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디자이너, 노라노. 지난 3월부터 노라노 아카이브 전시회 〈Nora Noh: FIRST & FOREVER〉가 경운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에 즈음해 청담동 작업실에서 노라노 선생님을 만났다. “오늘 사진은 안 찍으면 좋겠어요.” 도착해 인사를 드리자, 수줍게 첫마디를 떼셨다. 속눈썹과 화장이 트레이드마크인 선생님이었지만, 그날은 팔을 다쳐 단장을 하지 못했기에 사진 촬영을 원치 않으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뜻을 존중하기로 했고, 조심스럽게 선생님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분명 작은 체격이었는데도 선생님은 엄청나게 크고 당당한 소나무처럼 내 앞에 앉아 계셨다.

청담동 도산대로에 위치한 노라노 사옥 내 자리한 ‘노라의 집’ 거실.
최근 1백 주년 전시를 하셨는데요, 소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런 전시는 정말 묘해요. 내 옷을 내가 보는데도 꼭 옛 애인을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한 벌 한 벌마다 그때의 공기, 그때 만난 사람들, 그때 내가 얼마나 치열했는지가 전부 들어 있어요. 그래서 전시장에 걸린 옷을 보면 단순히 ‘옛날 옷’이 아니라, 내 시간이 서 있는 것처럼 보여요. 이번 전시는 제 백수白壽를 앞두고 경운박물관에서 마련해준 자리라 더 각별했어요. 제가 만든 의상만 70여 점이 모여 있다고 하더라고요. 초기 작품부터 미국에서 반응이 좋던 드레스, 영화배우와 가수들이 입은 무대의상까지 한자리에 있으니, 저로서도 ‘내가 참 오래 살았구나. 참 많이 만들었구나’ 싶었죠. 그런데 이상하게 감상에만 젖게 되지는 않아요.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 그때도 내가 꽤 괜찮았네’ 하고 웃다가도, 금세 재봉선과 비율부터 보게 돼요. 디자이너는 끝까지 디자이너예요. 무엇보다 고마웠던 건, 후배들이 이 전시를 ‘추억’으로만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그냥 옛사람 기념 전시처럼 꾸미면 재미없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 패션의 시작, 기성복의 도입, 무대와 영화 의상, 해외시장까지, 제가 지나온 길이 오늘의 K-패션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 점이 참 좋았어요.
지금의 젊은 세대가 선생님의 전시와 아카이브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길 바라시나요?
거창한 걸 바라지는 않아요. ‘아, 이 여자가 일을 참 빨리 시작했구나. 그리고 참 오래 했구나.’ 그 정도만 느껴도 좋아요. 다만 조금 더 바란다면, 옷 한 벌을 그냥 오래된 의상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해요. 그 안에는 그 시대의 공기, 만든 사람의 손, 입은 사람의 표정, 그리고 여성들이 조금씩 달라져가던 시간이 다 들어 있거든요. 나는 옷이 결국 ‘기억’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드레스는 누군가의 첫 무대였고, 어떤 재킷은 누군가의 사회생활 첫날을 함께했을 거예요. 옷은 몸에 닿는 물건이라 더 강하게 기억을 남겨요. 그래서 아카이브는 단순한 저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의 보관이라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들이 내 옷을 보며 과거를 박물관 유리 안에 갇힌 낡은 세계로만 보지 않았으면 해요. 그 시대에도 야망이 있었고, 모험이 있었으며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있었어요. 그 감정이 지금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면 좋겠어요.

