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바라보며 차 한잔, 빗소리 들으며 차 한잔. 자연을 벗하며 살고 싶다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이순옥 씨는 밀양 산자락에 자그마한 집 한 채를 지었다. 툇마루와 쪽마루, 누마루를 품은 한옥 연연재燕然齋에서 그는 자신만의 풍류를 누리며 산다.

이순옥 씨가 은퇴 후 자연을 벗 삼아 살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지은 집 연연재. 사진 속 누마루는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논밭을 지나 밀양 청도면의 골짜기로 들어서면 산자락에 폭 파묻힌 마을이 나타난다. 저수지가 있고, 계곡이 흐르며, 경사진 땅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에도 산세가 겹겹이 포개어진 동네. 소음도 인적도 드문 고요한 이곳에 이순옥·양창열 씨 부부의 세컨드 하우스 연연재가 자리한다.

원할 때면 언제 어디서든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실내에는 평상을, 바깥에는 누마루를 마련했다.

침대를 선호하는 이순옥 씨를 위한 안방과 구들장이 로망이던 남편 양창열 씨를 위한 사랑방.

침대를 선호하는 이순옥 씨를 위한 안방과 구들장이 로망이던 남편 양창열 씨를 위한 사랑방.
옛 선비들은 생의 마지막에 머물 집을 작고 소박하게 지었다. 선비의 집은 세 칸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삼간지제三間之制’처럼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집 한 채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연연재 역시 그러한 마음에서 출발했다. “전업주부로 살다가 마흔 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사회복지학을 공부했어요. 이후 학교에서 상담사로 일하다 지난해 12월 퇴직하면서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은퇴하면 자연 속에 집을 짓고 살고 싶어 꼬박 10년을 준비한 일이었지요.” 그의 꿈은 어린 시절 기와집에서 살던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여름이면 시원한 대청에서 낮잠을 자고, 마당에서 뛰어놀던 추억. 오래된 향수를 차곡차곡 모아 은퇴 후에 머물 집을 준비했다. 마을과 살짝 떨어져 있으면서 드문드문 집이 있는 이 시골 동네에서 주변이 조용하고 산세가 아름다운 지금의 땅을 발견했고, 은퇴 시기에 맞춰 오랜 계획을 실현해줄 건축가를 찾아 나섰다.

다락에서는 기도나 명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집을 지을 마음을 먹고 책과 방송을 보다 보니 가온건축의 두 소장님이 눈에 들어왔어요. 요즘의 삶에 맞게 재해석한 집이 마음에 들었고, 두 분이 쓴 책을 읽으면서 점점 더 팬이 되었죠.(웃음) 상담을 받으러 서울에 갔는데, 이야기를 나누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했습니다.” 노은주 소장 또한 이순옥 씨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크게 원하는 것이 없고, 욕심 없이 작게 짓되 디자인은 좋았으면 한다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달라고 했어요. 계약을 한 후 찾아간 땅도 건축주와 닮은 인상이었어요. 마을로 들어가는 길도 잘 나 있고, 산과 작은 저수지, 계곡을 끼고 있는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였습니다. 산자락에는 비구니 스님이 머무는 아늑한 절도 있었고요. 좋은 땅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누마루 선반을 가득 채운 차 도구들. 오전에는 녹차, 오후에는 황차, 저녁에는 보이차를 마신다.

대청 개념으로 설계한 거실. 평상과 다락 등 여러 공간감을 계획했다. 다락은 내려다보는 맛이 시원해 부러 열어두었다.

