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종영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서 밝은 회색 승복을 입고 등장한 선재 스님은 승패보다 마음을, 기술보다 태도를 보여주며 진한 여운을 남겼다. 화면 밖에서 따라간 그의 하루는 자연의 흐름과 맞닿아 있었고, 그 걸음을 좇는 사이 보이지 않던 생명의 순간들이 드러났다. 그가 말하는 음식은 단순한 요리가 아닌, 삶을 대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쑥과 밀가루를 이용해 부친 쑥전. 선재 스님은 쑥을 조금 큼지막하게 썰었다. 그렇게 해야 식감도 살고 쑥의 향 또한 입안에 오래 배어든다고.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행복> 취재진을 보자마자,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다며 따뜻한 꾸중을 건넨 선재 스님.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바쁜 일정 속에서도 짬을 낸 자리였다. 하지만 ‘열일’ 중인 사진기자의 모습에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만큼이나 온기 어린 한 끼를 정성껏 내어주었다.
정갈함 속에 담긴 계절, 거기에 버무려진 스님의 손맛

선재 스님이 내어준 한 상은 화려함 대신 재료 본연의 결을 살린 소박한 조화로 완성된다. 들풀처럼 가볍고 은은한 쌉싸름함이 감도는 삼잎국화나물무침과, 봄 들녘의 향을 머금은 망초나물무침.

쌉쌀한 뒤끝에 산뜻한 감칠맛이 도는 머위겉절이와 특유의 청량한 향과 알싸함이 입안을 깨우는 고수 겉절이가 놓였다.

직접 담근 장을 풀어 끓인 애호박된장찌개 한 그릇. 숟가락으로 떠 넣은 애호박은 결이 부드럽게 살아 있어 씹을수록 달큰한 즙이 배어나오고, 깊게 익은 된장의 구수함과 어우러져 속을 편안하게 감싼다.

사찰음식연구소 한편에는 말린 표고버섯과 목이버섯, 능이버섯 등 숲에서 자란 재료들이 가지런히 자다. 햇볕과 바람을 견디며 응축된 버섯의 깊은 향은 은근한 흙내와 감칠맛을 머금고, 차로 우릴 때는 구수하면서도 맑은 여운을 남긴다. 말려서 가루로 쓰면 자연스러운 감칠맛을 더하는 천연 조미료가 되고, 살짝 데쳐 된장이나 들기름 및 초장을 곁들여 먹으면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살아난다.
오전 9시, 긴 겨울의 끝자락을 지나 봄기운이 은은히 번지기 시작한 경기도 양평 옥천. 아직은 싸늘한 공기와 흐릿한 하늘이 풍경 위에 엷은 막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 사이를 가르며 선재 스님은 사찰음식연구소 주변의 산과 밭을 오갔다. 땅 위에 돋아난 작은 풀들을 눈에 담고, 가지마다 맺힌 기운을 살피던 그는 이내 매화나무 앞에 멈춰 섰다. 이윽고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지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오후에 손님이 오세요. 평소 나무와 꽃을 좋아하는 분인데 건강이 나빠져 산에도 오르지 못하고 풍경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계시대요. 무엇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자연을 선물하기로 했죠. 나무도, 꽃도 이렇게 자라나고 있다는 걸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요.” 매화 가지를 소중히 들고 걸음을 옮기는 선재 스님 주변에는 기왓장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이름도 지역도 제각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바람은 똑같았다. 건강!
“음식이 곧 약”이라 말하는 선재 스님. 일흔이 넘은 지금도 굴곡진 산길을 무리 없이 오르내리는 그이지만, 한때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1980년, 스물네 살 나이에 신흥사에서 출가한 그는 궁중 수라간에서 일하던 외할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어머니, 그리고 약초에 밝았던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꾸준히 사찰 음식을 연구해왔다. 동시에 신흥사 청소년수련원에서 10년 가까이 아이들의 수련 교육을 맡았다. 아이들과 스님들이 함께 생활하며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보내자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변화가 보였다. 이 경험을 통해 선재 스님은 부처의 자비와 함께 음식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그 모습이 좋아 하루 두세 시간 남짓 쪽잠을 자면서 음식 공부와 아이들을 돌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다.

밭에서 막 캐서 온 나물을 한 움큼 집어 들고, 물에 헹구는 손길이 분주하다. 선재 스님에게 요리는 다듬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흙을 털어내고, 물로 씻어내는 이 단순한 과정 속에서 재료는 비로소 제 빛을 되찾는다. 손끝을 거쳐 정갈해진 나물은 곧 한 끼의 수행처럼 식탁 위에 오른다.
그런데 그것이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챙길 여유조차 없던 그는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손바닥이 샛노랗다는 다른 스님의 말을 듣고서야 얼굴빛이 검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94년, 병원을 찾은 그는 간경화 진단을 받았다. 1년을 채 넘기기 어렵다는 시한부 선고를 들었다.
그때부터 선재 스님은 약이 되는 음식, 자신의 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음식 수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굳어가던 간에 항체가 생겨났고, 1년 만에 기적처럼 몸에 변화가 일었다. 음식은 곧 ‘약’이었던 것. 이후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음식 수행을 강연, 방송 등으로 세상에 전했다. 얼마 전 종영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 출연한 것 역시 그 연장선이었다.

