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디자이너는 구축 아파트가 지닌 제약을 전제로 삼고, 삶의 장면을 상상하며 공간을 재구성했다. 그렇게 완성한 집은 결과가 아닌, 현재도 쓰고 있는 문장처럼 시간 위에 감각을 덧입히며 자라난다.

디자이너 김혜일·김재영은 하나의 특정 지점보다 이동하는 순간마다 장면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흐름을 고려해 집을 설계했다. 빛의 변화와 거울에 반사되는 풍경, 서로 다른 물성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이어지며 공간 전체가 하나의 연속된 장면처럼 읽힌다. 절제된 톤 위에 얹은 오묘한 색감의 크바드랏 커튼이 공간의 밀도를 은근히 끌어올리고, 거실에 놓인 이케아 모멘트 테이블이 결을 더한다.
집을 가꾸는 것과 에세이를 쓰는 일에는 어딘지 닮은 구석이 있다. 둘 모두 조건이 있다. 공간이라면 태생적으로 지닌 구조, 후자라면 제시어 혹은 주제가 이에 해당한다. 또 하나가 있다면 둘 모두 수정을 거듭한다는 점이다. 초고를 끝내면 퇴고의 과정을 치르듯 집 또한 가구의 위치를 바꾸기도, 커튼이나 카펫의 색을 교체하기도 한다. 살면서 달라진 가치관이 미래에 쓸 글의 향방을 가르듯, 집 또한 거주하며 겪은 일련의 경험을 통해 끝없는 개정과 증보를 요한다. 근사勤仕를 모으는 일이라는 점도 유사하다면 유사하다.

주방 맞은편 벽은 거울로 마감해 장면이 겹쳐 보이도록 했고, 주방 상하부 수납장은 서로 다른 결과 색을 패치워크하듯 조합해 다양한 톤을 선호하는 취향을 드러냈다.
포스트코드는 늦여름, 경기도 하남의 구축 아파트를 처음 만난 순간 기존 집주인의 여운이 곳곳에 묻어 있는 집을 보며 이곳을 두 사람의 보금자리로 삼아야겠다고 결정했다. 이유는 평면이었다. “대개 구축 아파트의 평형대는 현관문을 열면 맞은편에 베란다가 보이는 구조가 대부분인데요, 이 집은 문을 열면 왼쪽으로 주방, 전면에 거실 식으로 좌우로 구역이 나뉘는 게 흥미로웠어요.” 김혜일 디자이너가 그날을 떠올리며 말했다.
‘고정된 평면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주제는 포스트코드다움을 보여주기에도 적절했다. 오래된 아파트의 내력벽과 기둥은 필시 공간의 확장을 제한하는 요소지만, 두 사람은 이를 하나의 대전제로 받아들였다. 대신 수선에 앞서 이 집에서 그려나갈 장면을 더듬어봤다. 평소 두 사람이 스튜디오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일부터 각자의 집에서 쉴 때 하는 습관에 이르기까지 전 범위적으로 상상하며 얼개를 짰다.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서랍 속에서 기억을 꺼내듯, 디자인 언어를 만들기 위해 시간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주방 옆 창고 너머로 보이던 붉은 계단은 미닫이문에 틈을 두어 실내로 끌어들였다. 손이 닿는 작은 면적에도 위트를 더한 디테일이다.
그러자 거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 작업과 휴식의 경계가 나뉘지 않는 두 사람을 위한 쉼터이자 스케치나 독서 등 작업을 하는 동시에 클라이언트와 미팅도 할 수 있는 장소성을 새로 조합한 것. 공간에서 벌어질 장면을 떠올리는 일은 자연스레 그곳에 놓을 가구의 형태나 타입, 구조를 산출하는 근거가 됐다. 이에 따라 기존 방으로 쓰던 곳의 벽을 일부 허물고, 그곳을 거실이자 작업실로 새롭게 정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좋아하는 빈티지 이케아 테이블을 배치한 다음 이에 어울리는 가구와 요소를 선택했다. 주방을 마주한 벽면에 거울을 덧대는 아이디어는 집을 처음 본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떠올렸다. “이 집의 구조를 처음 봤을 때 공간이 반사돼 보이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협소해 보이는 규모에 확장감도 부여하고, 시선이 머무는 위치에 따라 다채로운 장면을 보여줘 공간의 매력을 더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거울과 동선으로 시선의 흐름을 열어주는 동시에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방의 문을 없애 공간과 공간 사이의 흐름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접속사를 가미했다.

