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 석회암 땅의 아침. 닭들이 먼저 일어나 낙엽 더미를 뒤집으며 풀을 매고, 컴프리잎에는 밤새 맺힌 이슬이 고여 있다. 호두나무 아래에는 심은 적 없는 산딸기가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이 정원에 물을 거의 주지 않는다. 잡초를 뽑는 일도, 농약이나 비료를 사 나르는 일도 없다. 그런데 해마다 정원은 더 무성해지고, 더 많은 것을 밥상에 올려준다. 사람들이 묻는다. “관리를 안 하는데 어떻게 정원이 됩니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관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일하도록 설계했을 뿐이라고. 이것이 퍼머컬처permaculture, 내가 ‘맛있는 정원’이라 부르는 삶이다.

이진호 대표가 직접 퍼머컬처로 조성해 살고 있는 강원도 정선의 오디너리 팜. 다채로운 식물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입체적 풍경을 형성한다.
숲은 누가 가꾸는가
퍼머컬처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숲을 떠올리는 것이다. 숲에는 밭을 가는 사람도, 비료를 주는 사람도, 물을 주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수천 년을 지속하며 해마다 열매를 쏟아낸다. 1970년대 호주의 생태학자 빌 몰리슨과 데이비드 홈그렌은 여기서 질문을 시작했다. 숲은 저절로 되는데, 왜 인간의 밭은 스스로를 소모하는가?

오디너리 팜의 한 장면. 농약이나 비료를 뿌리거나 잡초를 뽑지 않고도 식물들이 건강하게 자란다.
두 사람은 숲의 원리를 흉내 낸 농사 ‘영속하는 농업permanent agriculture’을 구상했고, 이를 줄여 퍼머컬처라 불렀다. 이 말은 곧 ‘영속하는 문화permanent culture’로 확장됐다. 먹거리의 지속 가능성은 삶 전체의 지속 가능성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디너리 팜에서는 퍼머컬처의 생태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동물도 함께 살고 있다.
퍼머컬처 정원의 규칙은 단순하다. 모든 구성원이 셰어하우스의 식구들처럼 한 공간에 함께 살며, 저마다 한 가지 이상의 일을 해 맛있는 정원을 가꾼다는 것. 닭은 달걀을 주는 동시에 벌레를 잡고, 땅을 긁어 김을 매고 거름까지 만든다. 컴프리는 깊은 뿌리로 땅속 양분을 펌프처럼 끌어올려 이웃 나무에게 나눠주고, 벌을 부르며, 염소의 간식이 된다. 정원사가 할 일은 이 재주 많은 식구들을 알맞은 자리에 소개해주는 것뿐이다. 자연주의 정원이 ‘자연처럼 보이는 것’을 지향한다면, 퍼머컬처는 ‘자연처럼 작동하는 것’을 지향한다. 아름다움은 목적이 아니라 결과다.

오디너리 팜에서는 퍼머컬처의 생태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동물도 함께 살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변방의 실험이 아니다. 최근 몇 년째 첼시 플라워 쇼를 관통해온 흐름이 셋 있다. 누구나 다닐 수 있는 정원, 먹을 수 있는 정원, 자연에 가까운 정원. 올해 5월의 쇼는 그 흐름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줬다. 특히 ‘에디멘털edimental(먹을 수 있으면서edible, 아름다운ornamental 식물)’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 한복판에는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데이비드 베컴. 그가 왕립원예협회, 그리고 국왕 찰스 3세의 킹스 재단과 함께 선보인 큐리어스 가든에서는 밀이 화단 가장자리를 물결처럼 장식하고 큼직한 양배추가 꽃 대신 자리를 잡았다. 축구화 대신 장화를 신은 셈이다. 곁에서는 차나무와 허브와 장미가 한 화분에서 어울리는 정원이 이어졌다. 보는 정원과 먹는 정원의 경계가 세계 정원 문화의 한복판에서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퍼머컬처는 바로 그 교차점에 서 있다.

