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지형·생태·문화적 관계를 살피고 ‘땅의 건축’에 담긴 상호 의존적 관계성의 깨달음을 고찰한다. 또 이런 건축이 모여 만들어진 ‘땅의 도시’ 사례를 수집해 ‘서울의 100년 후’를 상상해본다. 도시에 관한 건축가들의 해법이 서울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 도시에도 훌륭한 좌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서울이 친환경과 유기성을 기반으로 계획한 독특한 도시임을 알린다. 제4회 도시건축비엔날레의 주제가 ‘땅의 도시, 땅의 건축’인 이유다.
©Ensamble Studio
©Ensamble Studio
앙상블 스튜디오 안톤 가르시아아브릴, 데보라 메사
칸 테라(메노르카, 2020)
“앙상블 스튜디오가 요즘 강조하는 것은 조화와 균형을 찾는 것, 그리고 지구를 향한 건축이다. 이는 20세기 건축의 기계 중심적인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이다. 문명, 특히 새로운 건축에 대한 도전은 지구와 교감하는 것이어야 한다. 최근 지구온난화와 도시화에서 비롯된 피해가 크다. 건축이 아직 자연과 땅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과 고립되거나 단절되지 않은 건축을,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연을 연결해주는 건축을 연구하고 있다. 사람은 겨울에는 태양 가까이 가고, 여름에는 그늘에 숨거나 바람을 찾아야 한다. 온도, 습도, 빛,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춘 현대건축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었지만 인간성을 빼앗아갔다. 어쩌면 편안함이라는 개념 안에 갇힌 것일지도 모른다. ‘칸 테라’는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건축의 시작이었다. 여기서는 날이 추울 때 난방을 하기보다는 스웨터를 입고 추위에 몸을 적응시켜야 한다. 인간을 통제하기보다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환경과 교류할 것을 제안하는 건축이다.”
©Thomas Harryson
스뇌헤타 체틸 투르센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하우스(오슬로, 2007)
“땅의 건축이라는 용어가 놀랍고 정말 좋다. 이런 표현을 접한 적이 없었다. 이 표현은 지구상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어처럼 느껴진다. 지표면뿐 아니라 그 아래까지도 포함하는 듯하다. 지형, 땅, 물, 강, 숲, 자연 등 모든 것을 다루는 만큼 아주 광범위하지만 꽤 상세한 표현이기도 하다. 맥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여러 건축 작업에서 누락된 것 하나를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바다와 해저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걷는 땅을 다루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 지구의 80%가 바다와 물로 차 있고 물 밑에 많은 땅이 있는데 말이다. 이런 땅의 조건을 우리는 감정적으로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먼저 오슬로의 반도에 있는 부지를 상상해보자. 오슬로는 손가락 모양으로 이뤄진 부두에 세워진 도시다. 모두 이 손가락 끝자락에 건물을 짓기를 바란다. 바다로 뻗어나가는 부두의 끝 말이다. 우리는 부두와 90도 각도를 이루도록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하우스를 배치했다. 3만 년 전 빙하가 녹아 오슬로 피오르가 생겼을 때 90도 각도로 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스뇌헤타는 이런 식으로 교차하는 유형을 상당히 많이 다뤘다. 평면, 대지, 부지, 건축 요소의 상호작용이 드러나지 않는 곳, 건축의 전형적인 수직과 수평에서 벗어나는 곳. 1814년 노르웨이는 건국과 함께 ‘접근의 권리’에 관한 법을 제정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해안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다.
현재 노르웨이에서는 어떤 종류의 해안도 사유화할 수 없다. 자신이 소유한 땅에 다른 사람이 지나가도 막을 수 없다. 사람들이 물가로 가는 것을 방해한다면 말이다. 국가 집단이 법으로 사유재산의 일부를 공공에 제공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서 와요, 당신은 손님입니다. 그러니 제 해변을 사용하세요.’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하우스의 ‘웨이브 월’은 옛 해안선을 따라 만들었다. 공연장은 오슬로 땅에 놓였고, 로비는 물이 있던 곳이다. 건물에 들어오면 마주하는 벽 ‘웨이브 월’은 수면 위에 떠 있는, 노출된 부분은 공공 공간이다. 이를 해석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공공의 일원으로 이 해안선을 좋아해요. 그러니 공공이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봅시다.’ 나는 이 구조물이 노르웨이 정부와 오슬로시가 시민들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본다. 시민들에 대한 공공의 관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걸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못한다. 그걸 알려주는 게 건축가의 책임이고, 예술 기관에는 주어진 역할 이상의 사회적 책임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가 시사하는 바다. 가장 궁극적인 보존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력이다.”