시선이 머무는 지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벽면 인터폰에는 직접 제작한 덮개를 씌워 웨딩 사진첩처럼 활용했고, 주방 가구 손잡이는 두 사람의 이름인 혜일과 재영에 착안해 0과 1 형태로 디자인했다. 제작은 아이즈어라운더레이크(@eyesaroundthelake).

시선이 머무는 지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벽면 인터폰에는 직접 제작한 덮개를 씌워 웨딩 사진첩처럼 활용했고, 주방 가구 손잡이는 두 사람의 이름인 혜일과 재영에 착안해 0과 1 형태로 디자인했다. 제작은 아이즈어라운더레이크(@eyesaroundthelake).
삶으로 퇴고하는 공간
이렇듯 촘촘하고 치밀한 계획 속에서 설계한 집이라 해도, 수정과 보완의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어느 날, 완성도 높다고 여기던 거실 벽면의 길쭉한 두 기둥이 문득 허전하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가구의 필요로 이어졌다. 하지만 단순히 가구를 들이는 방식은 아니었다. 기둥이라는 기존 구조에서 출발해 그 공간에 어울리는 형태와 소재, 크기를 고안했다. 높낮이의 균형을 세심하게 조절해 배치했을 때 장면이 보다 다채롭게 읽히도록 했으며, 목재와 스틸을 사용해 대비를 주어 취향 또한 분명히 드러냈다. 그렇게 책장과 TV 선반을 설치해 공간을 수정하고 보완했다. 일종의 퇴고처럼 말이다.

화장실에는 미색과 유색 타일을 섞어 공간의 전환을 유도했다.

침실은 기존 큰 창을 두 개로 나누어 보다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바닥은 블랙 마모륨으로 마감해 공간을 분리된 장면처럼 느껴지게 한다.
공간에는 두 디자이너가 평소 어떤 것을 관찰하고, 어느 부분에서 영감을 받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장치 또한 숨어 있다. 그중 하나가 주방 옆 창고에 달린 미닫이문. “베란다 창밖에 어린이집이 하나 있는데요, 혜일 디자이너가 그곳의 빨간 계단을 보고 너무 예쁘다고 하더라고요. 그 색을 집 안으로 들여오고 싶다고 해서, 창고 문을 그 계단과 같은 색으로 맞췄어요. 문 모서리에 작은 틈을 내어 문을 닫아도 빨간 계단이 시야에 살짝 들어오도록 했고요.”

다채로운 소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이 집은 서로 겹쳐지며 이어지는 풍경으로 완성된다.

거실 벽면을 따라 제작한 책장은 과거 장가구에 쓰던 무늬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
집 안 곳곳에 놓인 수납 가구 손잡이에도 두 사람만의 의미를 새겨놓았다. “자세히 보면 0과 1의 형태예요. 제 이름 ‘혜일’의 일과 ‘재영’의 영을 따서 만든 거죠. 집 안에 우리 이름을 담고 싶어 주얼리 브랜드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의뢰했어요.” 집이라는 원고에 두 사람의 바이라인을 새겨 넣은 듯하다. 에세이를 쓰는 일과 집을 가꾸는 일에는 어쩐지 닮은 구석이 있다. 둘 모두 ‘쓰는 사람(writer/ user)’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면地面이든 지면紙面이든 둘 모두 자신의 몸을 여과지 삼아 걸러낸 투명한 감각만 보여준다. “이 집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온 두 사람이 각자의 조각을 모아 만든 하나의 서사예요. 개인의 경험과 시선이 모여 하나의 글이 완성되는 것과도 닮아 있죠.”
두 사람의 집은 완벽하게 정리된 결과물이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쓰고 쓰는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에 가깝다.
포스트코드는 김혜일·김재영 디자이너가 설립한 스튜디오다. ‘포스트코드’라는 이름은 물리적 주소인 우편번호를 넘어 프로젝트의 고유한 맥락과 그에 대한 명확한 좌표 설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각 프로젝트가 놓인 환경과 조건을 하나의 코드로 해석하고, 그 이후(post)에 이어지는 새로운 장면을 만든다. 공간을 단순히 기능이나 형태로 한정하기보다 그것이 놓인 맥락과 사용자 경험, 그리고 감각까지 설계하는 것을 목표로 작업한다. p-o-s-t-c-o-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