이진호 대표가 강원도 정선군의 신동 새골 마을 주민들과 함께 조성한 새골 정원. 2백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먹을 수 있는 숲을 짓는 법
퍼머컬처의 정수는 포레스트 가든, 우리말로 ‘먹거리 숲’이다. 숲이 큰키나무부터 덩굴까지 아홉 개 층으로 햇빛과 땅을 입체적으로 나눠 쓰듯, 먹을 수 있는 식물로 그 층을 다시 짓는 일이다. 호두나무 아래 보리수가, 그 아래 블랙커런트와 컴프리가, 땅바닥에는 딸기와 허브가 자리한다. 평면의 텃밭이 단층집이라면 먹거리 숲은 볕 좋은 9층 아파트다.
첫 과정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땅을 관찰하는 일이다. 해는 어디서 떠서 어떤 그림자를 만드는지, 비는 어디로 모였다 어디로 흘러 나가는지, 서리는 언제 어디에 머무는지…. 나의 정선 땅은 석회암 지대라 표토는 질퍽해도 물이 이내 바위틈으로 빠져버리고, 흙이 알칼리성이다. 그 조건과 싸우는 대신, 석회암 땅을 좋아하는 호두나무를 주연으로 세웠다. 땅을 이기는 정원은 없다. 땅의 편이 되어주는 정원이 있을 뿐이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가꾸는 새골 정원은 생태계를 조성한 덕분에 농지나 일반 정원에 비해 일손이 훨씬 적게 든다.
식물보다 먼저 설계하는 것은 물과 동선이다. 등고선을 따라 얕은 도랑을 파면 흘러가던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지나가던 물을 머물게 하는 것만으로 정원은 스스로 물을 저장하는 항아리가 된다. 공간은 부엌의 수납처럼 배치한다. 매일 쓰는 양념이 손 닿는 곳에 있듯 매일 뜯는 상추와 허브는 문 앞에,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과일나무는 조금 멀리, 거의 손대지 않는 야생의 덤불은 가장 바깥에. 관리하기 버거운 정원은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심을 때는 한 그루씩이 아니라 ‘길드’로, 즉 품앗이 공동체로 심는다. 유실수 곁에 질소를 만들어주는 콩과 작물, 양분을 끌어올리는 컴프리, 해충을 쫓아내고 익충을 끌어들이는 허브, 벌을 부르는 꽃을 함께 심는다. 그리고 맨땅에는 낙엽과 볏짚을 두껍게 덮는다. 흙에 이불을 덮어주는 일이다. 수분이 유지되고 지렁이가 돌아오며 잡초는 힘을 잃는다.

정원에는 근대, 세이지 등 작물과 꽃이 조화를 이룬다.
그다음 정원사의 일은 해마다 줄어든다. 처음 3년은 어린 나무를 돌보는 집중의 시기, 4~5년 차부터는 가지치기와 수확, 10년쯤 지나면 정원은 거의 숲의 리듬으로 산다. 정원사는 통제자에서 편집자로, 다시 참여자로 바뀐다. 심지 않은 산딸기가 올라오면 반가이 자리를 내어주고, 지나치게 번지는 것은 거두어 닭에게 준다. 정원의 주인이 아니라, 정원이라는 생태계의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정원에서 수확한 작물로 만든 다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다.
소비자에서 정원의 식구로
이 정원이 바꾸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하루의 감각이다. 아침에 딴 상추로 차리는 밥상, 내 닭이 낳은 달걀, 내 나무에서 떨어진 호두 한 줌. 그 사소한 자급의 경험이 우리를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구경꾼에서 참여자로 옮겨놓는다. 계절을 달력이 아니라 혀와 코로 알게 되고, 기다림은 결핍이 아니라 리듬이 된다. 빗물을 받아 쓰고 음식물을 퇴비로 돌리고 남는 수확을 이웃과 나누는 순간, 정원의 원리는 울타리를 넘어 부엌과 골목으로 들어온다. 나는 전국의 교육 현장에서 은퇴 후 귀촌을 준비하는 부부, 아이와 텃밭을 시작한 젊은 부모, 학교 정원을 바꾸고 싶은 교사들을 만난다. 그들이 배워가는 것은 기술 이전에 세계를 보는 눈이다. 문제를 디자인의 실마리로, 잡초를 땅을 읽는 지표로, 이웃을 시스템의 일부로 보는 눈. 기후가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스스로 순환하는 작은 생태계를 곁에 두는 일의 가치는 커질 것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역할을 해주는 식물을 함께 모아 심어 사람의 역할을 줄이고, 수확의 기쁨은 더 많이 누리게 된다.
오늘도 정원은 내가 잠든 사이에 자란다. 지렁이가 흙을 갈고, 떨어진 잎이 내년의 거름이 된다. 나는 다만 곁에서 조금 거들 뿐이다. 퍼머컬처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정원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함께 살기 위해서인가. 그 물음에 답하는 순간, 정원은 풍경이기를 멈추고 삶의 방식이 된다. 눈에 아름답고, 혀에 즐겁고, 함께 사는 모두에게 이로운—맛있는 정원이 있는 조화로운 삶이다.
이진호는 한국퍼머컬처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맛있는정원코리아 대표다. 건축가의 길을 거쳐 강원도 정선에서 먹거리 숲을 일구고 있다. 전국 대학·농업기술센터와 함께 퍼머컬처 디자인 교육을 진행하며, ‘정원은 풍경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는 믿음을 심고 있다. deliciousgarde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