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소도시 피아첸차에서 시작한 조명 브랜드 다비데 그로피. 브랜드의 수장이자 디자이너인 다비데 그로피는 조명 자체가 아닌 오로지 빛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디자인을 선보이며 조명 디자인 신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왔다.

올해 다비데 그로피가 새롭게 선보인 조명 카르마. 이번 컬렉션에서는 그간 연구해온 기술과 소재를 바탕으로 빛을 다양하게 탐구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한 편의 시를 짓는 마음으로
“조명은 철저히 빛을 위한 도구다. 빛이 더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다면 조명은 보이지 않아도 된다.” 1980년대 후반, 첫 조명을 디자인하던 다비데 그로피는 브랜드명으로 단순하게 자신의 이름을 내걸기로 했다. 이후 40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 문장은 다비데 그로피의 철학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구절로 남아 있다.

깔때기로 만든 조명 트로피컬Tropical. 일상의 물건을 재료로 삼은 위트가 돋보인다.
그들의 조명은 이름만큼이나 간결하다. 첫인상은 미니멀하고 기하학적 형태미. 지난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전체를 하얗게 마감한 공간에 선 하나, 그림자 한 점만 두고 나머지는 오로지 빛으로 장면을 완성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제품을 좀 더 들여다보면 심플한 형태 이면에 유머러스하고 따뜻하며, 무엇보다 시적인 빛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테이블 조명 모르세토Morsetto는 ‘숲속의 새처럼(Like a bird in the woods)’이라는 소개글에서 드러나듯 숲을 자유롭게 나는 새의 움직임을 빛으로 형상화했고, 달 표면을 종이로 표현한 조명 문Moon에는 달빛을 집으로 들여오고 싶던 소년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렇듯 독창적이면서도 섬세한 디자인을 이어가며 다비데 그로피의 제품은 출시될 때마다 화제를 모았다. 2014년 눌라Nulla와 삼페이Sampei로, 2024년에는 아니마Anima로 ADI 황금콤파스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여러 디자인상을 수상했고, 레스토랑과 갤러리 등 호스피탤리티 공간에서 특히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빛과 함께해온 40년 여정
올해는 다비데 그로피가 40주년을 맞이한 뜻깊은 해다. 이를 기념하며 지난 여정을 집대성한 전시 가 열렸다. 다비데 그로피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자 본사가 있는 피아첸차의 갤러리 볼룸니아Volumnia에서 열린 전시는 그가 지난 40년 동안 빛과 조명을 탐험해온 시간을 담고 있다. 달빛을 품은 거대한 조명 문을 시작으로 그가 오랫동안 몰두해온 빛의 장면을 담은 ‘다섯 가지 빛의 유토피아’가 독립된 방에 펼쳐지고, 뒤이어 브랜드의 상징적 조명들이 등장한다. 한자리에 모인 작업들은 다비데 그로피가 공간 안에서 빛을 어떻게 바라보고 구현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시적인 조명과 한때 성당이던 공간의 웅장한 오라가 어우러진 전시는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만난 어느 장면보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세 면을 종이로 감싸 만든 조명 우마시. 사용자가 직접 높이를 조절해 쓸 수 있다.
전시에서 선보인 또 하나의 주인공은 올해의 새로운 컬렉션. 이번 컬렉션에서 다비데 그로피는 빛을 퍼지고, 반사되고, 움직이며 공간을 서서히 변화시키는 존재로 바라보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했다. 그가 가장 애정하는 소재 중 하나인 종이로 만든 우마시Umasi는 빛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세 겹의 스크린을 거치며 부드럽게 물질화된 빛이 공간 안으로 천천히 번져나가며 자신의 존재감을 은은하게 알린다. 펜던트 조명 카르마Carma는 오팔린 유리구 안에 담긴 빛이 이름처럼 차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가느다란 줄기 위에서 곤충이 작은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표현한 플로어 조명 오키올리노OcchiOlinO는 이름부터 형태까지 장난기가 물씬 느껴진다. 다비데 그로피의 설명처럼 섬세한 소재 선정과 기술, 시적 심상이 모여 완성한 발명품 같은 조명들이다. “저는 우리가 만든 조명이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감동과 놀라움을 선사하는 작은 발명품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과 맞닿아 있습니다.”

펜던트 조명 미스Miss 25는 가느다란 튜브 하나로 테이블 위에 경이로운 빛을 드리운다.
INTERVIEW
다비데 그로피 대표 다비데 그로피
‘빛의 한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그간의 여정을 집대성한 전시를 펼쳤다. 전시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나? 관람객에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 유예되는 한 시간을 요청했다. 우리가 해왔고 앞으로 해나갈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해줄 시간이었다. 나의 작업을 ‘진실을 향한 지속적인 탐구’라고 설명하곤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 과정에서 품어온 생각을 보여주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Un’ora di luce〉는 시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 더 나아가 빛과 맺는 관계를 구축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조명을 디자인할 때 무엇에서 영감을 얻나? 작업은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기도 하고, 예술적 직관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출발점이 무엇이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서사와 의미를 지니는 일이다. 내가 만드는 조명은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빛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저마다의 시선을 지녀야 한다. 과거를 환기하고, 현재에 머물며, 미래를 암시해야 한다.
심비오지Simbiosi는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전선을 움직이며 형상을 만들 수 있다. 테타텟TeTaTeT은 기둥의 위치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다비데 그로피의 조명은 사용자가 빛을 완성할 여지를 남겨두는 느낌이다. 나는 내가 조명의 유일한 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놀라운 발견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이 매우 시적인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다비데 그로피가 어떤 브랜드가 되었으면 하나? 영화와 연극에서는 조명을 포토그래피photography라 부른다. 문자 그대로 ‘빛으로 쓰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정의를 정말 좋아한다. 다비데 그로피를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표현이다.

펜던트 조명 미스Miss 25는 가느다란 튜브 하나로 테이블 위에 경이로운 빛을 드리운다.
시적인 빛의 감상실, 다비데 그로피 서울
공간 디자인 솔루션을 제공하는 라인테이스트가 2023년 문을 연 쇼룸. 미니멀한 조명처럼 공간 또한 두 개 층 전체를 오롯이 빛을 경험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주소 서울시 서초구 양재천로 103-2 지하 1층, 1층
운영 시간 월~금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주말 예약제
문의 02-566-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