노라노 디자이너, 자신의 아카이브 전시물 앞에서.
백수를 앞둔 지금, 선생님께 ‘나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나이는 그저 숫자예요. 물론 몸은 예전 같지 않죠.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사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내 취향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색과 선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젊을 때도 나답게 살고 싶었고, 지금도 그래요. 오히려 오래 살면 분별이 더 또렷해져요.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별것 아닌지 조금씩 알게 되거든요. 젊을 때는 남의 시선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게 많이 정리돼요. 괜히 시끄러운 것보다 품위 있는 것이 오래간다는 걸 알게 되고, 요란한 것보다 정확한 것이 더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돼요. 나는 지금도 웃고, 말하고, 기억하고, 옷을 생각해요. 그거면 충분해요. 사람이 끝까지 자기 관심을 놓지 않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해요. 그러면 나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별 힘을 못 써요.
선생님은 한국 패션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정작 선생님은 스스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는 내 자신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누가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라고 말해도, 내 마음속에는 늘 먼저 ‘아, 나는 그냥 계속 일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옷을 만들었고, 여자가 자기 몸에 맞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게 도왔으며 시대가 바뀌는 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죠.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역사가 된 것이지, 처음부터 역사가 되겠다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그때는 ‘패션’이라는 말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쓰지 않았어요. 양장, 양복, 옷감, 재단, 바느질, 그런 말이 더 현실적이었지요. 그런데 나는 아주 일찍부터 알았어요. 옷은 단지 몸을 가리는 천이 아니라, 사람을 달라 보이게 하는 힘이라는 걸요. 여자들이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자세가 달라지고, 눈빛이 달라지고,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까지 달라지는 걸 봤거든요. 그래서 나는 늘 옷을 ‘모양’보다 ‘사람’으로 생각했어요.
선생님은 이혼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선택이었을 텐데요.
그때는 이혼한 여자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시대였어요. 여자가 결혼 생활을 끝낸다는 건 마치 큰 흠을 평생 이마에 붙이고 사는 것처럼 여겨졌죠. 집안이 어떻고, 교육을 얼마나 받았고, 그런 건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이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던 때였으니까요. 나도 그런 시선을 온몸으로 받았어요. 하지만 나는 지금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요.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을 꼽으라면 하나는 이혼이고, 또 하나는 미국에 간 거예요. 이혼은 나를 망가뜨린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다시 내 손에 돌려준 일이었어요. 물론 그 과정이 아름답기만 했다는 말은 아니에요. 외롭고, 서럽고, 무섭고, 밤에 혼자 앉아 울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그런 시간까지도 결국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줬어요.

경운박물관에서 7월 16일까지 열리는 전시 〈Nora Noh: FIRST & FOREVER〉 전경. 그녀의 패션 1백 년사가 고스란히 펼쳐진다.
‘노라노’라는 이름도 선생님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본명은 노명자예요. 그런데 나는 오래전부터 이름이라는 게 사람의 마음을 끌고 간다고 생각했어요.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을 읽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노라가 마지막에 문을 열고 나가잖아요. 그 장면이 내게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한 여자가 자기 자신을 찾으러 나가는 모습으로 받아들여졌거든요. 그 문소리가 얼마나 크게 다가왔던지! 그래서 ‘노라’라는 이름을 택했어요. 내게 노라노라는 이름은 단순한 예명이 아니에요. 선언이었어요. 나는 내 삶을 살겠다는 선언, 남이 정해놓은 역할 안에서만 살지 않겠다는 다짐. 이름을 그렇게 정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내가 조금 더 용감해지더라고요. 사람은 자기가 어떤 이름을 입느냐에 따라서도 태도가 달라져요.
1947년에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당시 여성으로서 미국 유학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맞아요. 요즘처럼 해외여행 가듯 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죠. 미국에 간다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고, 젊은 여자가 혼자 그렇게 먼 곳으로 간다는 건 더더욱 파격적인 일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은 넓고, 나는 배울 게 많았거든요. 한국 안에서만 보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아주 강했어요. 미국에 가서 본 건 단순히 재단 기술이나 소재 감각만이 아니었어요. 여자들이 자기 일에 책임을 지고, 자기 스타일을 만들고, 자기 취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를 봤어요. 그게 내게 굉장히 큰 자극이 되었죠. 옷은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는 걸 거기서 더 분명히 배웠어요. 잘 입는다는 건 잘 산다는 것과도 연결돼요. 자신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문제니까요.
1952년 명동에 ‘노라노의 집’을 여셨습니다. 그때 명동 분위기는 어땠나요?
전쟁 직후였으니 모든 게 궁핍했지요. 옷감도 부족하고, 사람들 표정에도 피로가 깊게 남아 있었고요. 여자들은 몸뻬를 입고, 살기 위해 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찼어요. 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확신했어요. 사람이 힘들수록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고요. 오히려 더 절실해져요. 명동은 그 시절에도 아주 특별한 곳이었어요. 문화가 모이고, 영화가 있고, 음악이 있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감각이 제일 먼저 반응하던 곳이었죠. 노라노의 집은 단순한 양장점이 아니었어요. 여자들이 거울 앞에 서서 전혀 다른 자기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는 공간이었어요. 손님들이 옷을 맞추러 오긴 했지만, 사실은 조금 다른 인생을 꿈꾸러 오는 거였지요. 그래서 노라노의 집은 단순히 옷을 파는 곳이 아니라, 여자를 다시 세워주는 장소였다고 나는 생각해요.