©CHOlon Photography, Elsa Ramirez, Juan Solano
롱기 아키텍츠 루이스 롱기
파차카막 주택(리마, 2008)
“롱기 아키텍츠는 건축에 무대 디자인을 활용한다. 건축을 삶의 무대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유형의 예술적 표현이든 창작 과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그 변화가 무언가를 검증하고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예술은 물질에 정신을 부여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고, 그것이 바로 건축의 가장 큰 장점이다. 내게 땅의 건축이란 자연의 가장 최근 상태, 즉 인간이 자연 속에서 만들어낸 자연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은 여러 세기에 걸쳐 다르게 존재했다. 신이 창조한 자연을 인간이 수백만 년에 걸쳐 변화시킨 것이다. 결국 땅의 건축을 하기 위해 우리는 장소의 규모, 특성을 파악하고 사용자를 이해해야 한다.
또 건축가로서의 본성과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통해 스스로를 인식해야 한다. 파차카막 주택이 자리한 현장을 보았을 때 나는 ‘땅을 거스를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언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그리고 언덕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 집은 문 없이 안과 밖이 아주 잘 연결된다. 잉카 사람들은 문을 쓰지 않았고, 페루에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문이라는 구조를 들여왔다고들 한다. 땅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이 있고, 산을 향하고 있으며, 바다를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보고 싶어서 그런 형태로 건물을 지었다.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땐 전기도, 물도, 사람도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가능하면 현장의 자재를 사용하고, 모든 설계와 시공을 현지 인력과 함께하고자 한다. 차가 없어도 걸어서 올 수 있고, 가급적 에너지를 줄일 수 있도록 말이다.
이 건물은 두 철학자가 은퇴 이후 거주할 집이다. 이들에겐 땅에서 살아가는 것 또한 말년을 잘 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클라이언트의 무덤을 설계했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럴 수도 있다. 예컨대 멕시코 사람들처럼 죽음을 친구로 여긴다면 말이다. 파차카막 주택에서는 땅 밑, 빛, 강한 빛, 다시 땅 밑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집을 빛 안에 묻었다고들 하나 보다. 잉카어로 ‘파차’는 땅을, ‘카막’은 영혼을 뜻한다. 이곳에 자리한 집은 땅의 영혼이다.”
©전명진
아르키움 김인철
히말레스크(네팔, 2013)
“건축이 다른 창작 분야와 차이가 나는 요인은 다름 아닌 땅이다. 건축은 땅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땅은 건축뿐 아니라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절대 조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환경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평야가 아닌 이상, 한국의 땅은 대부분 산맥과 구릉으로부터 이어지며 지형이 형성되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지평선을 기준으로 블루와 그린을 이분화하기보다는 산, 들, 언덕, 계곡 그리고 하늘을 하나의 특정 공간으로 인식한다. 건축을 땅과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르키움은 땅의 이치와 역사를 읽는 것에서부터 설계를 시작한다. 서양이 쌓고 올리는 조적식 건축을 한다면, 우리는 자연이 만들어놓은 공간에 건축을 ‘놓는다’고 할 수 있다. 앞산과 뒷산 같은 자연적 경계까지 확장해서 공간감을 만든다. 서구의 현대건축으로 접근하면 건축의 개념적 형태가 없는 셈이다. 우리는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지 특정 형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축의 목적은 사람이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고, 형태는 그 건축을 위한 공법과 재료에 따른 부수적 결과물일 뿐이다. 무엇보다 건축가의 가장 큰 덕목은 ‘땅을 어떻게 잇는가’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을 갖는 것이다.
