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여행 트렌드의 대표 키워드로 자리 잡은 ‘로컬리즘’. 관광객을 위한 전형적 투어 대신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그곳만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것이 로컬리즘의 묘미다. 디자이너 임태희는 오래전부터 일본의 소도시를 즐겨 찾으며 자신만의 여행을 해왔다. 그가 최근 일을 계기로 찾은 마에바시Maebashi와 후지요시다Fujiyoshida, 두 도시 여행기를 전해왔다. 그는 일상처럼 떠난 여행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디자이너 임태희가 지난겨울 떠난 후지요시다에서 만난 장면. 후지 텍스타일 위크가 열릴 때면 후지요시다 동네 곳곳은 축제를 위한 장으로 변한다. 절에서도 한 점의 유화 같은 펠트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PhotoShuhei Yoshida/ Courtesy of FUJI TEXTILE WEEK

디자이너 임태희는 20여 년 전 인테리어와 건축, 닮았지만 서로 다른 목표를 지닌 두 분야를 넘나드는 작업을 꿈꾸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교토에서 공부하며 그는 새로운 유형을 탄생시키는 일만큼이나 존재하는 건축을 지켜내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덕분에 전환의 속도가 빠른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머무는 시간과 행위를 만들어가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은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Lim Taehee Design Studio를 운영하면서 공간 디자인을 중심으로 다양한 장르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일을 하고 있다. 그에게 일본은 일의 태도를 익히고, 작업을 통해 실천하며, 삶을 이어가는 곳이다. 한때 배움과 경험을 얻던 도시는 이제 자신이 만든 공간을 펼치고, 더 큰 프로젝트를 도모하는 무대가 되었다. limtaeheestudio.com
내가 일본의 시골로 떠나는 이유

거대한 후지산 아래 비슷한 규모의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풍경이 후지요시다의 첫인상이다. PhotoShuhei Yoshida/ Courtesy of FUJI TEXTILE WEEK
나는 오래전부터 일본의 시골을 부지런히 여행해왔다. 어디서나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도시와 달리 자본의 맹렬한 기세가 덜한 시골은 조금 더 인간적이다. 아직 순수함이 있다고 해야 할까. 특히나 일본의 소도시는 고유한 것이 잘 남아 있으면서도 대도시와 비교해 문화적 간극이 크지 않다. 훌륭한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에 갈 수 있고, 근사한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유일무이한 자연을 만날 수 있다. 나는 그곳의 자연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정서로 허기진 마음을 채우곤 했다. 그 순간들은 한번 쓰고 휘발되는 아카이브 속 이미지가 아니라, 두고두고 꺼내어 쓰는 연료가 되어주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두 도시, 마에바시와 후지요시다는 모두 그러한 기운을 북돋아준 곳이다. 그곳에는 사람의 힘이 있고,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두 도시를 모두 일로 만났다. 그러나 그곳에서 머문 시간은 출장이나 업무의 일부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후지요시다에서 72시간

2021년 시작한 후지 텍스타일 위크는 지난해 4회째를 맞았다. PhotoShuhei Yoshida/ Courtesy of FUJI TEXTILE WEEK

무척 아름답던 동네 카페 ‘팹카페 후지’에서도 전시가 열렸다. 벽에 걸린 작품은 쥘리에트 베르토노Juliette Berthonneau의 ‘Passerelle de Papier’. PhotoShuhei Yoshida/ Courtesy of FUJI TEXTILE WEEK

