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다는 것은 항상 시간과 연관이 있다. 잘 숙성된 발효차나 와인은 물론 살림도 그렇다. 조성림·최준범 부부는 도예가의 손으로 빚은 백자 다관에 차를 우리고, 세월을 입은 옻칠 식기에 음식을 담아낸다. 전망 좋은 집에서 매일 쓰임을 다하는 사물은 부부의 시간과 함께 그윽하게 익어가는 중이다.
한강 뷰를 품은 전면 창 외에도 천창이 있어 온종일 환한 빛이 쏟아지는 주방.
신혼집을 위해 주문 제작한 스테인리스 상판과 합판 원목 소재의 아일랜드 식탁은 스탠다드에이 제품. 신혼 때 고심해서 고른 첫 살림을 지금도 잘 관리해 사용하고 있다.
오래 써서 아름다운 나의 살림
이곳의 사물을 덤덤하게 담는 실내 공간은 주로 나무를 사용했다. 인테리어는 거의 바꾼 것이 없다. 바닥, 벽, 창호, 거실의 중심이 되는 대형 책장 모두 원래 있던 것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수리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집 천고가 높아 식탁 위에 달던 펜던트 조명 대신 스탠드형 조명을 새로 구입했고, 흰 바닥이 차가워 보여 카펫을 곳곳에 활용한 정도다. 거실 중앙 식탁과 다용도실에서 사용하는 아일랜드, 커피용품을 올려둔 원목 장식장은 모두 스탠다드에이 제품으로 신혼집에서 고심해 오더메이드한 가구다. 그 밖에도 결혼하면서 구입한 첫 살림을 지금까지 잘 관리해 사용하고 있다. 그동안 모아온 살림살이를 이 집에서 부부의 동선에 맞게 잘 배치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백자에 원형을 둔 이기조 작가의 백자를 모아왔어요. 저는 멋지고 예쁜 것보다는 쓰임이 있는 물건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내게 온 살림을 귀하게 사용하고, 더 오래 함께하려고 잘 관리하면서 소중히 여기게 되고요.” 정성 가득한 맛있는 요리를 좀더 근사하게 차리고 싶어 살림살이를, 그릇을, 공예품을 하나씩 구입했다. 그렇게 모아 온 사랑스러운 살림을 이 집에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근사한 창밖 뷰가 조금 아깝지만, 주방 옆 작은 방은 살림살이를 두는 용도로만 사용한다.
2022년 가을 대만에서 생산한 문산포종차文山包種茶를 내주는 조성림 대표. 낮게 발효시켜 상쾌한 꽃향기가 난다.
주방 상부 수납장에는 손님 접대에 필요한 여러 종류의 차 도구, 찻잔, 물잔을 수납한다.
다양한 국적의 요리에 필요한 향신료들.
“리움 미술관에서 열린 조선백자 전시는 열 번도 넘게 갔어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조선 5백 년의 백자를 한자리에 모은 전시를 언제 또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서요. 일본 오사카에서 온 조선백자 컬렉션을 봤을 때는 속상한 마음도 들었어요. 얼마 전 도쿄 국립박물관 차 도구 전시에서 만난 아름다운 이도다완을 보며 우리 도자기 특유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일본에도 좋은 수공예품이 많지만 한국 작가의 작업은 또 다른 미감이 있는 것 같아요.”
조성림 대표는 정보 기술 경영을 전공하고 스물여섯 살에 대기업에 입사했다. 이토록 식문화를 즐기게 된 것은 그때부터다. 주말이면 좋은 레스토랑과 카페를 찾아다니고, 쿠킹클래스를 수강하며 직접 요리를 배웠다. 그런 경험이 아까워 개인 블로그에 기록했다. 그러다 이걸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여덟 살에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에서 따온 ‘리미’라는 요리 사이트를 만들었다. 2011년에는 <도쿄 카페 여행 바이블>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지금은 서울에도 좋은 곳이 많지만, 당시 도쿄는 투어를 다닐 만큼 카페 문화가 번성하던 시기였다. “지금 가장 빠르게, 또 감각적으로 변화하는 서울에 비하면 도쿄는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을 때도 있어요. 굉장히 섬세하지만 한편으로 고집스럽죠. 지난 주말에도 도쿄에 다녀왔는데 지인들과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누군가는 그게 발목을 잡는다고 하지만 저는 바로 그 때문에 도쿄가 좋은 것 같아요.”
김유상의 하늘빛이 담긴 푸른 도자기와 허명욱 작가의 검은 옻칠 테이블이 놓인 거실 풍경.
식기를 보관하는 원목 수납장 위에 올려둔 커피와 차 도구.
와인 바스켓은 박미경 작가의 작품. 특유의 섬세함으로 커틀러리 차 도구 같은 일상 사물을 옻칠, 금속 작업으로 선보인다.
공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개, 옻칠, 금속, 도예 등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공예가 이토록 주목받은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장인의 반열에 오른 작가도 있지만, 전통 방식을 새롭게 해석하는 젊은 작가나 공예가의 활동도 활발하다. 깨진 그릇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긴쓰키, 다도 문화의 저변 확산 역시 공예품의 가치를 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조성림 씨는 바로 이런 문화가 소비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요즘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는 이상기후와 날씨를 보며 환경을 보존하는 지속 가능성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브랜드 행사나 팝업 전시가 끝나면 나오는 각종 폐기물을 보며 반짝 이목을 끄는 화제성이 아닌 의미와 경험을 전달하는 조금 다른 방식의 마케팅에 대해서도 고심하고 있다.
한강 뷰가 펼쳐지는 건식 욕실. 유리, 돌, 나무로 마감한 내부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침실의 가장 전망 좋은 창가 자리에 좌식 공간을 두고 부부만의 작은 차실을 만들었다.
조성림 대표는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는 것 외에도 라이프 스타일 커뮤니티&숍 월WOL(@wol.co.kr)을 5년째 운영 중이다. 직접 써보니 너무 좋아서 일본 니가타현 산조 지방에 위치한 3대 장인의 식칼 공방 다타후시에서 만든 수제 칼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기조 작가의 백자, 김동희 작가의 와인 잔, 박미경 작가의 옻칠 젓가락은 소비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월이 잘 만든 좋은 물건을 사용하고 나누는 커뮤니티가 되기를 바란다. 8월에는 히로코 하타노의 유리공예전과 여름 차회 전시를 계획하고 있고, 삼청점과 더불어 지속적이고 상시적으로 소비자와 만나는 월 한남점을 오픈할 예정이다.
“장인 정신이 깃든 물건을 좋아해요. 나무, 도자기, 옻칠처럼 쓸수록 기품이 쌓여가는 것 말이예요. 제가 월을 통해 소개하고 싶은 것도 그런 것이에요. 유행과 감각이 아닌, 만드는 사람의 내공이 선명한 물건들이요. 언젠가 도쿄 한 호텔에서 장인이 만든 물건으로 방 하나를 채운 전시를 본 적이 있어요. 한참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의 집과 살림살이도 사람의 손으로 빚고 깎고 매만진 것으로 하나씩 채워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