히말레스크는 MBC가 KOICA와 함께 진행한 네팔 라디오 방송국 재능 기부 프로젝트였다. 나는 새로운 땅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건축가로서의 기대감 때문에 오지를 가기로 결정했다. 최종 결정권을 건축가에게 달라는 요구도 받아들여졌다. 재밌게도 처음 사이트에 방문하자 지역 주민 대표가 나에게 어느 땅이 적합한지 직접 고르라고 했다. 지적도와 측량도, 정해진 구획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선입견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마을의 구성 원리에 따라 내가 처음 원한 분지와 언덕이 아닌 산기슭으로 결정되었지만, 당시 1년 6개월 동안 비행기를 타고 오가는 동안 히말라야 전경을 보며 서양에서 셈하지 않는 ‘억겁의 시간’이 어떤 환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원오원아키텍츠 최욱
가파도 프로젝트(제주도, 2018)
“서양 건축에서 말하는 경관, 즉 랜드스케이프는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풍경을 뜻한다. 땅, 터, 대지를 읽고자 노력해온 한국 건축에서는 ‘랜드스케이프’보다 ‘그라운드스케이프’라는 말이 적합하다. 여기서 그라운드는 바다와 호수부터 그 안에서 움직이는 미생물, 식생, 물고기까지, 지표면 위에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가파도는 세계적으로 드문 ‘평지 섬’이다. 해수면에서 제일 높은 지점이 20m다. 평지 섬에 가면 섬이 보이지 않고 주변이 보인다. 바다가 보이고, 우리나라 최남단인 마라도가 보이고,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보인다. 경관이 수평적이다. 자연에게는 일종의 무대 같은 섬이다. 가파도는 면적이 30만 평을 넘지 않는다. 섬 전체를 걸어 다닐 수 있기에 그 자체로 커뮤니티가 된다. 육지에서도 가깝다. 생태적으로 잘 복원한다면 중요한 공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원오원아키텍츠가 가파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일 년 열두 달의 풍경이었다. 지표면 풍경, 바다 풍경, 마을 풍경 그리고 생업의 풍경. 그라운드스케이프를 본다는 것은 선형적으로 나열한 이 시간의 풍경을 보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땅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가 만든 것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니다. 콘크리트를 배에 싣고 섬의 섬으로 들어가서 완성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조물이었다. 마을의 생태를 건들지 않고, 낭비를 최소화하고, 노인들이 고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그 시간을 기록하고 보존한 것. 가파도 프로젝트의 가장 큰 차별점은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Mass Studies
매스스터디스 조민석
원불교 원남교당(서울, 2022)
“종교의 역할은 근대화 과정에서 많이 바뀌었다. 원불교가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이미 신에 대한 질문을 한 이후인 20세기 초반에 생겨난 종교라는 것이다. 부처도, 윤회도 믿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도 않는다. 자기 마음을 공부하는, 개인 수양에 가깝다. 원불교를 ‘생활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다. 원불교 원남교당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모토는 ‘막다른 길이 없게, 죽은 공간이 없게(No Dead End, No Dead Space)’였다. 하지만 결국 지형의 고저 차 때문에 서쪽 부분이 미완인 채로 남게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무엇도 하지 않는, 죽어 있는 어떤 곳이 되어야 했는데 지금은 공동으로 쓸 수 있는 공간으로 가꿔지고 있다. 조경가 정영선 선생의 아이디어 덕분이다.
대법당의 모서리 땅에 무척 높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 있는 걸 보시더니 없애면 안 되는 나무라고 일러주었다. 공사 과정이 복잡해졌지만 나무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단절의 연속이었던 이 도시는 이제 지난 세기와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움직여야 한다. 원불교 원남교당은 특히 더 그래야 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나무 심지. 흔하고 냄새 나는 나무인데’라며 이해를 못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를 존중했다. 이 도시 안에서 중요한 위치는 이제 그다지 많이 남지 않았다. 매듭이 꼬여 있는 곳이 많다. 결국 건축이 그 장소에서 시작할 때 잠재성을 드러낼 수 있다. 선물 상자를 열듯 장소의 서사를 애써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게 건축가의 역할이다. 영웅적으로 결과물을 던져놓는 게 아니라 의료진처럼 계속 돌봐야 한다.”