수백 개의 장독 사이를 오가며 선재 스님은 오늘도 시간을 돌본다. 직접 담가 익혀온 380여 개의 장은 단순한 저장 식품을 넘어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운 치유의 기록이기도 하다. 계절의 숨과 바람을 머금은 항아리 속에서 장은 천천히 깊어지고, 그 시간만큼 스님의 삶 또한 단단해졌다.
마주친 것들로 차린 하루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선재 스님의 하루는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함으로 가득했다. 동이 튼 아침 햇살의 속삭임에 눈을 뜨고, 뜬 눈으로 텃밭을 둘러보며 계절이 내어준 재료와 생명의 축복을 발견한다. 누군가는 무심코 밟은 풀 한 포기조차 그는 일일이 호명하고 발견할 줄 안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 속에서 일어나는 삶의 기적을 하나하나 발견하고 바라본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뭘 먹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따로 하지 않는다. 그저 밭에 나와 거닐다가 어떤 나물을 만나면 그제야 정하는 게 일상이다. “겉절이를 해 먹을까, 삶아서 된장에 무칠까, 김밥을 싸서 먹어볼까? 자연이 주는 재료를 만난 그 순간의 몸이 시키는 대로 요리를 고민하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재 스님은 나무 아래 구석진 곳에 자란 삼잎국화를 보고는 잎이 참 싱그럽게 올라왔다며 오늘은 이것을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삼잎국화를 캐면서 한참을 밭에 있던 선재 스님이 이번엔 쑥을 길어 올렸다. 이번에도 밭에서 자란 것에 감탄하면서 그것이 지닌 효능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말했다. “원자폭탄이 터져도 다시 살아나는 게 쑥이에요. 그 정도로 생명력이 강해요. 쑥은 우리 몸을 따뜻하게 해서 면역력을 키워주는 음식이죠.” 겨울에 잘 자라느라 애썼다,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는 스님의 소쿠리에는 어느새 머위부터 망초, 고수, 삼잎국화가 한가득 쌓여 봄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시간과 바람 속에 잘 띄워 말린 메주는 냄새 없이 깊은 맛을 품고, 간장과 된장의 근원이 된다.
주방에 도착한 선재 스님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군더더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각양각색 나물을 삶고, 채수를 만드는 모습, 재료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손길은 요리라기보다는 하나의 무용처럼 보였다. 선재 스님은 음식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먹을 사람을 생각한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면 쓴맛을 선호할 테니 거기에 맞추고,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이라면 쓴 향을 좀 덜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간을 한다.
그가 음식을 하며 생각하는 건 사람뿐만이 아니다. 그날 만난 재료의 성질도 음식의 디테일을 정하는 요인이 된다. “아까 밭에서 쑥 향을 맡았는데 아직 향이 연하더라고요. 이럴 땐 큼지막하게 썰어서 전을 부치는 게 좋아요. 잘게 썰면 전 모양이야 예쁘게 나오지만 향은 음식 안에 오래 머물지 않거든요. 쑥내음이 잘 느껴지게 하고 싶어서 부러 크게 썰었어요.” 언젠가 들은 스님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 선연히 떠올랐다.

선재 스님이 밭에서 직접 캔 나물들. 쑥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혈액순환을 돕고, 삼잎국화는 체내를 맑게 하며, 머위는 혈관 건강을 지켜준다.
연緣으로 이어지는 식탁
식탁 위에 머위겉절이, 삼잎국화나물무침, 고수겉절이, 망초나물무침, 여기에 직접 담근 장으로 끓인 애호박된장찌개가 하나둘 놓였다. 잠시 후 공양게를 읊은 뒤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에 임했다. 스님이 가장 먼저 권한 쑥전부터 한 입 먹었다. 입안에 번진 은은한 봄의 향이 쉬이 가시지 않고 입가에서 돌림노래를 부르듯 계속 번지는 느낌이었다. 뒤이어 맛본 고수겉절이는 평소 쌀국수를 먹을 때 익숙하게 맡은 강한 향 대신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중용의 미덕처럼 다가왔다.
연신 놀라움을 표하자 선재 스님이 말을 이었다. “과정을 함께 지켜봤기 때문이에요. 자연에 있던 재료를 직접 가져와 다듬고 요리하는 여정을 따라가면 음식 맛은 더욱 풍부하게 느껴지기 마련이거든요. 무엇이 들어가는지 알고, 거기에 어떤 마음을 담아 만드는지 함께 경험하는 건 그런 의미에서 중요해요.” 몸이 아파 자연을 보지 못하는 손님을 위해 “봄을 선물하고 싶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음식은 약이지만, 음식이 아니어도 약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대방을 향한 마음만 있다면 말이다.
우문일지 모르지만 그에게 ‘먹고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다. “삶이 고단한 이가 부처님을 찾아오면 가장 먼저 묻는 게 무엇을 먹고 사느냐예요. 그만큼 우리 삶에 먹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오늘 먹은 쑥으로 얘기하면 쑥 하나도 건강한 흙과 미생물, 물과 빛, 바람이 어우러질 때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죠. 이게 우리 몸에 들어와야 우리 몸과 정신도 건강하고 행복해지고요.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게 아니라 사람과 음식, 몸과 세상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감각하는 게 음식이에요. 먹고 산다는 건 그걸 깨닫는다는 의미죠.”

〈선재 스님의 사찰 음식〉
사찰의 밥상을 일상으로 옮겨온 선재 스님의 기록이다. ‘음식이 곧 약’이라는 메시지 아래, 몸과 마음을 함께 돌보는 식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제철 식재료와 산나물을 중심으로 한 2백여 가지 레시피가 수록되었다. 조리법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 담긴 철학은 깊다. 선재 스님 지음, 디자인하우스.
행복 교실
선재 스님이 전하는 ‘약이 되는 음식의 지혜’ 강연에 <행복>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계절과 조화를 이루는 음식, 덜어내는 식습관이 어떻게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약이 되는지 함께 고민하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190 쪽을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