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인 사람이 모이는 ‘집 밖의 집’을 표방하는 유럽 멤버십 클럽 소호하우스 디렉터 크리스 글래스Chris Glass에게 집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활짝 열린 공간이다. 독일 베를린 소호하우스 가까이에 위치한 그의 아파트는 늘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대면 만남은 줄었지만, 집 안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고 세상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다.
베를린 중심지 미테 지역에 위치한 그의 아파트 거실. 팬데믹 상황 전 그는 1년 중 반 이상을 베를린 집이 아닌 유럽 내 소호하우스에서 보냈다. 최근 오랜 시간 집에 머물면서 집을 재정비하고 거실을 일터이자 랜선 파티 장소로 꾸몄다. 정면에 놓인 가죽 소파는 브라질 가구 디자이너 제앙 질롱Jean Gillon 빈티지 작품, 왼쪽은 덴마크 가구 메이커 소렌 빌라센Sören Willoadsen과 크리스티안 베델 Christian Vedel이 만든 1960년 빈티지 암체어, 리네로제 빈티지 토고 소파, 메종 장상의 커피 테이블 등을 놓았다. 선반에는 그의 취향과 일에 대한 열정을 짐작할 수 있는 물건이 가득하다.
부엌에는 키 높이에 맞도록 빈티지 나무 선반을 따로 구입해 직접 달았다. 손이 닿는 곳에는 모로코와 터키에서 주로 구입한 그릇과 부엌 기구를 두고, 천장과 가까운 곳에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예술 작품을 놓았다. 뾰족한 가시 모양이 인상적인 진 로제 파리의 꽃병, 수공예 브랜드 파올라 시Paola C의 다양한 소품을 배치했다. 요 반 노르덴Jo Van Norden의 콘솔 위에 걸린 그림은 아티스트 어니 반스Ernie Barnes의 작품.
크리스 글래스는 8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 내부를 최근에 새롭게 단장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재택근무가 일상화되고 모든 만남을 영상으로 하면서 거실 공간을 TV 토크쇼 세트장처럼 만든 것이다. 여러 개 테이블 조각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 메종 장상Maison Jansen 커피 테이블, 리네로제 토고Togo 소파, 여러 방향으로 각도 조절이 가능한 빈티지 조명을 설치하고, 방에 있던 책과 오브제를 모두 거실로 옮겨놓거나 선반 위에 멋지게 배치했다. 다이닝 테이블에 카메라를 올려놓으면 거실 전체가 화면에 담긴다. 그는 줌 미팅이 있을 때마다 새롭게 바뀐 거실을 보여주며 최근에 구입한 아트 작가의 작품이 얼마나 흥미로 운지, 인테리어 소품이 집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설명한다. 집 자랑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잠시 유보된 소호하우스공간 디자인을 의논하는 것이다. 물건은 대부분 2009년부터 함께 인연을 맺은 소호하우스 인테리어와 관련이 있다. 그는 세계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소호하우스 오픈식에 참석할 때마다 각 나라에서 아트 공예품과 책을 구입했다. 선반 위 가지런히 배열한 물건에는 지구 한 바퀴를 돌고도 남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집 안 곳곳마다 마치 야외와 연결된 듯 푸른 컬러가 생생한 잎을 꽃병에 담아놓았다. 반려동물처럼 반려식물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
치아가 보일 정도로 활짝 웃는 미소가 멋진, 소호하우스 유럽 멤버십 디렉터이자 개인적으로 APTM 공간을 운영하는 크리스 글래스. 그의 집은 언제나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언택트 시대가 될수록 사람은 귀한 재산이 되고, 두터운 인간관계가 치료약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람뿐
크리스 글래스는 인맥왕으로 통한다. 베를린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 ‘인싸력’을 지닌 인물. 2009년부터 창의적인 사람이 모이는 사교 클럽 소호하우스 유럽 멤버십 디렉터로 일하면서 쌓은 네트워크와 경험은 물론, 아파트를 개조한 이벤트 공간 ‘APTM’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예술ㆍ문화 이벤트를 직접 기획했기 때문이다. 그의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그는 어떻게든 손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 그에게 사람과 만나는 것은 잠자는 일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의 아파트가 혼자 사는 남자의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거실과 다이닝 공간이 넓고 항상 깨끗이 정돈되어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집에서 음식을 대접하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세상에 문을 두드리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사적으로 운영하는 공간 APTM 또한 ‘사람을 만나는 장소(a place to meet)’란 의미로, 아파트 공간을 개조한 그의 또 다른 집이다.