노라노가 1959년에 디자인한 실크 브로케이드 플레어 드레스. 1973년 미국 색스 백화점에 입점해 수년간 사랑받은 그녀의 시그너처 디자인 검정 스트라이프 원피스와 당시 의상들.
1956년 반도호텔에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개최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패션쇼를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지금은 패션쇼가 너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이 패션쇼가 뭔지 몰랐어요. 쇼라고 하니까 노래하고 춤추는 공연쯤으로 생각한 사람도 많았지요. 하지만 나는 옷도 무대 위에서 살아난다고 믿었어요. 걸려 있는 옷은 반밖에 보이지 않아요. 사람이 입고 걷고, 돌고, 옷자락이 흔들리고, 조명 아래에서 색이 살아날 때 비로소 그 옷의 진짜 얼굴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배우와 손님들 가운데 내가 만든 옷이 어울릴 만한 사람을 골라 걷는 법, 서는 법, 손을 두는 법까지 다 가르쳤어요. 모델 시스템이 지금처럼 갖추어져 있던 때가 아니니까요. 모든 게 처음이었고, 그래서 더 흥미로웠어요. 나는 남들이 “그게 되겠어?” 하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더 해보고 싶었어요. 안 해본 일이라면 더더욱요. 패션쇼를 한다는 건 단순히 옷을 보여주는 이벤트가 아니었어요. 한국에도 패션이라는 문화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선언이었죠. 옷이 단지 실용품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이 되고, 감상이 되고, 사회적 욕망이 되는 순간이었어요. 나는 그때 이미 알았어요. 패션은 재단실 안에서만 끝나는 일이 아니구나, 세상 한가운데로 걸어 나갈 수 있구나 하고.
당시 선생님의 옷은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였다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늘 우리나라 여자들이 조금 더 깨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주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자기 몸을 자기 것으로 느끼고, 자기 취향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 아름다움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면 했죠. 그 시절에는 여자가 예쁘게 입는 것조차 사치나 허영처럼 보는 시선이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죠. 자기 자신을 가꾸는 건 자기 존중이에요. 예쁜 옷을 입는다는 건 단순히 치장하는 일이 아니에요. 어깨를 펴게 하고, 걸음걸이를 바꾸고, 사람들 앞에서 움츠리지 않게 만들어요. 특히 그때의 여성들에게는 그런 변화가 더 컸죠.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니까요. 나는 옷이 여자를 더 자유롭게, 더 세련되게, 더 당당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어요.

디자인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노라노 레이블 아카이브와 해외 주요 패션 매체에 소개된 그녀의 일러스트레이션.
‘아리랑 드레스’처럼 한국적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도 선생님을 상징하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나는 한복을 결코 과거의 박제된 옷으로 보지 않았어요. 한복에는 정말 아름다운 선과 색과 품위가 있어요. 다만 시대가 바뀌면 입는 방식도 달라져야 하죠. 사교 파티나 국제적인 자리에서 그대로 입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좀 다른 형식으로 옮겨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복의 정서와 색감은 살리면서도 드레스처럼 움직이고, 현대적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옷을 고민했지요. 삼회장저고리에서 모티프를 따와 이브닝드레스로 변형한 것도 그런 시도였고요. 한국적인 것을 버리고 서양식으로 가는 게 아니라, 한국적 아름다움을 지금의 몸과 지금의 장면에 맞게 번역하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한 현대화였어요. 전통은 손대면 안 되는 유물이 아니라, 잘 손보면 다시 살아나는 것이에요.
선생님은 기성복을 한국에 도입한 디자이너로도 평가받습니다. 맞춤복 중심이던 시대에 왜 기성복이 필요하다고 보셨나요?
맞춤복은 참 아름다운 시스템이에요. 한 사람의 몸을 재고, 그 사람만을 위해 옷을 만든다는 건 분명 특별한 일이죠. 하지만 모두가 그런 방식만으로 옷을 입을 수는 없어요. 가격도 높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요. 나는 패션이 일부 사람만의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좋은 디자인을 더 많은 사람이 입을 수 있어야 해요. 멋이라는 건 소수의 전유물이 되면 금방 숨이 막혀요. 나는 거리의 여자도, 일하는 여자도, 바쁜 여자도 세련된 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어요. 그래서 기성복은 단순히 대량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스타일의 민주화 같은 것이었어요.