©Adam Mørk
©Adam Mørk
©Adam Mørk
도르테 만드루프 A/S 도르테 만드루프
바덴해 센터(리베, 2017)
“땅을 이해하려면 지형, 형식, 물질뿐 아니라 문화적 관계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간섭이 없는 자연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바덴해 센터를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이었다. 매일 바뀌는 조류와 서식하는 새뿐 아니라 바이킹족 문화와 역사를 이해해야 했다. 건축에 집중하기보다는 땅에 있는 것을 연속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건축가들은 항상 의견을 나누고 숭고한 것을 창조하고자 노력한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가끔 건축물에 감동하는 것이 도리어 사적으로 느껴진다. 어렸을 때는 미숙한 마음에 대중이 건축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지만 바덴해 센터를 설계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이해한 건축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건축은 학술적이고 전문적일 때보다 모두와 소통할 수 있을 때 더 좋다.”
헬렌 비네
〈만드는 것의 친밀함〉(2021)
“건축, 공간, 사진의 관계는 무엇일까? 건축과 건축 사진은 엄연히 다르다. 사진작가로서 건축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일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여전히 건축 사진에 관심이 가는 것은 실재하는 공간과 사진으로 소통한 공간 사이의 차이에 큰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건축의 가장 미묘한 측면을 기록하는 것이 내 작업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지었는지, 어떻게 풍화되었는지, 어떻게 사람에 의해 물들어가는지 알아가고, 찍고 싶다.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나는 항상 땅에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어 카펫의 역사 같은 것. 유목민의 삶에서 카펫은 다른 텐트로 이동할 때 가져가는 유일한 가구였다. 땅과 태양의 관계 또한 내 작업에서 항상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람이 태어나고 움직이고 살고 죽는 터전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땅이라는 존재는 내 작업을 구체화하고 내 생각을 어떤 장소로 안내해준다. 종묘는 땅과의 관계가 독특했다. 건축물은 잊고, 우주를 연상하게 하는 곡선에만 집중하게 됐다. 계단 하나하나에 인간, 시간 그리고 신성한 존재 사이의 관계가 적혀 있는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건축물에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종묘는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병산서원과 소쇄원은 자연에 묻혀 있어서 건물을 구분할 수 없었다. 대나무 길을 걸으며 도시에 대한 모든 고민과 생각을 뒤로하고 자연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다. 건축과 자연의 경계선을 느끼지 못했다. 굉장히 자유롭고 몰입되었다. 건축가 존 헤이덕의 말처럼 건축은 가장 복잡한 형태의 예술이다. 작품의 몸속에 들어가 그것을 소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방문했던 곳들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느리고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멀리서 보아야 하는 멋스러운 것이 아닌 감각을 자극하는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워로필라 징가 엠부프, 니콜라 롱데
NKD 하우스(다카르, 2021)
“세네갈의 다카르는 생긴 지 200년 가까이 된 현대적 도시다. 과거에는 원주민 마을이 밀집했고, 이후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섰다. 그 과정에서 서서히 하이브리드 도시로 변했다. 현재 다카르의 항공사진을 보면 온통 회색이다. 도시 건축에 주로 사용한 재료, 시멘트의 색이다. 세네갈은 시멘트를 둘러싼 경제 규모가 아주 크다. 다들 어떤 식으로든 시멘트 가격을 알고 있다. 해방과 자긍심을 위한 소재나 다름없다. 시멘트로 건물 짓기가 쉬워 보이기도 해서 다들 시멘트공이 되었다. 주거용 건물의 85%가량은 건축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직접 짓는다.
세네갈에서는 신용 대출을 받기가 상당히 힘들어 자금도 직접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건물을 조금씩 지어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일단 땅을 한 필지 사는 것부터 시작한다. 돈이 조금씩 생길 때마다 시멘트를 몇 포대 사고, 물과 모래를 섞어 벽돌을 만든다. 토대를 짓고, 기둥을 올린다. 돈이 더 생길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둘 때도 있다. 건물에 조금씩 늘어난 면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아주 흥미로운 모델이다. 최근 건축계에선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퇴행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큰 퇴보인지 모르는 것 같다. 진정 최신 재료로 건물을 지으면서 전통 건축 체계를 따라 만든 건물처럼 편안한 공간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그래서 우리는 간단한 기술을 활용한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체계에 집중하도록 해방하는 일이다. 인간적인 지식, 몸과 바로 이어지는 재료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건축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다시 연결할 수 있다.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토착 건축물과 그곳에 재료가 쓰이는 방식을 보면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모방하지 않고 현재 삶의 방식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우리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NKD 하우스 같은 건물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다.”
