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4월 7일부터 7월 9일까지 94일간 열리는 제14회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과연 올봄 광주에서는 어떠한 예술이 꽃피우게 될까?
베티 머플러, ‘나라를 치유하다’, Photo: 뱅상 지리에 뒤푸르니에, © 베티 머플러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아주 혹독한 근대화를 거쳤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눈 한국전쟁,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이들이 독재 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항쟁까지. 그때의 상처를 아직 안고 사는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와 무기로 무장하고 거침없이 투쟁에 뛰어든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기념하는 자리를 만들어오고 있다. 광주비엔날레 역시 그런 자리 가운데 하나다. 우리를 생채기 낸 상처를 기억하고, 또 불합리함과 억압에 맞서 자유를 위해 싸운 그 시대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마련됐다. 나아가 예술 비엔날레인 만큼 광주비엔날레는 여기에만 안주하지 않고 이를 발전시켜 범지구적인 큐레이팅 담론의 자리로서 그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해왔다.
크리스틴 선 킴, ‘모든 삶의 기표’, Photo: 주디트 버스, © 크리스틴 선 킴
물처럼 부드럽고 여린 우리
올해는 영국의 테이트 모던 국제 미술 수석 큐레이터인 이숙경 예술감독을 필두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라는 주제를 내건 전시를 마련했다. 이는 이 감독이 어릴 때 접했던 <도덕경>에 등장하는 어구인 ‘유약어수’에서 차용한 것으로, ‘강한 것을 이겨내는 것은 약해 보이는 물’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 주제 아래 분열과 차이를 포용하는 힘에 대한 이야기를 펼칠 예정이다. “지난 3년은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 환경오염, 인종차별, 전쟁 등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위기의 시대를 실감한 시기였습니다. 큐레이터로서 미술은 이런 위기 순간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렸습니다. 이제는 예술의 고장이 된 광주라는 지역은 부드럽고 예술적인 이미지 아래 강한 정의감과 용감한 저항 정신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라는 산문적인 제목 아래 오늘날 세계 곳곳의 다른 미술관들이 광주의 정신과 어떻게 공명할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이숙경 예술감독. Photo: 최옥수
이 감독은 이번 전시에 이른바 ‘광주 정신’을 녹여내고, 흔히 ‘중심 vs. 주변’으로 인식하는 관계를 전환하며 평등하게 연결해 더 나은 인류 공동체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여기서 그는 그간 큐레이터로서 지속해서 고민해온 ‘탈국가적 큐레이팅과 수평적 관계성’이라는 큐레이팅 방법론 개념을 참여 작가들과 함께 톺아볼 계획이다. “이 개념을 통해 성별뿐 아니라 국적이나 문화적으로 한쪽이 우수하고 다른 한쪽은 열등하다는 편견을 없애보고자 합니다. 인류 공동체라는 개념 또한 전 지구적 위기 앞에서 인류가 하나라는 점을 인정하면 그 해결책 역시 함께 연대의 방식을 통해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광주는 대체로 우리에게는 ‘특정 지역’이자,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곳이라는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인식되곤 하는데, 이숙경 감독은 앞서 언급한 탈국가적 시선으로 전개하는 큐레이팅과 수평적인 관계성을 통해 이러한 우리의 인식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것이 전환될 수 있는지 등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캄포스-폰스, ‘그때 여자아이들은 놀고 있었다’, © 마리아 막달레나 캄포스-폰스, 샌프란시스코 웬디 노리스 갤러리
솝힙 피치, ‘춤’, © 솝힙 피치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
이번 비엔날레에는 한국 작가 김구림, 김기라, 김순기, 이건용, 이승택, 홍이현숙, 정재철 등을 포함해 중국, 캄보디아, 호주, 일본, 태국, 스코틀랜드, 독일 등 전 세계 총 79명의 작가가 라인업에 이름을 올려 주제에 맞춰 작업한 각자의 작품을 선보인다. 광주비엔날레 측에서는 이 중에서 꼭 봐야 할 작품 20여 점을 꼽았다. 계급, 젠더, 문화 교류, 디지털 정체성 같은 개념을 탐구하는 영국계 가나 작가인 래리 아치암퐁Larry Achiampong의 ‘성유물함Reliquary 2’와 시각예술가이자 안무가, 치료사인 엘살바도르 작가 과달루페 마라비야Guadalupe Maravilla의 ‘질병 투척기–등에 거울을 달고 가르랑거리는 괴물Disease Thrower–Purring Monster with a Mirror on Its Back’, 억압받고 소외된 소수 집단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작업으로 옮긴 일본 작가 마윤키키Mayunkiki의 ‘SINUYE: 아이누 여성을 위한 문신Tattoos for Ainu Women’, 한국 작가 엄정순과 윤준수, 캄보디아 작가 솝힙 피치Sopheap Pich, 태국 작가 타이키 삭피싯Taiki Sakpisit 등 회화부터 영상, 사진, 설치까지 다양한 작품이 선정되었다.
과달루페 마라비야, ‘질병 투척기-등에 거울을 달고 가르랑거리는 괴물’,Photo: JSP 아트 포토그래피
엄정순과 윤준수, ‘방 안의 코끼리-달리의 코끼리(우주 탐사에서 돌아온 코끼리)’,© 엄정순과 윤준수
“사회적 현안을 진단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는 이숙경 예술감독. 예술은 사회를 반추하는 거울이기도 한데, 이는 곧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차별, 억압, 불평등 같은 문제를 수면 위로 올려 담론의 장을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는 오늘날 문화와 예술을 존재하게 한 역사 및 전통과의 연결로 전시의 시간적 영역을 확장합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는 다른 도시,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현대미술가의 작품이 광주 역사와 어떻게 공명하는지 볼 수 있을 겁니다”라며 광주에서 펼쳐지는 비엔날레에 대한 관람객의 기대를 당부했다. 주 전시장을 비롯해 국립광주박물관, 무각사,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예술공간 집 등 광주 구시가지와 양림동, 상무지구 등 다양한 지역에 있는 외부 전시장을 골고루 사용하기 때문에 하루 만에 비엔날레를 다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숙경 감독은 ‘광주’라는 도시를 천천히 유영한다는 생각으로 여행 계획을 세워, 앞서 소개한 전시 주제와 의도, 참여 작가의 면면을 생각하며 전시 공간에 함께 놓인 작품 설명을 자세히 읽고 감상할 것을 추천한다. 그는 “작가가 무슨 의도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지 생각해보면, 공감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지역과 예술, 그리고 이를 한데 엮는 큐레이팅의 힘에 대해 새삼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자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