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와 옻칠로 시작해 집 안에 자리한 병풍 문까지. 배첩 작업자 손정현 씨는 낡은 빌라를 고치며 자신의 작업 방식과 미학을 집 안에 스며들게 했다.

국가유산수리기능자 손정현의 집. 현관이자 거실, 복도의 역할을 하는 공간에서 두 개의 문이 마주한다. 기지 어소시에이츠의 박지훈 디자이너는 이곳을 하나의 장면처럼 연출했다.
글씨나 그림에 종이와 비단 등을 붙여 족자·액자·병풍 등의 형태로 만들거나, 손상된 서화를 복원하는 전통 처리 기술을 배첩褙貼이라 한다. 손정현 씨는 9년 차 배첩 작업자이자 국가유산수리기능자로 배첩을 활용해 족자·액자·병풍 등을 만드는 기능인이다. 어딘가 훼손되거나 빛바랜 무언가를 보강하고 복원하는 일이 그의 전문분야다.
하지만 집을 수선하는 일은 달랐다. 동생과 반려견 탄이와 함께 살 집으로 15평 남짓한 규모의 빌라를 마주했을 때 그는 막막했다. 골목을 지나 건물 계단에 오르려는 순간부터 ‘여기는 안 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머릿속을 두둥실 떠다녔다. 어디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막막하던 찰나, 기지 어소시에이츠 박지훈 디자이너가 생각났다. 배첩 수업을 들으러 온 수강생으로 맺은 인연이었다.

목재와 한지, 흰 벽면이 중첩해 만드는 장면이 이 집의 특징. 그는 이곳에서 동생, 반려견 탄이와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처음엔 약간의 자문만 구하려 했다. 그런데 박지훈 디자이너의 의지는 마차를 끄는 말처럼 꽤 강건했다.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작가의 집을 보면 늘 한 사람의 정체성이 집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언젠가 그런 집을 짓고 싶었는데 선생님의 집이라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죠.” 5주 과정의 수업 외에 일상적인 대화도 나누며 만나본 정현 씨에 대한 선연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현 씨를 위해 떠올린 집의 모습을 3D 이미지로 만들어 보냈다.

미닫이문이 달린 창고처럼 쓰던 공간을 재구성했다. 마루와 창문을 옻칠로 마감해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질 색감을 기대한다.
집주인의 손길이 스민 문
문을 열면 곧바로 거실이자 부엌이면서 현관 역할을 하는 공간과 함께 방 두 개를 마주하는 구옥 빌라의 구조. 디자이너는 문에 주목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게 문이다 보니 손잡이도 그렇고 소재도 그렇고, 형태와 여는 방식에 따라 집 안 인상과 분위기가 정해진다고 생각했어요.” 고개를 사방으로 돌렸을 때 공간이 흐르기보다 하나의 신scene으로 남게 하고 싶었죠.” 하여 기존 문을 철거 후 새 문을 만들기로 했다.
먼저 거실 겸 창고처럼 쓰던 공간을 지키던 미닫이문. 그는 손정현 씨가 집을 선택하게 된 큰 이유이기도 하던 장면을 목재와 한지를 활용한 미닫이문으로 교체하고자 했다. 그런데 미닫이문 형태를 그려보니 어딘지 공간이 답답해 보일 수 있겠다는 우려가 생겼다. 그때 작업실 한편에 있던 병풍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직접 병풍도 제작하거든요. 그때 생각했죠. 문을 병풍처럼 접이식으로 만들면 집주인의 정체성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동시에 우려 또한 해소할 수 있겠다고 말이죠.”

다다미에 착안한 마루는 내부를 수납공간으로 만들어 활용도를 높였다.

박지훈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한 조명. 명주실을 사용해 은은한 빛을 낸다.
넉넉지 않은 예산 탓에 두 사람이 직접 마감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으나 오히려 기우였다. “선생님의 금손을 활용할 수 있어 오히려 좋았죠.” 팔을 걷어붙인 두 사람은 목재 마감을 어떻게 할지 깊이 고민했다. 아무래도 평소 작업실에서 사용하는 작업대에 옻칠을 하는 손정현 씨의 성향과 작업 방식이 집 안에 깃들어야 취지에 맞겠다고 판단했다. 손정현 씨는 상온에서도 경화할 수 있는 옻칠에 관한 정보를 디자이너에게 귀띔해주었다. 집 안에 있는 목재란 목재에는 전부 두 사람이 직접 옻칠했다.

