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취향이 범람한다고들 한다. 귀가 닳도록 들어서 언급조차 망설여지는 ‘그’ 단어의 매력이 희석되려던 찰나, 운명처럼 최재형 씨를 만났다. 그리고 취향이라는 흔한 단어가 갑작스레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옥살이의 장점이 너무나도 많기에 벌레와 주차로 인한 생활의 단점을 많이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좋아하는 것으로 채운 집’이라는 표현이 식상하게 느껴지겠지만, 나는 이 집을 꼭 이렇게 소개하고 싶다. 어린 시절부터 모은 만화책이 빈틈없이 꽂힌 선반, 아끼는 술을 보관하기 위해 주문 제작한 위스키장, 사랑하는 반려묘 세 마리의 사진으로 만든 종이 달력, 집 안 곳곳에 장난감처럼 놓인 괴근 식물…. 대체 ‘이 사람’이 아니라면 ‘좋아하는 것만으로 채웠다’는 이 흥미롭지 않은 표현을 과연 누구 앞에 당당히 붙일 수 있을까?
“이 집은 제가 좋아하던 것과 지금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한 공간입니다. 저라는 사람이 집에서 음악을 듣는 방식이 어떤지 알게 되면 제 말에 쉽게 수긍하실 거예요. 음악은 제가 처음 들은 미디어 그대로 듣고 싶기 때문에 턴테이블부터 붐 박스, 아이팟 스피커까지 다양한 종류의 오디오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빌 에번스의 재즈는 LP로, 윤상의 ‘마지막 거짓말’은 카세트테이프로, 맥스웰의 ‘woman’s work’는 CD로, 퍼렐 윌리엄스의 ‘프론틴’은 아이팟으로 들어야 해요.”
한옥으로 이사 온 이유 중 하나, 바로 고양이(봄, 썸머, 가을)들이 나른한 주말 오후에 햇빛을 쬐며 잠자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지난겨울, 눈이 오는 날 영화 <러브레터>의 OST를 LP로 들었을 때가 가장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던 그는 날씨와 기분에 따라 원하는 음악을 골라 들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독자에 대한 예의는 뒤로하고 이 글의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리기도 전에 큰따옴표를 통해 그의 육성을 먼저 드러내버렸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취향으로 똘똘 뭉친 사람인지 강조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 같았다. 세 문단째가 돼서야 공개하는 그의 이름은 최재형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영상영화학과를 졸업하고, 지디앤탑・2AM 등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유명 아이돌을 찍는 뮤직비디오 촬영감독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재는 프로덕션 버드를 운영하며 유능한 상업 광고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자신의 직업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심지어는 광고 기획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 최근 대학원까지 진학한 최재형 씨. 하지만 광고 시장이 주는 ‘속도감’이라는 스트레스까지는 그도 피해갈 수 없었다. 늘 트렌디해야 하고, 남보다 빨라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집에 있을 때만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을 원하던 그는 2년 전, 서대문구에서 한옥이라는 아주 적절한 새 보금자리를 찾았다. 서까래의 높은 층고가 주는 시원함과 나무가 주는 따뜻한 안정감도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바로 마당이었다. ㄷ자 한옥에 딸린 작은 마당은 그가 원하는 편안한 일상을 영위하기에 무척이나 적절한 공간이었다.
최재형 씨는 혼자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하고 싶고 어울리는 것에 대해 심도 있게 알아가다 보니 집 안이 좋아하는 것으로만 가득 차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고층 빌딩에서 바라보는 ‘느끼지 못하는 멋진 풍경’보다 바람을 직접 맞을 수 있는 마당에서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는 게 훨씬 좋았어요. 사랑하는 고양이 세 마리가 마당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걸 보면 기분이 절로 흡족하죠. 간이 의자에 앉아 마시는 커피 한잔이 가장 좋은 곳, 기분 좋은 햇살에 빨래를 널 수 있는 곳…. 마당은 스트레스가 마법처럼 씻기는 공간이에요.”
최재형 씨의 한옥엔 북유럽, 미드센추리 모던 같은 인테리어 콘셉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저 좋아하고 좋아하던 것,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을 모두 집에 들였기 때문. 중학교 때부터 모아온 소설책과 CD, 지금 관심을 갖고 읽는 디자인과 요리책, 촬영감독이기에 많이 소장한 카메라, 다양한 형태와 컬러의 조명까지. 최재형 씨는 이 집에서 눈에 들어오는 모든 물건이 그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길 바랐다.
고등학생 때 좋아하던 R&B 아티스트 조Joe의 <베터 데이스better days> LP. 도쿄 페이스샵레코드에서 어렵게 발견한 보물이다.
아가베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아가베 우투헨시스. 마치 피겨처럼 자라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식물이다.
빌라레코드의 라이트Light 체어. 트렌디하면서도 적당히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찾다 구매했다.
“일관된 콘셉트랄 건 없어요. 오히려 클래식한 한옥 아래 한국적인 자개장, 미드센추리 모던의 대표 격인 USM 서랍, 대니시한 우드 수납장을 모두 나란히 두고 싶었죠. 딱 하나 지키는 게 있다면, 식물을 꼭 집에 들인다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가구를 두어도 식물이 없다면 생기가 없는 느낌이 들거든요. 하지만 저희 고양이들이 잎을 모조리 씹어버려서 아이들이 씹지 못할 것 같은 식물을 찾았고, 그러다 아가베를 발견했죠. 괴근 식물을 보는 순간 느낀 감정은 ‘낯섦’이었어요. 식물이 맞나 싶은 외형이 주는 낯섦이 편하기만 한 집 안에 작은 긴장감을 주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죠. 그렇게 이 식물의 매력에 빠져 괴근 식물과 관련한 브랜드도 준비하고 있어요.”
멋진 집을 꾸미기 위해 취향을 쥐어짜낸 것이 아니다. 그저 취향이 명확하다 보니, 그들이 모여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인테리어가 된 것이다. 사실 나는 늘 최재형 씨처럼 사는 삶을 상상해왔다. 그야말로 ‘내’ 인생을 사는 삶 말이다. 밤낮없이 일에 치이는 날이 반복되어 나를 잃어갈 때, 내가 내 삶을 살고 있긴 한 걸까 반문하며 최재형 씨 같은 사람의 삶을 상상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그것을 삶의 일부로 만들어 영화 같은 일상을 꾸려가는 사람. 그 덕에 남들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취향의 농도가 짙어진 그를 보며 나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1 스웨덴의 벼룩시장에서 힘들게 구입한 루이스 폴센의 PH 콘트라스트 조명. 오래된 빈티지 조명은 삼성전자 주식을 사는 것과 같다고.
2 주광색이 아닌 다른 컬러의 조명을 두고 싶어서 구매한 파란색 무라노 머쉬룸 램프.
3 부모님은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최재형 씨는 주문 제작한 이 위스키장을 보고만 있어도 즐겁게 취하는 기분이다.
4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고 구입한 잔스포츠의 D2 캠핑 배낭.
5 고장 나면 고칠 곳이 없어 서글픈 소니 빈티지 라디오 icf-caption 5500. 혼자 캠핑을 다닐 때 블루투스 스피커 대신 들고 다니기도 한다.
6 아버지가 쓰시던 필름 카메라인 미놀타 X300을 물려받았다. 영상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이자 그에게 가장 소중한 카메라.
7 묘한 색감과 뾰족한 가시, 구불거리는 잎이 매력적인 파키포디움 사운데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