디자인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노라노 레이블 아카이브와 해외 주요 패션 매체에 소개된 그녀의 일러스트레이션.
선생님은 영화와 무대, 대중문화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배우와 가수의 의상을 만들며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나요?
무대의상은 일상복과 달라요. 멀리서도 살아야 하고, 조명 아래에서 보석처럼 빛나야 하며, 입은 사람의 움직임을 살려줘야 해요. 배우나 가수는 옷을 입고 그냥 서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면서 자기 에너지를 밖으로 발산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옷도 그 에너지를 도와줘야 해요. 나는 늘 그 사람의 몸, 표정, 성격, 무대에서의 버릇까지 모든 걸 같이 봤어요. 같은 드레스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어깨선이 중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허리 움직임이 더 중요해요. 옷이 사람보다 앞서가면 안 되지만, 사람을 더 크게 보이도록 해야죠. 그 균형이 참 중요해요. 좋은 무대의상은 입은 사람을 가두지 않아요. 오히려 그 사람을 더 자유롭게 보이도록 만들죠. 그리고 대중이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이미지가 되기도 해요. 그런 점에서 나는 무대의상을 아주 흥미로운 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패션이 대중문화 속으로 가장 강렬하게 들어가는 순간이기도 하니까요.
오랜 세월 동안 계속 일해오셨습니다. ‘계속한다’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특별한 비결 같은 건 없어요. 그냥 했지요. 해야 하니까 했고, 재미있으니까 했고, 또 옷이 내 일이었으니까 했어요. 사람들은 오래 일한 사람에게 무슨 대단한 철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하루하루를 버티고 또 해내는 힘이 더 중요해요. 거창한 각오보다 리듬이 필요해요. 나는 나이가 든다고 생각이 멈춘다고 믿지 않았어요. 몸은 느려질 수 있어도 눈은 계속 움직이거든요. 지금도 옷을 보면 비율부터 생각하고, 원단을 보면 이건 어떤 실루엣이 좋을까 상상하게 돼요. 그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으니 아직도 디자이너인 거죠. 또 너무 많이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복잡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해요. 오늘 할 일을 하고, 내일 또 할 일을 하고, 그러다 보면 세월이 쌓여요. 나는 그저 그 시간을 성실하게 건너온 것뿐이에요.

디자인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노라노 레이블 아카이브와 해외 주요 패션 매체에 소개된 그녀의 일러스트레이션.
한국 패션은 이제 세계 무대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시기에 지금의 K-패션은 어떤 모습인가요?
참 놀랍죠. 내가 처음 옷을 만들 때만 해도 한국 패션이 세계에서 이렇게 이야기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때는 원단도 부족했고, 시스템도 없었고, 보여줄 무대도 많지 않았어요. 무엇이든 몸으로 부딪쳐가며 만들어야 했죠. 그런데 지금은 한국 디자이너와 아티스트가 세계 무대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되고 있잖아요. 그걸 보면 기쁘고, 또 조금은 뭉클해요. 우리가 늦게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아주 열심히 해왔어요. 그리고 결국 우리만의 감각을 만들었지요. 나는 그 점이 중요하다고 봐요.
긴 대화 끝에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이번 주말에 뭐 하실 예정이신가요?
이번 주말에 친구가 집에 오기로 했어요. 같이 맛있는 걸 먹을 거예요. 그런 시간이 모여서 내 인생이 돼요. 그러니 나는 오늘도 잘 입고, 잘 먹고, 또 내일을 생각합니다. 나는 젊은 사람들한테 너무 겁내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인생은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아요. 나도 그랬어요.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을 찾았고, 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나갔어요. 지나고 보면 고생은 이야깃거리가 되고 상처는 결이 돼요. 중요한 건 자기 삶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살고, 내 힘으로 서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는 것. 그게 결국 사람을 품위 있게 만들어요. 그래서 무엇보다 자신의 일상도 아주 중요해요. 사람들은 큰 사건만 기억하려고 하지만, 인생은 결국 매일매일 소소한 것으로 이루어지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