아노타니 마사오Masaho Anotani의 전시 〈寛厳浄土(Kangen-Jodo)〉. 작품만이 아니라 일본의 집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PhotoShuhei Yoshida/ Courtesy of FUJI TEXTILE WEEK
도쿄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후지요시다는 후지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어디에서든 후지산을 볼 수 있는 도시. 나는 우연한 계기로 이곳에 가게 되었다. 후지요시다는 1천 년 이상 이어져온 직물 산지다. 오래전부터 직조 산업이 발달해왔고, 패션 브랜드에 원단을 공급하는 공방과 공장이 모여 마을을 형성했다. 시간이 흘러 산업이 점차 축소되면서 이곳 사람들은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후지 텍스타일 위크’다. 과거 섬유 공장이나 공방이던 곳, 지역의 의미 있는 빈 건축물을 전시장으로 삼아 아티스트와 협업한 텍스타일 작품을 선보이고, 크리에이터와 함께 그들의 직조 기술을 알리는 워크숍을 열기도 하며 산업과 현대미술이 교차하는 이벤트를 펼친다. 2021년 시작해 지금까지 네 차례 전시가 열렸고, 지난해 그들의 패브릭에 관심을 가질 만한 공간 디자이너를 초대하면서 우리도 초청한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미 이 도시에 사심이 가득했다. 정말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제목은 〈핫스팟: 우주인 출몰 주의!〉다)의 배경이었기 때문. 상대방은 “소장님은 아무래도 바빠서 어려우시겠죠?”라는 우려 섞인 물음과 함께 초대를 했지만, 나는 곧장 외쳤다. “제가 갑니다!” 그렇게 지난해 11월, 2박 3일의 투어에 하루의 자유여행을 덧붙여 후지요시다로 향했다.

수영장에 푸른 연꽃을 띄운 작업이 무척 아름답다. 전시는 시바타 마오Mao Shibata의 〈Blue Lotus〉.
역시 일본은 허투루가 없다

후지요시다 다운타운에 있는 작은 갤러리. 레진을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덧붙여 만든 입구가 인상적이다. 이렇게 재미나고 멋진 갤러리가 있는 후지요시다가 부러울 따름.

공장과 공방에서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텍스타일 기술을 만날 수 있었다.
직접 본 후지 텍스타일 위크는 상상 이상이었다. 마을의 여러 장소에서 전시를 펼치는데, 작가와 협업해 패브릭에 사진을 출력한 작업이나 직조 기법을 활용한 가구가 아름다웠고, 직조의 흐름을 보여주는 직조 공장에서 진행한 메인 전시도 무척 훌륭했다. 절에서도, 카페에서도 전시가 열려서 공간 자체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마을 수영장에는 작가가 푸른 천으로 만든 연꽃을 물에 띄워두었는데, 사람들이 장화를 신고 들어가 구경하는 모습마저도 전시의 일부 같았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이던 것은 후지요시다 사람들이 텍스타일을 다루는 태도다. 투어 기간 동안 공장과 공방에도 방문했는데, 디자인은 조금 투박해 보일지 몰라도 하나하나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패턴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패브릭에는 프린팅이 하나도 없다. 모두 직조로 천을 짜면서 하나하나 만든다. 실크스크린을 하는 공장에서는 무려 사슴 털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고무 스퀴즈를 쓰는데,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한 도구며 그 마음이 무척 아름답다. 돈이 되지 않는 산업은 순식간에 도태되고 금세 사라지는 시대이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한 땀 한 땀 짜나가고 있다. 순박하고 우직하게 버티는 작은 소신들을 만나며 부러움과 용기를 함께 얻는다.
리얼리티, 휴매니티!

관광객이 인증숏을 찍곤 하는 후지요시다 동네 풍경.

드라마의 배경이 된 카페 몽블랑. 이제는 인기가 너무 많아 가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초청을 받아서 온 투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정이 빡빡하다. 자유 시간이 없어서 어느 날엔 새벽 6시인가 눈곱만 떼고 나와 드라마에 나온 카페 몽블랑에 가기도 했다. 후지산 풍경이 더 아름다울 것 같아 옥상에 올라가보기도 하고, SNS에 잘 올리지도 않으면서 길을 걸어보라고 하며 동행인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공식 일정이 끝난 후에는 드라마의 배경인 마운트 호텔 쇼지Mount Hotel Shoji에도 갔다. 그 앞의 호수와 벤치도 그대로 있다. 한국에서는 후지요시다와 비슷한 곳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스타벅스 대신 동네 빵집과 카페가 있는 시골 마을. 개발되지 않은 옛 도시이지만 산업이 있고 그들만의 본질도 있다는 점이 좋다. 이곳에 다녀온 후 그 드라마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는데, 동네 모습을 많이 바꾸지 않았고, 이곳을 잘 아는 작가가 이야기를 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삶의 무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 리얼리티! 그러니까 나는 후지요시다에 가기 전부터 이미 드라마와 함께 이 도시를 좋아하고 있었던 셈이다.
길과 건축으로 읽는 도시, 마에바시

