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곳곳에 수많은 스테이가 난립하는 요즘, 다른 곳과 구분 짓는 차별화 요소는 결국 그곳의 주인에게서 나온다. 개연성도 필연성도, 가치와 이야기도. 자연에서 편안한 기쁨을 느끼는 김남수 대표가 백에이어소시에이츠 안광일, 박솔하 대표와 지은 춘천 의림여관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지금처럼 깊고 담백할 것이다.
남쪽으로 너른 야산이 펼쳐지는 의림여관 전망. 이 야산을 온전히 보고 누리는 쪽으로 설계를 진행했다. 이제 곧 봄이 무르익으면 울창한 초목이 나지막한 집을 에워싼다.사진 김재윤
번아웃은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한 길목이 되기도 한다. 컴퓨터 사업과 게임 제작 관련 사업 등을 하며 쉼 없이 달려오다 보니 더 이상은 뭔가를 계속할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다. 김남수 대표는 도시에서 치열하게 버티며 살아가는 힘을 ‘성공력’이라 불렀다. “저희 부부는 성공력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아내는 대기업에서 약 10년간 일했는데, 어느새 몸이 ‘종합병원’이 되어 있더라고요. 이렇게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릴 것도 아니고 이제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처음 둥지를 튼 곳은 강원도 홍천이었다. 삶의 수단은 스테이였다. 자연 속에서 푹 쉬는 것이 그가 “좋아한다”고 가장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었다. 몸을 쓰고 싶던 걸까? 8~9개월 동안 거의 혼자 목수 역할을 하며 공사를 마무리했다. “중국에서 만든 9만 원짜리 목재 커팅기로 아침 7시부터 해 질 녘까지 일을 했어요. 다시는 안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또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나더라고요.(웃음)”
침실을 단이 있는 평상형으로 구획해 낮과 밤의 시간이 절로 구분되는 구조. 침대 매트리스에 등을 기대고 창밖의 숲을 오랫동안 봤다.
두 번째 집의 부지로 선택한 곳은 춘천의 의암리. 마을 끝자락인 데다 남쪽으로 야산이 펼쳐져 “여기다!” 했다. 숲이 있는 그쪽으로 창을 내면 되겠다 싶었다. 스터디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수많은 건축가 중 손을 내민 곳은 백에이어소시에이츠의 안광일, 박솔하 대표였다. 설계를 했다, 디자인을 했다고 드러내지 않는 담담함을 오래전부터 눈여겨봐왔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백에이어소시에이츠를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건축·디자인사무소의 홈페이지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100A라는 이름은 우리가 추구하는 디자인 철학이다. 100은 百과 白, 두 가지의 뜻을 합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천지의 모든 이치라는 의미를 상징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천지의 모든 것이라는 구절이 특히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천지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면 그만큼 마디마디에 정성을 기울일 것이다. 그렇게 완성한 결과물은 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아도취에 빠질 일이 없다. 지금 40세 미만, 비교적 풍요로운 사회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빈곤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자랑하고픈 욕망이 약하다고 하던데 올해 40 언저리에 있는 이 百 白 두 건축가에게도 그런 결이 있었다.
김남수 대표 가족이 생활하는 거실 공간. 집과 숙박동이 일자로 길게 붙어 있으며, 창문 너머로는 야산이 고즈넉하게 펼쳐진다.
이곳을 찾는 나그네가 잠시나마 느긋하길!
“멋있는 거 싫다, 화려한 외관도 싫다”
설계를 부탁하며 김남수 대표가 한 말은 이랬다. “멋있는 거 싫어요. 이 땅이 보이는 공간이면 됩니다. 남쪽으로 야산이 있으니 그쪽으로 창을 내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의 구체적인 말은 보태지 않았다. 그 말들이 다 ‘족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 “돈이 많지 않아요. 시공은 제가 ‘직영’으로 하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깜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아니, 골조 잡는 일이며 목공, 배관 등 그 힘든 일을 어떻게 직접 한다는 말인가. 백에이어소시에이츠 측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화를 하고 집 짓기를 시작하면서 “이분, 보통 사람 아니다. 분명 인테리어업계에 계시던 분이다” 하고 이야기했다고. “건축주 뒤에 있는 이야기를 많이 생각했어요. 다 접고 도시를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회와 도시에서 받은 상처 같은 것을 어떻게 보듬을 수 있을까?” 그렇게 ‘열린 단절’이 키워드로 나왔다. 김남수 대표의 생각도 그렇게 설계를 짜는 데 쐐기를 박았다. “한국은 밖으로 보이는 게 중요하잖아요. 외관을 근사하게 꾸미고, 창도 바깥을 향해 멋지게 배치하고. 그런데 집에 들어와서는 커튼을 치지요. 온전히 쉬고 싶으니까요.”