©노경
©노경
네임리스 건축 나은중, 유소래
콘크리트월(제천, 2023)
“콘크리트월의 핵심은 다르게 보이지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 단어로 얘기하면 불이不二. 즉 두 개가 아닌 하나라는 주제 의식이었다. 콘크리트가 과연 돌과 다른가? 콘크리트는 인간이 만든 것이고 돌은 자연이 만든 거다. 그럼 과연 인간은 자연이 아닌가? 자연안에 나무도 있고 돌도 있고 다람쥐도 있고 사람도 있지 않나. 사람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다시 ‘사람이 만든 물질이 과연 자연적이지 않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콘크리트는 인간의 거주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20세기에 만든 것이다. 자연의 물질을 혼합해 인위적으로 물리적 형태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인공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점에 기반을 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만든 무엇은 결국 자연의 일부 안에 녹아든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하게 된다. 그래서 콘크리트월에서는 콘크리트뿐 아니라 돌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고,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했다. 우리는 항상 관계 속에서 핵심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콘크리트 단면에 돌이 노출되네?’, ‘돌이 왜 여기 있지?’ 같은 질문을 하며 진짜와 가짜, 콘크리트와 돌의 본질을 스쳐 지나가듯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 공간이 의미 있지 않을까. 자연과 인공, 진짜와 가짜, 물질과 비물질. 상반된 두 언어에 내재된 어떤 힘의 작용에 대해 묻곤 한다. 콘크리트월 역시 그 질문의 연속이었다. 네임리스 건축은 늘 관계와 경계에 집중한다.”
©Rizvi Hassan
©Rizvi Hassan
리즈비 하산
로힝야 문화 기념 센터(아담푸르, 2022)
“처음 난민 캠프에 갔을 때 우리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보통은 당연히 여기는 것들, 비나 햇볕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할 그늘막이나 씻을 수 있는 화장실을 수백만 명의 난민은 몇 달이나 누리지 못했다. 몇 주 만에 보호소와 위생 시설을 지었다. 몇 년 걸릴 도시의 성장을 2~3개월 만에 이룬 듯했다. 이런 시설 제공에 제동을 거는 제도가 많았다. 예를 들어 난민 시설은 가건물로만 짓게 하는 법률 같은 것. 종종 정부가 난민을 본국으로 송환할 때도 있었다. 난민 캠프에서 태어날 다음 세대가 어떻게 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이 우리를 진정으로 신뢰하며 우정을 쌓자, 한곳에서 얼마나 오래 사는지가 중요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로힝야 문화 기념 센터를 말하며 여전히 장소의 영속성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 센터는 영구적인가, 일시적인가?’ ‘난민들이 여기에 머무르게 만드나„ 떠나고 싶게 만드나?’ ‘이런 상황에서 건축가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일주일, 사흘, 아니 단 하루라 해도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나 또한 로힝야 난민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5년 이상 일한 지금은 다르다. 그들이 대나무를 얼마나 잘 엮을 수 있는지 안다. 자연의 소재로 얼마나 아름답게 작업할 수 있는지도 안다. 난민 캠프에 사는지„ 영구 정착지에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로힝야 문화 기념 센터가 계속 존재할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든,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문화적 규범과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기 때문이다.”
©Open Fabric
오픈패브릭 프란체스코 가로팔로
지중해 이주 지도(지중해, 2022)
“오픈패브릭이 하는 모든 일은 토양에 기반을 두고 있다. 건축학은 대체로 토양의 종류에 대한 질문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토양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다양하고, 어떤 역사가 있는지, 호기심을 갖고 연구한다. 이 지식을 심화하면서 토양을 주인공으로 프로젝트를 전개한다. 제인 허튼의 책 〈Reciprocal Landscapes〉는 랜드스케이프가 소비와 생산이 동시에 이뤄지는 장소라는 것을 일러준다. 예를 들어 내가 조경가로서 나무를 심는다면 이 나무가 어디에서 오는지, 어떻게 자랐는지, 어느 양묘장에서 재배했는지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이 질문을 해결하다 보면 내가 디자인한 길이 200km 떨어진 곳의 양묘장과 상호작용한 풍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픈패브릭의 ‘지중해 이주 지도’는 이런 질문을 유발하며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하도록 하기 위한 초대장이다. 완전한 답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결코 알 수 없고, 알면 안 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땅과 건축, 자율성과 상호 의존성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우리는 완전히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