌을 통해 처음 공개한 한옥에세이 누하에서 만난 스튜디오 HJRK의 컬러풀한 체어와 오브제, 식물 스튜디오 서간에서 학과꽃이 준비한 1970년대 가상의 가구 브랜드 ‘서촌퍼니처’의 페이크 쇼룸도 보는 재미와 발견의 즐거움이 있었다. 초여름의 이른 땡볕 아래, 지도 하나 들고 하루 종일 서촌 구석을 누비다 어슴푸레해진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고 동시대의 이야기와 엮어서 세상에 선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려 37년간 우리나라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전해온 <행복이 가득한 집>이 행복작당 프로젝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저마다의 색과 향, 질감을 간직한 삶을 추구하자는 것이 아닐는지.
서간에서 유상경 대표와 진행한 분재 클래스.
공간 곳곳에 여름의 감각이 가득했던 세븐도어즈의 전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는 것은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도, 아등바등 살며 언젠가 이뤄내야 할 꿈도 아니다. 어쩌면 때로 지겹도록 반복적이고 소소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조금씩 천천히, 자신만의 속도로 가꿔나가며 ‘실천’하고 또 ‘발견’하는 것일 터.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얼마든지 의미 있게, 재미있게 쓸 수는 있다. 하루하루의 순간이 모여 나만의 삶의 풍경이 만들어진다고 한다면, 가능한 그 그림의 단면을 소중히 음미하며 즐거이 덧칠하고 싶다. 다만 훗날 그 그림의 완성작이 어떤 장르에도 얽매이지 않는, 물처럼 맑고 공기처럼 자유로운 나만의 무엇이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