옛 공장과 제조업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에바시 동네의 정경.

옛 공장과 제조업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에바시 동네의 정경.

시로이야 호텔의 위트 있는 간판.
후지요시다가 작은 시골 마을이라면 마에바시는 훨씬 면적이 넓다. 도쿄에서 두 시간 남짓으로 무려 신칸센을 타고 갈 수 있다. 최근 이 도시가 주목받은 것은 구도심을 중심으로 변화가 일어나면서부터다. 마에바시는 근간을 이루던 섬유 산업이 쇠퇴하면서 점차 쇠락해갔다. 이곳에 변화의 손길을 건넨 인물이 아이웨어 브랜드 진스Jins의 설립자 다나카 히토시田中仁다. 그는 민간 차원에서 자신의 고향을 살리는 운동을 벌였다. 3백 년의 역사를 지녔으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시로이야Shiroiya 료칸을 인수해 건축가 후지모토 소우와 함께 시로이야 호텔로 재탄생시켰고, 이곳을 기점으로 주변의 길과 건축물을 조금씩 바꿔나갔다.

도시 재생 사업이 한창인 마에바시에는 길과 건물 곳곳에서 벽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온통 식물이 드리운 경사진 입면이 상징적인 시로이야 호텔은 마에바시 도시 재생의 상징 같은 장소다. 호텔의 외부 계단과 길도 모두 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진스 사옥을 지어 본사를 일부 옮겨오고, 빈집을 구입해 아트 레지던시로 꾸미거나 다른 브랜드를 초대하기도 했다. 뜻을 같이하는 일본의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작업이 더해지며 마을 풍경은 서서히 달라졌다. 미나 페르호넨도 진스 대표의 초대로 함께 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우리가 디자이너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지난해 문을 연 미나 페르호넨 오비에 대한 이야기는 〈행복〉 2025년 7월호에서 만날 수 있다).
여행은 떠나기보다 잘 돌아오는 일

미나 페르호넨 오비 전경. 마에바시의 정체성을 살려 매장 안에도 벽돌을 사용했다.