수납장과 천장 또한 직접 칠했다. 현관 바닥의 경우 마천석을 잘라 붙여 디테일에 신경 썼다. 방문 사이에 놓인 연두색 고서는 손정현 씨가 할아버지 서재에서 가져온 것인데, 현재는 탄이의 물그릇을 받쳐 놓는 단으로 쓴다.
문틀과 창살에는 한지를 붙였는데 여기에도 정현 씨의 손길이 닿았다. 살 하나하나에 직접 풀을 발라 종이를 붙이고 여백을 잘라냈다. 병풍 문 작업은 좀 더 품이 들었다. “창문은 창살 앞뒤에 한지를 붙이고 남는 여백을 잘라내면 되는데요, 병풍 문의 경우 앞뒷면을 한지로 감싸는 형태로 작업했어요. 포장지 감싸는 과정처럼 말이죠. 쉽지 않았어요. 기계지 한지는 제가 평소 사용하는 한지보다 두껍고 유연성이 떨어졌거든요. 한지도 팽팽하게 잘 당겨야 하는데 크기가 커서 힘들었어요. 각 잡기도 어려웠고요.”
방문에는 추포麤布를 사용했다. 직역하면 거친 베를 뜻하는 추포는 삼베와 한지를 접합해 만든 것. 오염에도 강하면서 특유의 질감 있는 소재를 고민하던 디자이너에게 손정현 씨는 추포를 추천했다. 이에 디자이너는 추포가 지닌 거친 텍스처를 살리기 위해 옻칠로 색을 입히자고 제안했다. 도토리·참나무·밤나무 색을 섞어 칠했는데, 기포가 사라지지 않아 염려했다. 하지만 세 시간 정도 지나니 색이 예쁘게 앉혀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미닫이문을 완성했다.

화장실 샤워 부스 파티션에는 스테인리스를 적용했다. 약한 반사로 공간을 비추며 변주를 만들어낸다.
부딪치며 꾸려가는 집
순탄해 보이는 협업 과정에도 창과 방패 같은 순간은 있었다. 그중 하나도 추포였다. 한창 바쁘던 시기라 손이 더 많이 가는 추포 대신 한지를 덧대는 식으로 수월하게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의지가 강했다. “저는 이렇게까지 집을 수선하는 데 개입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저보다 더 적극적인 디자이너의 모습을 보니 어느 순간 옻칠을 하고 배접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걸 해야 이 집에 저의 아이덴티티가 부여된다고 강조하시더라고요. 그러니 안 할 수가 없었죠. (웃음)”
또 하나는 신발장이다. “주거에서 기능을 빼는 건 실수에 가까운데요, 선생님이 신발장을 빼달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기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규모를 축소해 디자인해서 시선에 걸리지 않도록 했는데도 말이죠.” 겨울 외투 세 벌에 평소 물건 하나 들이는 데 신중한 손정현 씨는 본인뿐 아니라 함께 사는 동생 또한 단벌 신사에 가깝다며 단호히 말했다. 결국 디자이너는 의지를 굽혔다.

정현 씨 동생의 침실. 남매는 신발장도 없앨 정도로 짐을 최소화한 미니멀한 생활을 추구한다.

방문에는 색을 들인 추포를 덧대 제작했다.
대신 최소한의 수납공간만큼은 포기할 수 없던 디자이너는 병풍 문 너머 공간에 마루를 고안했다. 다다미 형식에 착안해 만든 집에 수납공간이 많지 않아서 불필요한 짐을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다. 다다미 형태에 착안한 마루는 짐을 보관할 수 있는 수납공간으로도 기능한다. 여기에 디자이너가 명주실을 활용해 제작한 조명을 두었다. 집을 고치기 전에 집에 어울리는 조명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병풍 문, 마루, 조명이 한데 어우러져 공간 하나하나가 잔상이 아닌 장면으로 남길 바란 디자이너의 의도를 구현한 다실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다실에는 기존 문을 해체하고 접이식 병풍 문을 달았다. 창과 문에 바른 한지는 정현 씨가 직접 배접했다.
사람이든 공간이든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일 때 따라갈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생각하는 손정현 씨는 이 집이 그렇게 되길 바란다. “평소 ‘꾸려간다’는 말을 좋아하는데요, 이 집을 만들 때 그 동사가 떠올랐어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을 옻칠의 색감처럼, 이 집 또한 그렇게 세월을 머금으며 자기만의 색을 찾아갔으면 해요.”
기지 어소시에이츠의 박지훈 디자이너는 터基와 지혜智라는 이름처럼 공간의 맥락과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함께 읽어내고, 지혜로운 해석과 조율을 통해 기능과 감성, 구조와 분위기, 사용자의 의도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유연한 공간을 설계한다. giziassociat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