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성과를 내기도 한다. 공간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 작은 공간은 오픈 플랜 방식으로 구성해야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방은 사방이 막혀 있어야 한다, 조리대와 수납장은 클수록 좋다 등의 공식 대신 단순한 마감과 레이아웃으로 건축적 순환을 구현한 작은 연립. 현관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콘크리트 기둥을 품고 있는 하얀 벽을 마주한다.
인왕산 수성계곡의 정취를 품은 오래된 연립을 레노베이션해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문성환·고진영 부부와 반려견 뽀야. 이사한 지 두 달째 접어든 집은 이제 막 공사를 마친 듯 생활의 분주함이 묻지 않았다.
오픈 서재의 한쪽 벽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주방 너머 창밖까지 바라보인다.
현관 중문으로 들어서면 콘크리트 기둥과 하얀 벽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두 개의 기둥, 열일곱 개의 문으로 그린 여백
“전에 살던 아파트는 현관으로 들어서면 거실, 주방, 침실이 한눈에 펼쳐졌어요. 시각적으로 구획이 나눠지지 않으니 오히려 용도가 뒤섞여 공간 본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죠. 작은 집이지만 공간과 공간 사이 물리적 거리감을 느낄 수 있도록 ‘숨어 있는 미로’ 같은 복도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어요.”레노베이션은 언젠가 집을 고친다면 함께 작업해보고 싶던 샤우 스튜디오에 맡겼다. 약 가로 6m, 세로 9m 평면의 58.8m2 연립주택은 세 개의 방과 주방·거실로 구성, 꼭대기 층 천장은 박공 구조로 노출되어 있었다. 박창욱 실장은 기존 방과 방 사이의 조적벽을 해체한 뒤 다시 가벽을 세워 방 속의 방 형식 오픈 서재를 구성했다.
“레이아웃은 아주 단순해요. 집을 삼등분한 뒤 3분의 1 존에 침실·라운지·주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나머지 3분의 2 존에 거실과 박스 형태의 서재를 구성했죠. 서재를 벽에서 띄어 배치했을 뿐인데 사방으로 통로가 생기면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시각적·물리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물론 전체적으로 순환 구조가 완성됐죠.”박공 천장 아래, 집의 가운데 자리한 서재는 천장이 뚫려 개방적 공간감을 선사한다. ㄱ자로 세운 가벽은 반대편 두 면에 슬라이딩 도어를 구성해 문을 닫으면 독립적 공간이 된다. 필요에 따라 문을 완전히 개방하면 주방 너머의 뷰를 내다볼 수 있는 유연함이 관전 포인트다.
다이닝 테이블 뒤편으로 보이는 벽부 조명은 샤우 스튜디오에서 공간에 맞춰 최대한 미니멀한 디자인과 소재로 제작했다.
슬라이딩 도어, 붙박이 가구 등 대부분의 나무 소재는 나왕 합판을 사용해 내구성과 경제성은 물론 시각적 간결함, 정서적 따뜻함을 모두 만족시킨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거실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날개벽과 중문을 설치했다.
가벽과 슬라이딩 도어로 구성한 서재.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면 독립된 공간이 되지만, 천장이 오픈돼 완전히 단절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 집의 특징 중 하나가 ‘문’이에요. 방과 방 사이의 통로는 물론, 공간을 구분 짓는 벽체까지 모두 열일곱 개의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했어요. 슬라이딩 도어의 가장 큰 장점은 문을 열고 닫는 것에 따라 공간에 다채로운 레이어를 만들어준다는 점이에요. 침실과 주방 사이 작은 라운지 공간은 침실과 복도 쪽 문을 모두 닫으면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고요하게 차 한잔하기 좋아요. 반대로 복도 쪽 문을 열면 거실까지 탁 트인 뷰를 즐길 수 있고요.”박창욱 실장은 부부의 두 번째 요청 사항이던 주방 분리 역시 슬라이딩 도어로 해결했다. 일자형 조리대를 등지고 보일러실과 세탁실, 냉장고를 나란히 배치한 주방은 식기세척기나 세탁기를 돌리거나 정리가 안 됐을 때 문을 닫아두면 편리하다. “주방에서 폭 60cm의 복도를 지나 펼쳐지는 탁 트인 거실의 공간감이나, 주방에서 화장실을 향할 때 마주하는 기둥과 천장 보의 건축적 구조 같은, 늘 새롭고 낯선 뷰 포인트 덕분에 남편도 저도 매일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에요. 말 그대로 숨어 있는 비밀의 미로를 찾는 즐거움이 있죠.”