“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집을 코로나19가 한순간에 정적 상태로 만들었죠. 항상 대형 솥에다 요리를 했는데, 갑자기 1인분만 준비하려니 장 보는 것도 ‘멘붕’이 오더라고요.(웃음) 사람을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저희 집은 항상 활짝 열려 있어요. 여전히 답은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집에서 사람과 교류하고,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했죠.”
베를린 테이블 전문 브랜드 뮈지무Muesiemue의 테이블, 디자이너 한스 웨그너Hans Wegner의 위시본Wishbone 체어, 건축가 장 프루베Jean Prouve의 빈티지 조명으로 꾸민 다이닝 공간. 홈 파티를 열거나 적적한 밤이 찾아오면 홈 바로 변신한다.
그의 아파트로 올라 가는 계단. 1900년대 클래식한 수공예 디자인을 그대로 살려 개조했다.
거실에서 여는 랜선 홈 파티
그는 줌 영상 미팅 프로그램을 이용해 ‘베를린에서 열리는 홈 파티’라는 이름의 채팅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 주제에 맞게 신중하게 사람을 골라 초대장을 보낸다. 이메일로 온 초대장을 승낙하면 파티 콘셉트에 따라 새롭게 단장한 그의 거실이 등장한다. 그는 테이블 위에 차린 음식과 와인을 즐기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빈티지 수납장 안에 감춰둔 각종 알코올과 칵테일 키트를 보물처럼 공개한다. 비법 칵테일 레시피와 함께 말이다. “수많은 모임을 주최하면서 터득한 노하우는 환경이 절대적이라는 거예요. 환경에는 사람도 포함되지만 장소 또한 중요하죠. 집처럼 무조건 편안해서도 안 돼요. 약간 긴장되면서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물건이 가득한 장소가 좋죠. ‘이건 무슨 물건인가요?’라는 질문과 함께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으니까요. 내성적인 사람도 엉뚱한 질문에는 적극적으로 발언해요. 제 단골 질문은 이것이에요. ‘저희 집에서 훔치고 싶은 물건은 무엇인가요?’”
작품에 적힌 “I DID IT MY WAY(나는 내 마음대로 살기로 했다)”라는 문구는 그의 인생 명언이기도 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루비 아네미크Ruby Anemic의 작품.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 포르나세티Fornasetti, 해리 앨런Harry Allen 등의 세라믹 작품과 나란히 두었다.
덴마크 가구 메이커 소렌 빌라센과 크리스티안 베델이 만든 1960년 빈티지 암체어. 낮은 중심점과 팔 받침대의 곡선 덕분에 편안한 착석감을 느낄 수 있다.
언더그라운드 클럽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아티스트 토마스 마르코Thomas Marco의 네온 작품. 벽에 걸린 그릇은 모두 포르나세티 제품.
랜선을 통한 만남은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고개를 젓는다. 오히려 불편한 만남이 줄고 공통분모가 확실한 사람끼리 지역, 인종, 나이에 관계없이 만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언택트untact’란 ‘접촉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접촉하는 방법을 바꾼다’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 또 비대면 관계에서는 인내심과 공감 능력이 필수. 상대방을 위해 쉽게 설명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렇게 ‘불편한 상황’을 이겨내면 ‘확실한 관계’가 된다. 그는 이번 주말 싱글 라이프를 주제로 영상을 통해 터키ㆍ영국ㆍ프랑스 등에서 혼자 살고 있는 친구들을 자신의 거실로 초대하고, 실제로도 집에서 소규모 대면 모임을 할 예정이라 말한다. “세상에는 많은 정보가 있지만 사람에게 듣는 이야기만큼 싱싱한 날것은 없어요. 천천히 소화하면서 흡수해야 하는 영양분 있는 말이 오가죠. 무엇보다 사람은 감정이라는 밥을 먹고 성장해야 합니다. 희로애락의 순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충돌로 만들어지죠.”
