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면 닿는 경기도 포천. 박권빈·이해옥 씨 부부의 '포전집'은 오래 미뤄온 전원생활을 비로소 시작한 곳이다. 독특한 곡선의 집 안팎을 오가며 흙을 밟고, 텃밭의 채소를 돌보는 하루는 두 사람에게 인생 2막을 새롭게 채워가는 설레는 여정이 되고 있다.
기르고 거두며 사는 삶
먹거리를 직접 기른다는 것은 집의 모습뿐 아니라 하루의 리듬까지 바꾸는 일이다. 흙을 만지며 계절의 변화를 기다리고, 갓 거둔 채소와 과일을 식탁에 올리는 삶. 서로 다른 환경과 방식으로 정원을 일상에 들인 세 집을 찾아 자연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 살아가는 세 가지 라이프스타일을 들여다봤다

붉은 벽돌의 단층 본채와 반투명 폴리카보네이트로 마감한 별채가 어깨를 맞댄 채 안쪽으로 휘며 정원을 감싼다.
은퇴 후 마당 있는 집에서 작은 밭을 일구며 사는 삶은 많은 사람이 한 번쯤 그려보는 노후의 풍경이다. 평생 은행원으로 일한 박권빈 씨 역시 아내와 함께 전원에서 살아가길 오래전부터 바랐다. "결혼하고 처음 살던 곳도 부모님이 지어주신 단독주택이었어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으니 자연스럽게 그런 집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남아 있던 것 같아요." 부부는 꿈을 막연한 바람으로만 남겨두지 않았다. 2011년경 왕방산 아래 논과 밭이 이어지는 마을에 땅을 마련하고, 10여 년간 서울과 포천을 오가며 돌봤다. 하지만 익숙한 생활권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집을 짓겠다는 계획은 여러 차례 미뤄졌고, 시간이 흐를수록 전원생활은 더 큰 결심이 필요했다.

본채의 주방과 다이닝 공간, 완만하게 흰 벽과 천장에 맞춰 주방 아일랜드와 타원형 식탁, 벤치를 제작해 공간 전체에 일관된 리듬을 부여했다. 왼쪽의 큰 창 너머로 정원이 보인다.
그렇게 멈춰 있던 계획을 다시 움직인 이는 디자인 스튜디오 석철목을 이끄는 건축가 아들 박현희 소장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지켜본 두 사람의 생활 방식과 앞으로의 나날을 설계에 담았다. 그가 제안한 것은 곡선을 과감하게 활용한 형태. 부부는 처음에는 낯선 형태에 주춤했지만, 곧 마음을 열었다. "흙을 밟으며 사는 것은 오랫동안 바라온 일이었지만, 환갑을 앞두고 익숙한 주거 틀을 벗어난 집에서 생활하는 건 또 다른 모험이었어요. 그래도 이 집이라면 잔잔히 흘러가던 노후의 나날에 새로운 활력을 더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주방 너머로 이어지는 안방.
집 뒤에 딸린 밭이 아닌, 밭을 품어 안은 집
약 4백 평의 땅 가운데 3백 평은 농작물을 기르는 밭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1백 평가량에는 본채와 별채, 안마당을 배치했다. '밭田을 품抱는다'는 뜻을 지닌 주택 포전집의 형태는 이 안마당에서 출발했다. 자연석으로 높낮이를 다듬은 원형에 가까운 텃밭을 중심에 두고, 건축물이 그 둘레를 감싸도록 한 것이다. "사방이 열린 땅에서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농경지를 감싸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콘크리트와 벽돌로 세운 높이 4.8m 이상의 외벽은 바깥에서 보면 단단하고 폐쇄적이지만, 안에서는 주변 건물을 가리고 먼 산과 농장의 풍경만 액자처럼 담아냅니다. 외부의 시선은 막으면서도 자연은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한 장치인 셈이죠."

별채에서 바라본 포전집 주변의 드넓은 논밭 풍경.
박현희 소장은 높이와 쓰임이 다른 두 건물이 맞닿은 모습을 "서로 어깨동무하며 의지하는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집의 이름도 이러한 공간적 특징을 담아 지은 것입니다. 부모님이 오랫동안 가꿔온 땅과 새로 지은 집이 어우러져 하나의 삶을 이루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붉은 벽돌과 회색 노출 콘크리트, 반투명 폴리카보네이트와 목재를 함께 사용해 각 재료의 물성을 살린 점도 눈에 띈다. '돌은 돌답게, 철은 철답게, 나무는 나무답게' 다루는 박현희 소장의 건축 철학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주방에서도 창 너머 정원을 마주할 수 있다.
외부에서 시작된 곡선은 실내로 이어진다. 약 40평 규모의 내부는 벽면이 완만하게 휘며 실제 면적보다 깊고 넓게 느껴진다. 거실에서 주방, 그리고 안방으로 이동하는 동안 시선과 동선도 자연스럽게 곡선을 따른다. 공간 전체가 한눈에 드러나기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이곳을 채우는 가구 역시 공간의 곡률에 맞춰 세심하게 맞춤 제작했다. 안방의 침대 프레임부터 주방 아일랜드, 둥근 타원형 식탁과 벤치, 나아가 벽체와 일체감 있게 연결된 수납장과 선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가 제자리에 꼭 맞게 디자인되었다. 다이닝 테이블 위로 날렵하게 뻗은 스테인리스 펜던트 조명 역시 오직 이 집만을 위해 고안한 마스터피스다. 건축물의 뼈대에서 시작된 선형의 아름다움이 내부로 끊김 없이 이어지며 집안 전체에 일관된 질서를 부여한다.