심플하게 산다
결혼 후 줄곧 한남동 아파트에서 살던 결혼 10년 차 부부 문성환·고진영 씨가 살림을 줄여 인왕산 자락의 작은 연립주택으로 이사한 것은 ‘대안적 삶’에 대한 일종의 실험이기도 하다. “남편도 저도 서촌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남편 직장이 너무 멀어서 그동안은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올해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삶의 전환점이 필요했고, 물리적으로 공간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했죠. 저희 부부에게 결혼이 첫 번째 프로젝트였다면, 이번 이사가 두 번째 프로젝트예요.”
한남동에서 플라워 스튜디오 ‘러브이즈인디에어’를 운영하는 고진영 씨 역시 집과 일터가 분리되는 온&오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언젠가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자급자족하는 삶을 꿈꾸는 부부에게 숲 뷰의 오래된 연립주택은 좋은 대안이었다.“인왕산 수성계곡이 바로 옆이어서 그런지 도시 안이지만 시골에서 사는 느낌도 들어요. 해 질 무렵이면 골목에서 아이들 소리도 많이 들리고, 창문을 열어놓으면 집집마다밥 짓는 냄새도 솔솔 올라와요. 반면 차 소리, 경적 소리 등 도시 소음은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고요하고요. 한남동이 젊은 사람들을 위한 동네였다면, 이곳은 남녀노소 각각의 문화가 소외되지 않고 모두 공존하죠. 경복궁 너머 산세를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올 때 편안함과 안도감이 느껴져요.”
노출 콘크리트 기둥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천장의 보 구조가 건축적 묘미를 선사한다. 큐브를 중심으로 거실-주방라운지-침실-거실이 순환하는 구조.
서재에서 바라본 주방. 주방 바닥은 버건디 컬러 리놀륨으로 포인트를 줬다.
침실과 연결된 라운지(다용도 공간)는 창 밖의 숲 뷰를 즐길 수 있다.
다이닝 테이블에서 바라본 거실. 사이드보드와 TV, 소파 등 기존에 사용하던 가구 중 최소한으로 들였다.
화이트와 그레이 컬러 톤의 인테리어와 통일감을 준 욕실. 작은 욕실이지만 샤워 부스를 따로 설치했다.
대안적 삶의 실험에는 소비와 소유에 관한 태도도 포함된다. 집을 둘러보면 거실을 제외하고는 가구가 거의 없다. 결혼할 때 구입한 빈티지 다이닝 테이블과 사이드보드를 그대로 쓰고, 안방은 침대를 없애고 좌식으로 목화솜 요를 깔고 잔다. 침실과 주방 사이 다용도 공간은 아직 마음에 드는 라운지체어를 찾지 못해 비워뒀는데, 비우니 오히려 창밖 풍경에 집중하게 된다. 화장대는 화장실 옆 수납장으로 대체하고, 조명은 최대한 미니멀한 소재와 디자인으로 샤우 스튜디오에서 직접 제작했다.“월급을 담보로 대출을 많이 받고 싶지 않았어요. 굳이 공간이 넓을 필요도 없고요. 예전 아파트는 방이 세 개였는데 결국 사용하는 방은 하나고, 나머지 방은 창고로 쓰게 되더라고요. 이사하면서 공간에 맞춰 짐을 줄이다 보니 오히려 중요한 게 뭔지 집중하게 됐어요. 좋은 것은 남기되,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 물건에 휘둘리지 않으니 공간은 물론 재충전 시간까지 온전히 누리는 기분이에요.”
샤우 스튜디오 박창욱, 송대철 디자이너는 패셔너블하고 트렌디한 디자인 대신 단순하되, 비례와 균형미를 갖춘 무無 디자인을 추구한다. 나왕 합판, 노출 콘크리트, 전통 살문의 조합이 시그너처로 수납 가구, 조명뿐 아니라 스위치와 문손잡이, 수도꼭지까지 직접 디자인해 작업의 완성도를 높인다. 대표 작업으로는 대학로 동화빌딩 리뉴얼, 바톤 오피스, 필동 팩토리 등이 있으며, 아파트 같지 않은 아파트 인테리어로 고유한 팬덤이 있다.
디자인 및 시공 샤우 스튜디오(www.shawoo.co.kr, 02-2272-25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