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무역 시대에 아프리카인을 태워 이송한 노예선에 관한 기록.
공포 영화 중에서 신체가 변형되는 내용으로 전개되는 장르를 보디 호러body horror라 한다. 살인마가 무자비하게 난도질과 학살을 저지르는 내용의 공포물이 아니라, 갖가지 이유로 사람의 몸이 비틀어지거나, 다른 생명체의 유입으로 변이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파리(The Fly)〉(1986), 존 카펜터 감독의 〈더 씽(The Thing)〉(1982)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서양 타이포그래피에도 여러 이유로 글꼴을 변형시킨 사례가 많다. 보디 호러 영화처럼 피비린내가 진동하지는 않지만, 글자 형태를 비틀거나, 납작하게 찌부러뜨리거나, 쪼개고 합쳐 만든 서체다. 공포 영화와 다름없는 일명 ‘보디 텍스트 호러’다.
이탤릭체는 정체를 비틀어서 기울인 모습의 서체를 말한다. 15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 서체 조각가 프란체스코 그리포Francesco Griffo의 손에서 탄생했다. 오늘날에는 본문과 은근하게 구분하고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하지만 사실 이탤릭체는 효율과 실용을 위해 만든 서체다. 주어진 페이지 안에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텍스트를 조판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다. 즉 경제적 측면의 고려에서 나온 변형체다. 글자를 경사지게 만들어 촘촘하게 디자인하면 실제로 상당한 양의 텍스트를 조판할 수 있다. 1700년대 화물칸에 차곡차곡 물건을 쌓듯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싣고 대서양을 가로지른 노예선이 연상된다. 글자를 억지로 꾸역꾸역 채워넣은 이탤릭체와 사뭇 닮은 모습이다.
프란체스코 그리포가 시도한 현존하는 최초의 이탤릭체 적용 예시.
이탤릭체처럼 ‘은근한 강조’를 위해 사용하는 소대문자small caps는 대문자를 소문자 높이만큼 줄인 글자다. 이는 남미 아마존 어느 부족이 적이나 범죄자의 머리를 실제보다 작은 크기의 전리품으로 만들어 장신구처럼 하고 다니는, 일명 쪼그라든 머리인 ‘차루타마’를 연상시킨다. 차루타마는 크기를 줄이면서도 얼굴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두피를 잡아당겨 만든다. 소대문자 역시 단순하게 크기만 줄일 경우 글자의 획이 같이 가늘어지기 때문에 줄어든 크기에 맞게 대문자를 다시 그려야 한다. 이렇게 소대문자를 만드는 일은 아마존 부족의 오싹한 장신구를 만드는 일과 닮은 구석이 있다.
한편 과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지를 찢어 목숨을 끊는 끔찍한 형벌이 존재했다. 조선 시대에는 죄인의 몸을 갈기갈기 찢고 절단하는 능지처사凌遲處死가 있었고, 유럽 중세 시대에는 사람의 발을 묶은 채 말이 질질 끌고 다니게 하며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 ‘드로운 앤드 쿼티드drawn and quartered’가 있었다. 타이포그래피에도 이처럼 잔혹한 관습이 존재한다. 바로 단어 끊기hyphenation다. 조판을 하다 글줄의 여백이 마지막 단어보다 모자랄 경우 무자비하게 단어를 절단해 다음 글줄로 넘기는 것을 말한다. 이런 단어 끊기의 방법과 기준은 언어권마다, 그리고 편집자마다 다르다. 예컨대 영문은 하이픈(–)으로 절단된 부위를 표시하고 국문에서는 그냥 둔다. 단어 끊기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 있다. 읽는 데 방해된다는 이유로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고, 고른 조판을 위해 필연적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각 주장에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수십 년간 찬반이 오갔다. 그러나 북 디자이너에게 단어 끊기는 고른 본문 조판을 위한 필요악이다. 둘 사이에 절충안은 없다.
(왼쪽) 갓주크. (오른쪽) 대문자 A를 소문자 크기로 줄여 만든 소대문자.
가장 놀라움을 금치 못할 서양 타이포그래피의 ‘만행’은 바로 합자ligature다. 이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몸의 일부를 꿰매고 합쳐 완전히 새로운 인격체를 만들고자 한 것처럼 두 글자를 융합해 하나의 글자로 만드는 일이다. 이를테면 ae, ta, oe, ff 등이 있다. 때때로 합자의 두 글자를 잇는 줄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주로 장식적 요소로 사용하는 갓주크 gadzook다. 어원 역시 오싹하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 때 사용한 못을 칭하는 ‘가츠 훅god’s hooks’에서 유래했다. 합자는 납활자로 식자하던 시절 2개의 식자를 한 번에 조판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도록 고안한 변형체다. 대표적인 합자가 e와 t를 꿰맨 앰퍼샌드 ‘&’다. 이 외에도 텍스트를 잘 조판하기 위해 서체가 견뎌내야 했던 수모는 더 존재한다. 고르게 짜여진 텍스트를 접하게 된다면 잠시 고개를 숙여 보다 나은 가독성을 위해 희생된 무고한 글자들을 기리며 침묵의 시간을 갖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