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을 일부러 더 어두운 컬러 페인트로 칠하고, 지하 갤러리 같은 분위기를 냈다. 보치Bocci 조명 아래 걸려 있는 흑백 컬러로 짜 맞춘 액자 그림은 독일 밖 여러 나라의 거리를 다니면서 구입한 작품이다.
사람의 피부, 손 등 육체를 연상시키는 루비 아네미크의 작품이 놓인 욕실.
사람과 세상과 교류하는 장소
크리스 글래스는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안락한 집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테리어를 할 때 참고한 것은 세계 각국의 부티크 호텔이다. 소호하우스(특히 이스탄불 지점을 참고했다), 모로코 마라케시 엘펜El Fenn 호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도르프Dorp 호텔을 유심히 보았다. 그래서 그의 집은 보헤미안, 키치, 럭셔리 등 다양한 내러티브가 한꺼번에 느껴진다. “창이 있는 거실과 침실 외에 다른 공간에는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요. 그런데 이런 공간엔 일부러 더 어두운 페인트로 칠해 묵직한 분위기를 더했죠. 붉은 조명을 매치한 예술 작품에 불이 켜지면 마치 클럽에 온 듯한 느낌이 나요.”
가장 공들여 꾸민 공간은 침실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침대 너머까지 비추는 핑크 벽이 인상적인 곳. 그는 창가에 러그를 깔고 빈티지 책상과 최근에 구입한 디자이너 조나단 애들러Jonathan Adler의 도라 마르Dora Maar 콘크리트 플랜터concrete planter를 배치했다. 거실 내 소파 공간이 타인을 위한 일터라면, 침대 옆 책상 공간은 사적인 일터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세상과 접촉하는 자리이기도 해요. 대형 아치형 창문을 마주하고 있어 집 안에서 발코니 역할을 하죠. 저희 집이 미테 지역 중에서도 갤러리 거리에 위치해 창문 너머로 다양한 아티스트가 지나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어요. 그들의 패션 스타일에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겨울에는 커튼을 쳐요. 부드러운 커튼막을 통해 우울한 볕이 중화되면서 따뜻한 기운을 발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거든요. 밖이 보이지 않아도 소리와 촉감으로 바깥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상상하는 재미가 크지요.” 그의 집은 세상과 언제든지 접촉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 준비된 장소다. 어디든지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얼굴ㆍ손ㆍ몸 모양을 한 조각품이나 수공예 물건 처럼 인간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디자이너 세르주 무이Serge Mouille의 빈티지 조명이 매달린 침실. 그가 좋아하는 연보라 컬러 페인트로 꾸미고 아틀리에 하우스만Atelier Haussmann의 철제 설치 작품, 손으로 찰흙을 빚어 만든 수공예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카탈루냐Catalunya 세라믹 도기 조명을 첨가했다. 플라워 디자인이 새겨진 빈티지 침대 시트는 우즈베키스탄 여행길에 구입했다. 가장 최근 구입한 조나단 애들러의 도라 마르 플랜트 홀더를 창가에 놓았다.
덴마크 가구 제작업체 오만 윤 뫼벨파브리크Omann Jun Møbelfabrik에서 만든 빈티지 데스크는 그의 사적인 일터이자 명상 장소다.
그는 소호하우스를 부유한 계층이 모이는 비싼 사교 클럽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경계한다. 본래 사교 클럽에서 출발했지만 이곳의 혜택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것. 돈과 명예보다 창의력과 가능성이 부자인 사람이 머무는 집 밖의 집이다. 이스탄불 소호하우스의 경우 재능있는 젊은이들에게 회원권을 무료로 지급하는 장학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청년 비즈니스 지원 프로그램을 클럽 내에서 열고 있다. 팬데믹 상황에도 소호하우스는 문을 닫지 않고 철저히 위생 수칙과 내부 인원 제한을 지키면서 모임을 후원하는 중이다. 코로나19 상황도 마찬가지예요. 서로가 서로의 보호막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커피숍에서 마스크가 찢겨 난감해하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손님이 웃으며 선뜻 자신의 새 마스크를 건네 주더군요. 사람을 위한 당연한 일이라고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