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다는 것은 항상 시간과 연관이 있다. 잘 숙성된 발효차나 와인은 물론 살림도 그렇다. 조성림·최준범 부부는 도예가의 손으로 빚은 백자 다관에 차를 우리고, 세월을 입은 옻칠 식기에 음식을 담아낸다. 전망 좋은 집에서 매일 쓰임을 다하는 사물은 부부의 시간과 함께 그윽하게 익어가는 중이다.
사다리에 올라야 닿을 수 있는 높다란 전면 책장에는 그동안 부엌장에 넣어 보관하던 도자기, 유리, 금속, 대나무 공예품을 몇 점씩 꺼내두었다.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자리한 전망 좋은 빌라. 한옥 창호를 닮은 고풍스러운 중문을 열고 들어서니 압도적인 한강 뷰가 펼쳐진다. 동호대교를 시원하게 품은 한강 조망을 눈앞에서 마주하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눈부시게 환한 빛으로 물든 담담한 원목 식탁 앞에 차 한 잔 두고 앉았다. 금속 차받침을 받쳐 든 손가락이 시원해진다. 매끄러운 백자 잔에 담긴 황금빛 청차를 꿀꺽 삼키니 이마 위로 서늘한 바람이 휘 지나가는 것 같다. 싱그럽고 달큼하다. 평화롭기만 한 창밖 풍경 때문인지, 가지런히 놓인 다양한 공예 기물 덕분인지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눈이 편안하다. 흰 벽과 따뜻한 목재로 마감한 내부는 다정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진다. 공간 속에는 금속, 목재, 유리, 도자기, 재료 본연의 미감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사물 하나하나가 존재감을 발한다.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 풍경. 기존 집에서 사용하던 펜던트 조명은 주방으로 옮겨 달고, 스탠드형을 식탁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전망 좋은 한남동 빌라는 디지털 마케팅 대행사 ‘마이테이블’ 조성림 대표와 남편 최준범 씨 부부의 세 번째 집이다. 상하이에서 지낸 2년을 제외하고는 줄곧 아파트에 살았다. 두 번째 집이던 논현동 아파트에는 단지 전체에 몇 집만 허용된 서비스 공간 같은 미니 정원이 있었다. 베란다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로 정말 작았는데, 친구들을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열곤 했다. 필요한 요리 도구와 그릇을 준비하고 허브를 키울 작은 텃밭도 만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조성림 대표가 아파트가 아닌 공간에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게 된 건. 원래 살던 논현동, 삼성동 일대 빌라를 알아보다 성북동, 청운동 쪽으로 넘어왔다. 한 지인의 소개로 남산과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버티고개 쪽도 둘러봤다. 아파트만 아니면 된다는 기준으로 지역에 상관없이 서울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운명처럼 만나게 된 한남동 빌라. 사무실로 사용했다는 이 집을 보는 순간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거실에서 오른쪽 복도를 따라 나란히 자리한 침실과 욕실. 복도 끝 창 너머로 한남대교가 보인다.
주방과 거실은 벽으로 구분했지만, 문이 없는 열린 구조로 아파트와는 사뭇 다르다. 벽, 바닥, 창호, 붙박이장은 원래 것을 살려 가구조명·살림살이를 동선에 맞게 배치했다.
전망 좋은 술맛 나는 집
“이 집을 처음 만난 날도 오늘처럼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었어요. 원래 집을 볼 때 부동산에서 단점은 얘기 안 해주잖아요. 근데 주차가 까다롭대요. 집을 보러 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남편한테 그랬어요. 이 집은 안 되겠다. 근데 주방과 거실을 잇는 탁 트인 전망을 보는 순간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어요. 친구들과 모여 놀기 좋은 술맛 나는 곳이라는 걸 직감했죠. 이런 뷰는 흔치 않잖아요.(웃음)”
초여름에 입주해 다시 여름의 문턱에 이르렀다. 보기 드문 천창이 있어서 사계절 내내 눈부시게 환한 주방은 여름엔 유리온실처럼 덥다. 파노라마 한강 뷰가 펼쳐지는 각 방에는 아파트의 그것만큼 수납공간이 충분치 않다. 좁고 경사진 주차장에 차를 넣고 뺄 때는 여전히 애를 먹는 중이다. 아파트에 비하면 참 불편한 게 많다. 하지만 이 불편을 모두 상쇄할 정도로 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아졌다. 아주 작은 바비큐 공간 하나가 집에 대한 부부의 생각을 바꿔놓은 것처럼 집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경험하게 되었으니까.
전망이 가장 좋은 창가에 부부를 위한 티 테이블을 마련한 침실.
나무살과 한지로 마감한 문, 창은 집 안 곳곳의 공예품과 어우러진다.
“거의 주말마다 친구들을 불렀어요. 지난 연말에는 여덟 번쯤 파티를 했나 봐요.(웃음) 내향형인 남편도 저랑 사느라 많이 달라졌죠. 좋은 술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나누는 걸 좋아해요. 가끔 제가 요리와 파티를 즐기는 이유가 그릇과 도구 쓰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어요. 더 아름답게 담고 싶어서 도자기나 공예품을 모으게 되었거든요.(웃음)”
이곳의 해 질 녘 풍경을 상상해본다. 어스름한 저녁에 하나 둘 켜지는 불빛으로 물들어가는 한강의 야경, 함께 나누고 싶어 아껴둔 술과 정성스레 만든 음식, 그리고 오랜 친구들과의 편안하고 즐거운 담소로 가득한 공간. 부부가 가장 좋아한다는 손님이 모두 돌아간 늦은 저녁, 소파에 앉아 있는 고요한 시간도 함께 떠올려본다. 그곳에는 오늘의 시간을 기억하는, 부부와 오랫동안 함께 해온 사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