산세에 둘러싸여 자연의 일부로 녹아드는 풍경이 연연재의 백미다.
서양식 목구조로 구현한 한옥의 정서
노은주·임형남 소장은 건축주를 닮은 소박한 모습으로 주변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집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고즈넉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전통 한옥 대신 서양식 목구조를 택했다. 구조와 재료는 현대의 방식을 따르되 공간은 한옥의 정서를 품도록 한 것이다. “요즘 한옥은 재료만 전통 방식을 따르고, 평면은 아파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이 집은 반대입니다. 구조는 서양식이지만 공간에서 느끼는 정서는 한옥에 가깝도록 설계했어요.” 노은주 소장이 말하는 한옥의 가장 큰 장점은 어디서든 자연과 통할 수 있다는 것. 두 소장은 이러한 장점을 살려 곳곳에 자연을 향해 열린 공간을 마련했다. 안방과 거실, 탁 트인 누마루를 ㄷ자형 구조로 배치해 모두 마당과 접하도록 하고, 사랑방에는 널찍한 툇마루를 두어 손님이 현관을 거치지 않고도 마루를 통해 들어와 독립적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 안방에도 작은 마루를 두어 마당으로 드나들거나 걸터앉아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각각의 마루도 조금씩 다르다. 사랑방에는 기둥 안쪽으로 물러난 툇마루를 둔 반면, 안방과 거실에는 벽에서 짧게 돌출된 쪽마루를 설치했다. 앉아 있으면 높이와 폭, 기둥의 유무에 따라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다. 같은 자리에 앉아도 문을 닫았을 때와 열었을 때의 공간감에 차이가 있고, 시시각각 풍경도 변모한다. 덕분에 32평인 집이 50평, 1백 평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연연재의 주인공은 ‘누마루’다. 다도를 사랑하는 이순옥 씨에게 차를 마시는 일은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다. 집 안팎 어디에서나 차를 마실 수 있도록 거실에는 낮은 평상을 마련하고, 집에서 가장 볕이 잘 들고 풍광이 아름다운 자리에 누마루를 두었다. 삼면이 열린 누마루는 주변보다 살짝 들어 올려 있어 풍경이 한층 깊게 펼쳐진다. 이 풍경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 나머지 디자인은 철저히 힘을 뺐다. “건축주의 성정도, 땅도, 원하는 모습도 잔잔했기에 집 또한 대단한 조형보다는 편안하게 머무를 공간을 만드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자연과 어우러지도록 하고, 재료도 소나무나 스투코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변화하는 것을 골랐어요. 여러모로 건축주와 어울리는 집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방에는 널찍한 툇마루를 두었다. 덕분에 한 채에 붙어 있지만 독립된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순옥 씨가 본가와 연연재를 오가는 3도4촌의 생활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6개월이 흘렀다. 오래 준비해온 만큼 자연을 벗 삼는 생활을 천천히 음미하는 중이다.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역시 누마루. “비 오는 날이면 문을 전부 열어놓고 빗소리를 듣습니다. 보름 전후로 사흘 정도는 자정이 지나면 누마루 중앙에 달이 걸리는데, 그럴 때는 달빛을 바라보느라 늦게까지 잠을 미루기도 해요. 본가에서는 좀처럼 창밖을 볼 일이 없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어디서든 풍경이 내다보여요. 이곳에 살면서 가장 크게 실감하는 변화입니다.” 부부는 남편 양창열 씨가 퇴직하면 본가를 정리하고 이곳으로 완전히 옮겨올 계획이다. 어린 시절 집의 기억을 떠올리며 장독대를 만들고, 평상에서 차를 마실 때 보이는 정원에 대나무를 심을 준비도 하고 있다. 연연재의 ‘연연燕然’에는 한가롭고 초연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집의 이름처럼 이순옥 씨는 아침에는 창 너머로 드는 햇빛을 맞고, 비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듣고, 밤에는 누마루에 걸린 달을 기다리며 한가로이 자연과 벗한다.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마련한 집에서 그 집에 어울리는 일상을 보내며 그는 오래 바라던 삶에 한 발 더 가까워지고 있다.
가온건축은 1998년 임형남, 노은주 대표가 설립했다. 가온Gaon은 순우리말로 ‘중심‘이라는 의미다. 전통 건축의 언어를 빌려와 우리 시대의 한옥을 제안한 금산주택, 전통 사찰의 배치 구조를 콘크리트와 벽돌이라는 보편적 현대건축 언어로 구현한 제따와나 선원을 비롯해 다수의 주택과 도시·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21권의 건축 및 도시 관련 책을 집필했고, EBS 〈건축탐구 집〉 등 여러 미디어에 출연해 건축의 의미와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studio-ga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