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오르면 도착하는, 인왕산 바로 아래 연립에 ‘할아버지 취향’을 지닌 젊은 남자가 산다. 오래된 가구와 포근한 패브릭으로 꾸민 공간은 정말 할아버지 집에 놀러 갔을 때처럼 가쁜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그의 애정을 듬뿍 받은 식물들과 옹기종기 둘러앉아 아침 햇살을 만끽한 시간.
유상경씨는 식물과 동고동락한다. 페르시안 카펫이 깔린 거실에 앉아 식물 농장에서 가져온 명자나무의 가지를 어떻게 다듬을지 고민 중이다.
유상경 씨 집에서는 창밖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드리 나무가 보이고, 이쪽저쪽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매일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내릴 것을 각오하고도 이곳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살펴본 유상경 씨는 오래되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 자연에서 몇 시간 산책해도 주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느라 지루할 틈 없는 사람, 그리고 식물 변화에서 인생의 진리를 곱씹어볼 정도로 식물에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별명이 ‘할아버지’인 것도 이해가 갔다. “작가 헤밍웨이를 좋아해요. 집을 꾸밀 때도 ‘헤밍웨이가 이 공간에서 지낸다면 어떻게 꾸밀까?’ 하는 상상을 했어요. 그분이 살던 집을 찾아보니 에스닉한 패턴의 패브릭과 타일로 공간에 매력을 더하고, 거친 질감의 빈티지 가구도 많이 수집했더라고요. 그 이미지를 제 방식대로 해석해봤죠. 카펫·담요·레이스 커튼 등 다양한 패브릭으로 아늑한 느낌을 주고, 황학동에서 찾은 오래된 사방탁자를 들였어요. 헤밍웨이가 한국에 살았다면 분명 한국 고가구의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았을까요?”
유상경 씨는 자신의 성향과 오래된 연립주택의 특성, 동네 분위기에 맞춰 집을 소박하고 편안하게 꾸몄다.
황학동에서 산 1970년대 사방탁자와 학재스민. 얼마 전까지 강한 향을 내뿜던 학재스민은 다음 계절을 준비하며 꽃을 떨구는 중이다.
서촌 사는 헤밍웨이의 집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고양이는 헤밍웨이의 글 쓰는 시간을 방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헤밍웨이는 고양이를 좋아했고, 한 평생 동고동락했다. 요즘 유상경 씨에게는 식물이 그런 존재가 되고 있다. 처음에는 집을 꾸미기 위해 식물을 들였는데, 새순이 자라나고 보살피지 않으면 시드는 모습을 보며 함께 살아 숨 쉬는 존재라 여기기 시작했다. 식물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 수형을 다듬고 어울리는 화분을 골라 심는 식물 디자인도 직접 해보고 있다. 최근에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을 안겨준 식물은 학재스민. “작은 꽃에서 번지는 꼬릿하면서 진한 향기가 집 안을 가득 채웠어요. 이 향이 영원하면 좋겠지만, 꽃이 지고 향이 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다음 겨울에도 학재스민꽃을 보려면 주변 환경을 고스란히 느끼며 계절의 변화에 반응할 수 있도록 강하게 키워야 한대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요. 너무 순탄하게만 살면 극적으로 멋진 순간이 생기기는 어려울 거예요. 앞으로 어려운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학재스민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으려 해요.”
인테리어에 전혀 관심이 없던 유상경 씨의 예전 모습을 아는 친구들은 침실의 레이스 커튼을 보며 놀라기도 한다. 그는 집을 꾸미며 취향을 발견하고 있다.
향수병 앞에 놓인 나무 스틱은 팔로산토 스머지 스틱. 유상경 씨가 좋아하는 인센스를 소개하고자 만든 브랜드 뭍(@nnut.kr)에서 판매 중이다.
그는 얼마 전 퇴사를 하고 자신의 식물 브랜드를 펼칠 공간을 준비 중이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안정적인 생활이 지속되자, 앞으로의 날들이 그려지며 속이 텅 빈 기분이 들었다고. “도전적인 상황에 저를 몰아넣는 중이지만, 불안해하거나 조급해하지는 않으려고요. 강인하게 버텨내다가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새순을 틔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식물의 호흡에서 배운 마음가짐이에요.” 평소 집 주변 수성동 계곡을 산책하며 자연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는 유상경 씨. 집 안팎으로 식물과 함께하며 익숙해진 느릿한 리듬은 그의 삶에 중심이 되어준다.
유상경 씨의 손길이 닿은 ‘동거 식물’
식물의 변화에 따라 하루의 기분이 결정된다는 유상경 씨. 활짝 핀 표정으로 함께 사는 식물 식구를 소개해주었다. 그가 직접 다듬고, 옮겨와 심으며 디자인한 식물들.
직접 빚은 도자기 화분
도자기 클래스에서 직접 빚은 화분에 분재를 만들었습니다. 청색이 돌아 오래된 느낌을 주는 갈색 화분에는 석화회를 심고, 검은 돌을 드문드문 배치했어요. 북한산과 나무가 서 있는 풍경처럼 보이죠? 그리고 검은 흙으로 만든 화분에는 석국을 심었어요. 대나무를 닮은 식물이라 묵직한 색감이 어울릴 것 같았지요.
나만의 느낌을 살린 제라늄
제라늄은 보통 풍성하게 키우는데, 저는 모양이 예쁜 한 줄기만 남겨 화분에 다시 심어봤어요. 한쪽으로 향한 수형에 맞춰서 화분의 정중앙보다는 바깥쪽으로 치우치게 심어 공간감을 주었지요.
분재에 사용할 이끼
분재를 만들 때 조금씩 덜어 사용하려고 따로 생이끼를 기르고 있어요. 어제만 해도 없던 이끼의 삭蒴(포자낭)이 돋아났네요. 봄이 되면서 식물들도 활기가 돌고 날로 기운이 좋아져요. 식물을 보면서 저도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데, 이건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크나큰 기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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