마을의 커뮤니티 장소가 된 안경 가게. 지역 주민을 위해 이렇게 아낌없이 문을 열어주는 유쾌한 헌신이 너무 부럽다.
2022년 미나 페르호넨 오비 프로젝트를 맡은 후로 여러 차례 마에바시에 방문했다. 기차역에서 내려 걷다 보면 붉은 벽돌길이 나타나며 구도심의 느린 시간이 시작된다. 벽돌은 이곳의 또 다른 주요 산업이던 벽돌 제조업의 맥락을 도시에 반영한 결과다. 나를 포함해 이곳에서 작업한 건축가들 또한 벽돌의 언어를 건축물 곳곳에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시로이야 호텔과 블루보틀 카페, 진스 사옥, 미나 페르호넨 오비 매장이 모여 있는 메인 거리에도 온통 붉은 벽돌이 깔려 있다. 벽돌에는 기증한 사람들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새겨두었다.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진스 파크 매장에도 방문했는데, 이곳도 단순한 상업 시설이 아니라 주민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겨울인데도 주민들이 야외 덱에 마련한 고타쓰(일본식 난방 기구)에 삼삼오오 앉거나 카페에서 머무는 모습을 보니 더욱 살아 있는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마에바시처럼 자신만의 정서를 지켜가는 도시를 발견하고, 그 이야기를 나의 시선으로 읽어보는 일은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나에게 여행은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일’이다. 떠나야 비로소 내가 있던 자리가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된다. 그리고 따뜻하고 순수한 에너지는 미래로 이어지는 힘을 발휘한다. 좋은 것들이 자라는 도시를 보며 나 역시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낼 용기를 얻은 것처럼.
임태희는 자연과 장소도 좋지만, 결국 여행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들은 사람에 의해 빚어진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따뜻한 에너지를 받으면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힘을 얻는 것에 여행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마에바시 현장 옆 매일 드나들던 블루보틀 카페의 직원이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고, 주문할 메뉴를 기억해준 것. 후지요시다에서 만난 공방과 공장 사람들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사무실로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고 반가움을 나눈 것. 인간이 만들어낸 인연과 사건이 모여 각자의 인생은 한 뼘 더 넓어진다.
일본 소도시의 로컬 감성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추천 스폿
후지요시다
쿠라하우스 후지요시다(@kurahouse_fujiyoshida) 오래된 민가를 고쳐 만든 식당. 골목으로 들어가면 작은 마당이 있는 이층집이 나타나는데, 집 구경하는 재미도 좋다. 이 지역의 음식을 기반으로 가정식 요리를 만드는 곳이라 마치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서 식사하는 기분이 든다.
몽블랑Mont Blanc(+81 555-24-0776) 일본 드라마 〈핫스팟: 우주인 출몰 주의!〉에 등장해 더욱 유명해진 카페. 귀여운 외관에서 마을의 소박한 정취가 느껴진다. 인기가 많아지면서 대기 줄이 너무 길어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팹카페 후지(@fabcafefuji) 일본의 독특한 자상함을 느낄 수 있는 카페. 나무로 된 가구와 감각적인 환대에 기분이 좋아지는 곳. 이 지역의 특산품인 직접 직조한 원단으로 만든 상품이며 책이며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싶은 것들이 많다. 커피도 무척 맛있다.
폴라 미술관ポーラ美術館(@polamuseumofart) 후지요시다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정원이며 건축이며 소장품까지 서울 한복판에 있을 법한 수준의 뮤지엄이 시골 한적한 마을에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실내 공간뿐 아니라 정원에 놓인 조각이며 작품들을 보며 한적한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곳.
후지이무로Fujihimuro(you-fujiyoshida.jp) 후지요시다 다운타운에 있는 작은 갤러리. 레진을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덧붙여 만든 입구가 인상적이다. 이렇게 재미나고 멋진 갤러리가 있는 후지요시다가 부러울 따름.
마에바시
시로이야 호텔 조식(shiroiya.com) 시로이야 호텔은 독특한 외관, 방마다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과 컬래버레이션한 객실이 특징이지만,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의 조식이 기억에 남는다. 지역의 채소와 식자재로 만든 수수하지만 정감 넘치는 조식은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는 일등 공신이다.
커피 블루보틀(@bluebottlejapan) 온통 풀로 뒤덮인 이 귀여운 카페는 소도시가 주는 작고도 충만한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규모는 소박하지만 커피도 무척 맛있고 기분이 좋다.
아트 마에바시(artsmaebashi.jp)시로이야 호텔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아트 마에바시는 의외의 규모에 놀라게 된다. 작은 마을이지만 대도시 어디에도 뒤처지지 않을 규모의 전시가 열린다. 단순한 외관과 달리 재미있는 공간 구성도 인상적이다.
공중화장실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화장실이 퍼블릭이라니, 깜짝 놀랄 일이다. 심플하면서도 본질에 충실한 건축적 외관도 좋지만, 외부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도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쓰지한(@tsujihan_maebashi) 해산물 돈부리를 매우 정성을 다해서 내어주는 곳. 다시나 올라가는 재료가 훌륭하다. 카운터석에 앉아서 구경하는 주방의 진지한 모습이 좋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말 맛있다.
그라싸(@grassajp) 피자와 파스타가 본격적인 맛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곳. 한번 맛본 후에는 여러 번 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