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현지 시간으로 2020년 12월 8일 오전 6시 30분. 91세 생일을 앞둔 마거릿 키넌 할머니가 지구인 최초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을 공식 접종했다. “이 백신은 내게 최고의 생일 선물이에요. 새해를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겨줬으니까요.” 마거릿 할머니의 인터뷰 장면이 흘러나오는 BBC 뉴스 생방송에서 보건부 장관 맷 행콕은 “과학과 인간의 독창성의 승리”라고 감격해하며 급기야 눈물까지 흘렸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리 귀에 팍팍 박혔지만, 영국은 70개 허브 병원에서 80세 이상 환자에게 화이자 백신을 접종하는 걸 제일 먼저 승인한 나라다. 캐나다,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멕시코가 뒤를 이었고, 미국은 백신 긴급 승인의 결정권자인 FDA 국장에게 사표 압박 카드까지 꺼내며 이 릴레이에 뛰어들었다. 외신에 따르면 몇 주내에 유럽연합 역시 백신 접종을 승인할 것이라 한다. 아무리 속도를 낸다 해도 해를 넘길 거라는 백신 개발과 접종에 세계 최강국들이 깃발 꽂기에 나선 건 최악을 거듭하고 있는 코로나19 상황 때문이다. 미국만 예로 들면 12월 8일까지 확진자 1천5백만 명, 하루 사망자가 3천명에 가까운 상황이 계속되는 중이다.
이제 백신의 시간이 도래했으니 한숨 돌리게 될까? 아쉽지만 전문가들의 희망과 우려는 쌍무지개처럼 겹치는 중이다. 우선 장기적 효과와 독성, 안전성까지 검토해야 하므로 보통 개발하는 데 5~7년 걸린다는 백신을 10개월 만에 뚝딱 만든 셈이니 곳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다행스러운 건 아직까지 심각하게 보고된 이상 반응은 없다는 것. 짧지만 개발 과정에서 확인한 효능도 꽤 높은 편이다. 또 하나 넘어야 할 건 ‘집단면역’이라는 허들이다. 우선순위를 정해 백신을 접종한다고 해도 마스크를 벗을 만한 결과를 얻으려면 나라마다 인구의 70% 정도가 백신을 맞아야 하고. 수개월 동안 기다려야 한다.
미국을 예로 들면 2억 3천만 명이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얘기다. 굳이 미국을 예로 드는 건 백신 접종과 관련한 가장 난감한 이슈가 숨은 나라이기 때문. 얼마 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백신을 맞겠다는 응답이 47%, 맞지 않겠다는 응답이 26%로 나왔는데, 그 배경에는 거대 제약사의 음모로 만들었다는 뿌리깊은 ‘백신 음모론’이 꺼지지 않는 군불처럼 자리한다. ‘백신의 시간’이 감염병 확산을 막을 결정적 카드라는데 동의한다면 시야를 넓힐 필요도 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건 긴급하고 응급한 상황에서 자국 국민을 보호하려는 백신 전쟁의 서막이다.
오죽하면 마스크와 백신 따위와는 담을 쌓은 것처럼 굴던 트럼프 대통령까지 나섰을까. 문제는 코로나19가 전 지구적 상황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지금까지만 보면, 지구 인구의 14% 를 차지하는 부자 나라가 전체 백신 물량의 53%를 확보했다. 전 국민에게 3회 접종이 가능한 물량이다. 반면 70개 저개발 국가는 열 명 중 한 명만 맞을 수 있는 백신을 확보했다. 이들 나라에서는 코로나19 방역의 전위에 있는 필수 요원조차 백신을 맞을 확률이 낮다. WHO를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연대해, 전 세계 인구의 20%에게 공평하게 백신을 접종하자고 호소하는 건 이 때문이다. 몇몇 힘 있는 국가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종식선언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당장의 백신인 건 맞다. 값싸고 안전한 백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공동운명체인 전 지구인을 위한 효과적 백신 연대이다. 조금 더디더라도 그것만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와 결별하는 가장 나은 방법일 테니까.
문일완은 <바자> <GQ> <루엘> <엘라서울> 등 독자층이 제각각인 패션 잡지, 남성 잡지, 라이프스타일 잡지를 넘나드는 바람에 무규칙한 문법이 몸에 밴 전직 잡지쟁이다. 그래픽 노블을 모으고 읽는 것, 아무 골목길이나 들어가 기웃거리는 게 요즘 취미 생활. 칼럼니스트로 여러 지면에 글을 쓰느라 끙끙대고, 사춘기 코스프레 중인 딸과 아웅다웅하며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