완성된 결과물이 궁금할 텐데 요약하면 이렇다. 우선 외관. 1682m2(약 5백 평) 규모의 너른 대지에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커다란 매스 두 개가 가로로 반듯하게 놓여 있다. 한쪽에서 보면 힘 있는 직선이다. 표면 정리는 부러 하지 않았다. 김남수 대표와 안광일 소장은 이 콘크리트 매스를 그냥 ‘돌’이라고 불렀다. 창문은 집 건물 한쪽에만 작게 내고 숙박동은 과감히 막았다. 바깥에서 보면 거대한 직사각 매스 두 개가 나란히 이어진 모양새라 용도를 알려주지 않으면 어떤 건물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공사를 하는 동안 “안에서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시설물이 마을에 들어섰다”며 민원이 발생했다고. 이장님도 이런 건물을 지으면 어떡하냐고 한 소리 했지만, 지금은 “마을에 이런 유명한 건물이 있어서 참 좋다”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노출 콘크리트에 유일하게 더한 외장재는 적갈색 컬러가 매력적인 열연 철판이다. 철 부산물로 만드는 재료라 온전한 철판보다는 가격이 저렴한 데다 세월과 함께 부식되는 몸체가 멋스럽고, 무엇보다 콘크리트와 합일을 이루어도 전혀 밀리는 구석 없이 당당하다.
야산이기도, 숲이기도 한 남쪽 풍경을 향해 활짝 열린 내부 마당. 아침에 나가 있으면 짹짹 새소리가 활기차다.
욕실 역시 돌담과 숲이 보이는 쪽으로 배치했다. 남향이라 아침부터 빛이 일렁일렁 기분 좋게 비춘다.
열연 철판은 바닥에도 일직선으로 길게 깔려 있다. 일명 캐리어 로드. 짐 가방을 끌고 가는 길인데, 손님도 마을 고양이들도 모두 그곳으로만 걷는 모습이 재미있다. 외관에 두 가지 이상의 재료를 사용하면 되레 힘도 빠지고 번잡스러워진다. 3이 완성의 숫자라는 건 적어도 건축에서는 예외다. 묵직하고 무덤덤한 외관과 달리 내부는 정연하고 따뜻하다. 착색하지 않은, 천연 색깔의 나왕 합판을 벽과 천장에 빙 둘렀다. 침대는 나무로 짠 평상 위에 올렸고, 그 앞에는 차茶 도구를 올린 2인용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욕실 너머로는 숲 안쪽이 소담하게 펼쳐진다. 객실 옆으로 공간을 따로 빼 마련한 부엌도 인상적이다. 하이라이트는 내부 마당. 가로로 널찍한 모양새로, 바닥에는 마사토를 깔고 이끼 낀 너럭바위 하나만 툭 올려놓았다. 아침, 덱 위 의자에 앉아 있으면 숲에서 새소리가 활기차다. 정원수는 키 작은 목련과 벚나무만 한 그루씩. 공사하며 나온 작은 돌로는 초등학교 1학년생 키 높이의 돌담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
객실 바로 옆으로 따로 만든 부엌. 모든 가구는 보리공방에서 맞춤 제작했다.
노출 콘크리트와 열연 철판만으로 마감한 외관. 깊고 무던한 힘이 느껴진다.
돌담 너머로는 김남수 대표가 이 땅을 산 이유와 목적이기도 한 야산의 풍경이 펼쳐진다. 모두 이곳에 오는 ‘나그네’가 마음 편히 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율한 디자인이다. 안광일 건축가는 “이곳에 와서 보니 디자인적 장치가 필요 없는 곳이더라고요. 디자인 요소를 최대한 덜어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라고 했다. “애써 자연을 품어 안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말도 여운으로 남았다. 건축가는 별로 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최소한의 것만 한 그 결정이 실은 크게 한 일이고 그것 역시 아주 적절했다는 확신이 든다. 외관은 20년이 지나도 질리지 않을 만큼 중심이 꽉 잡혀 있고, 내부는 가만 앉아보는 것만으로 절로 마음이 편해지는 공간. 동료인 박솔하 건축가가 이곳에 머물며 운 적이 있다던데, 그 의식과 감정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서운 것 하나가 ‘살던 속도’이다. 도시에서 바쁘게 살던 사람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면서도 그 속도의 관성을 끊지 못하고 여전히 치열하게 산다. 나부터도 그렇다. 어쩌면 그렇지 않아 보이는 김남수 대표도 그럴지 모른다. 자명한 것은 그게 삶이고 우리는 모두 일생의 방랑자라는 것. 의림여관懿林旅館은 ‘아름다운 숲속 나그네의 집’이란 뜻이다.
백에이어소시에이츠(100a.kr)는 안광일, 박솔하 대표가 이끄는 부티크 건축사무소. 건축설계 뿐 아니라 시공, 인테리어와 가구 디자인까지 ‘논스톱’으로 해결한다. 두 대표가 17년간 호흡을 맞춰오고 있다는 것도 든든한 지점. 문과 성향인 박솔하 소장이 무형의 개념과 가치를 잡는 데 능하다면, 이과 성향인 안광일 소장은 예산에 맞춘 최적의 배분과 구현에 강하다. 드러내고 자랑하지 않아 더 힘 있고 근사한 건축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