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9일과 10일, 가로수길 하이스트리트 이탈리아에 디자인 인사들이 모였다. 매년 열리는 디자인 교류의 장, 세계 이탈리아 디자인의 날이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거리를 떠올릴 때 꼭 포함되는 베스파, 와인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아는 알레시의 와인 오프너, 심지어 악마도 입는다는 프라다까지. 이탈리아 디자인은 하나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제7회 ‘세계 이탈리아 디자인의 날’은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주요 국가의 수도에 방문해 자신의 철학과 관점, 디자인 트렌드를 교류하는 행사다. 한국에서도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주한 이탈리아 무역관, 주한 이탈리아 문화원 공동 주최로 행사를 열고 있다. 올해의 주제는 ‘빛을 밝히는 품질: 사람과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에너지’. 막스마라의 루이지 마라모티 회장과 피닌파리나사의 파올로 피닌파리나 회장 등 이탈리아와 한국의 디자인계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동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인 환경보호와 지속 가능성을 주요 화두로 디자이너들의 통찰이 담긴 메시지가 행사장을 메웠다.
올해 한국 홍보대사로 위촉된 이코 밀리오레Ico Migliore는 황금 콤파스상(Compasso d’Oro)을 세 차례 수상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디자인 교육자로 현재 밀라노 폴리테크니코 대학교수이자 부산 동서대학교 석좌교수다. 마라 세르베토Mara Servetto와 25년째 밀리오레+세르베토Migliore+Servetto 스튜디오를 운영 중인 이코 밀리오레는 강연 중 스승이자 멘토였던 아킬레 카스틸리오니가 자신에게 선물한 자가발전 손전등을 참석자들에게 보여줬다. “최대한의 지속 가능성은 이 손전등처럼 자가발전이 가능해야 한다. 완전한 지속 가능성은 성취할 수 있다. 약간의 고통과 노력을 감내한다면 말이다.” 주한 이탈리아 대사 페데리코 파일라Federico Failla와 이코 밀리오레에게 이탈리아 디자인의 정신에 대해 물었다.
페데리코 파일라
주한 이탈리아 대사
“디자인은 소수만을 위한 화려한 것, 값비싼 제품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중이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디자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탈리아의 디자인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사물을 디자인할 때 그 사물이 놓이는 환경까지 고려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 말이지요. 이러한 태도는 자연스럽게 인간과 자연의 상생,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자세로 연결됩니다. 이번 세계 이탈리아 디자인의 날을 통해 디자인 공정에서의 품질, 생산의 기본 요소인 에너지, 현대사회의 필수 가치가 된 지속 가능성, 마지막으로 인간의 삶에 빛을 밝혀 풍요롭게 만드는 철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디자인을 논하려 합니다.”
이코 밀리오레
밀리오레+세르베토 스튜디오 공동 대표
“비물질인 빛과 시간을 살아 있는 에너지로 대하고, 이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스튜디오를 설립한 지 25년이 지났다. 무엇이 변했고, 또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초창기와 비교해 규모가 커졌다. 현재 스튜디오에 근무하는 30여 명의 동료들은 모두 다양한 나라에서 왔고 물론 한국인 동료도 있다. 함께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마라 세르베토의 경우도 도쿄 조시비 미술대학에서 오랫동안 디자인을 가르쳤고, 나 또한 밀라노와 부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클라이언트의 국적도 각양각색이다. 이처럼 일하는 환경, 규모, 동료의 변화가 있지만 디자이너로서 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일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경청하는 것. 상대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사람뿐 아니라 사물도 마찬가지다. 오늘 내 강연의 제목이 ‘빛을 듣기(Listen to the Light)’인 것처럼.
빛은 당신의 작업에서 언제나 중요한 요소다.
내 스승이자 멘토였던 아킬레 카스틸리오니에게 배운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빛에 관한 것이다. 빛은 우리가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나 다름없다. 공간의 훌륭한 드라마투르기dramaturgie•를 완성하는 것도 빛이다. 환희, 격렬함을 담아내는 스타디움과 슬픔, 여운을 감상하는 영화관 사이의 가장 큰 차이도 결국 빛이 아닌가? 가령 조명을 만든다면 이런 고민에서부터 시작한다. 빛에 어떤 이야기를 부여할 것인가? 또 이 조명이 어떻게 공간 안에서 둥지를 틀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비물질인 빛과 시간을 살아 있는 에너지로 대하고, 이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희곡에서 극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기술.
부산을 비롯해 다양한 도시 디자인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부산의 블루라인파크 프로젝트는 바다와 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선을 만들고, 이를 활용해 선형 광장을 만드는 멋진 프로젝트였다. 또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광장에 있는 ‘휴먼 세이프티 넷Human Safety Net’ 재단 건물의 내부를 디자인했다.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리뉴얼한 이 건축물은 본래 16세기에 지은 것으로 일반 대중은 출입할 수 없는 닫힌 행정 공간이었다. 이 공간을 유리, 구리, 나무 등 베네치아에서 구할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하고 현지의 장인들, 사회적 기업 등과 함께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지금은 대중에게 항상 개방되어 있는 카페, 코워킹 스페이스, 이벤트 룸 등으로 운영 중이다.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때 진행한 ‘토리노 도시 재생 프로젝트’도 있다. 꾸준히 도시 프로젝트에 참여해온 이유가 있을까?
나는 공공 프로젝트를 꽤 좋아한다. 그리고 공공의 영역을 공동주택처럼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마주치는 거리, 모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공원이나 광장은 또 다른 집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들이 방 한 칸, 건물 하나에 갇히지 않고 바깥에 ‘진짜 집’이 존재한다고 여길 수 있길 바란다. 우리는 지금 전쟁, 경제 위기, 기후변화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나눔의 가치’가 더욱 중요한 때다. 나는 여성, 유색 인종, 성 소수자를 포함한 전 세계 인구의 ‘평범한’ 80%를 위해 디자인하고 싶다. 나에게 디자인이란 민주적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이자 사회 혁신의 도구다.
이러한 철학과 태도를 유지하며 오랫동안 디자이너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나 같은 디자이너는 여러 사람과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기 때문에 르네상스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다양한 재능이 요구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하나다.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 당신과 지금 대화하는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말을 자주 하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창작은 그저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내 바깥에 있는 것들을 내면으로 수용하며 이 과정에서 믹싱하는 것이 창작이다. 사무실에서 문 닫고 혼자 틀어박혀 모니터와 씨름해봤자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나가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자신만의 시선을 유지하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면 여러 생각과 단어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집하게 된다. 이것을 내게 맞춰 새롭게 정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