텃밭에서 갓 수확한 고추와 가지, 방울토마토. 부부는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 식탁에 올린다.
둥근 궤적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일상
포전집에 터를 잡고 사계절을 경험한 지 어느덧 1년. 박권빈 씨는 비로소 아들의 설계를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안을 향해 둥글게 흰 본채 구조 덕분에 거실이나 주방, 다이닝 등 집안 그 어느 곳에 머물러도 생기 돋는 텃밭과 정원이 한 폭의 그림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밤사이 훌쩍 자라난 잡초, 얄궂은 비바람에 쓰러진 작물, 아침 이슬을 머금고 새로 피어난 꽃망울까지 문을 열지 않고도 찬찬히 살필 수 있다. 그야말로 밭과 정원이 부부의 하루, 그 중심축에 놓인 셈이다. "집 안 어디에 앉아 있어도 자꾸만 밭과 눈이 마주치니 부지런히 밖으로 나갈 수밖에요. 아침에 눈뜨면 습관처럼 제일 먼저 괭이부터 손에 쥐집니다. 여름날 풀은 하루만 방심해도 금세 무성하게 우거지거든요. 게으름을 피우면 결국 풀한테 지고 마는 겁니다.(웃음)"

안쪽을 향해 둥글게 흰 본채가 텃밭과 정원을 감싼다. 부부는 처마 아래 긴 벤치에 앉아 계절의 변화를 마주한다.
박권빈 씨의 아침은 집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며 무성한 풀을 뽑고, 작물과 나무의 매무새를 다듬는 것으로 시작한다. 농사나 조경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주변 이웃에게 가지치기 요령을 묻고, 수없는 시행착오를 기꺼이 감내하며 자연스레 식물과 교감하는 법을 터득했다. 널찍한 밭에는 고추와 가지, 상추, 호박, 옥수수, 들깨 등 오직 가족의 건강한 밥상을 책임질 싱싱한 제철 채소들이 계절의 흐름에 맞춰 뿌리를 내린다.

별채 벽면 수납장을 목재로 통일해 포근한 분위기를 살렸다.
아내 이해옥 씨에게는 흙 내음 나는 밭과 요리하는 주방의 거리가 훌쩍 가까워진 것이 더없는 기쁨이다. "식사 준비를 하다가 문득 푸른 채소가 필요하면 밭으로 나가 딱 그날 한 끼 먹을 만큼만 따오면 돼요. 농사와 집안 살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셈이지요."

벽과 바닥을 초록색 모자이크 타일로 마감해 목재 중심의 공간에 산뜻한 대비를 더했다.
실용적인 채소들 틈바구니로 탐스러운 수국과 덩굴장미, 백합과 붉은 백일홍 등 다채로운 꽃과 나무가 저마다의 속도로 피고 진다. 처음에는 무조건 빼곡하게 많이 심을수록 아름다울 것이라 믿었지만, 막상 흙과 살을 부비며 살아보니 식물들 역시 각자의 매력이 돋보일 수 있도록 숨통을 틔워주고 가지를 솎아내는 배려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부부에게 이곳의 정원은 멈춰 있는 완성형 풍경이라기보다 매일 아침 안부를 묻고, 흙을 다독이며 조금씩 매만져가는 살아 있는 일상 자체다. 변하는 계절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찍어 자녀들에게 보내는 일도 부부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여름비가 내리면 빗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를 영상에 담아 보내고, 마당에 첫눈이 쌓이거나 새로운 꽃이 피면 사진을 찍어요. 아들과 며느리가 찾아오는 주말에는 함께 밭에 나가 채소를 거두고, 갓 딴 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죠."
박권빈·이해옥 씨 부부의 포전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언젠가 둥근 마당 한편에 작은 작업실이나 게스트룸을 더하는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원 안에서 집과 밭, 정원은 서로 자리를 내어주며 천천히 자라난다.
석철목 박현희 소장은 인테리어를 전공하고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일부 공간의 리모델링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며, 이후 건설 회사에서 10여 년간 경험을 쌓았다. 2022년 디자인 스튜디오 석철목을 설립했다. 건축과 인테리어를 비롯해 가구·오브제·VMD·아트 디렉션 등으로 작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으며, 주요 프로젝트로 파르코니도, 커빙블럭, 8323 겹의 공간 등이 있다. sukchulm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