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촬영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네요.” 편집실에서 업무를 보다 나온 이창우 PD는 무리한 부탁에도 거침없이 포즈를 취하며 취재진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학창 시절 반에 한 명쯤 그런 학생이 있었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진행하거나, TV에서 본 장면을 현실에 펼쳐 교실 안에 웃음이 피어나게 만드는 친구. 담임선생님은 그런 학생에게 장래 희망 혹은 직업으로 코미디언을 추천하곤 했다. <냉장고를 부탁해 since 2014>의 메인 PD 이창우가 그러했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는 일을 좋아하던 그는 코미디언 대신 예능 PD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PD로 생활한 지 어언 20년. 그는 매주 시청자에게 웃음을 배달하기 위해 편집실과 세트장, 회의실을 넘나든다. 방영 시간의 몇 배가 넘는 시간, 분초를 다투며 섭외와 촬영에 매진한다.
“웃음을 주는 일은 좋아했지만 요리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어요. 다만 예능 PD가 된 후 다뤄볼 수 있는 장르는 최대한 많이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확고했죠. 그러던 중 회사에서 그간의 필모그래피나 경험이라면 요리 예능도 잘 연출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제안했어요.” 그렇게 요리와 연을 맺었다.
일 때문에 시작한 요리라는 카테고리와 콘텐츠는 또 다른 테이블, 세상을 바라보는 지평을 넓혀주었다. “처음엔 요리의 ‘요’ 자도 몰랐어요. 파인다이닝이라는 것도 즐기지 않았고요. 그런데 출연하는 셰프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그들이 요리하는 과정을 주기적으로 보다 보니 자연스레 관심도 많아졌죠.” 무엇보다 시청자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소화하고 이해해야 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자연스레 난도 높은 레시피나 음식에 대한 지식의 폭도 넓어졌다.
‘냉부’라는 장르의 탄생
2014년 JTBC에서 야심 차게 내놓은 <냉장고를 부탁해>(이하 <냉부>)는 두 가지 장치를 결합해 새로운 요리 예능의 길을 제시했다. 하나는 냉장고 속 재료라는 시청자에게 꽤 친근한 요소, 또 하나는 15분이라는 장치였다.
“기존 요리 프로그램은 교양 쪽에 가까웠어요. 레시피를 전달하고 요리법을 공개하는 정보 전달. <냉부>에는 대결 요소가 있고 시간 제한이라는 제약을 통한 긴장감과 예상치 못한 웃음 포인트가 있죠.” 하지만 그는 <냉부>가 대중적 요리 예능으로 자리할 수 있던 이유를 인물의 힘, 캐릭터성이라 힘주어 말한다. “ <냉부>에는 기존 예능에서는 볼 수 없던 ‘뉴페이스’가 등장했어요. 프로페셔널 영역에 있어 만나기 어려운 셰프의 출연, 촬영을 거듭하면서 쌓이는 각 인물의 관계성, 여기서 형성되는 각각의 캐릭터가 <냉부>의 매력이자 힘이었죠.” 허세미 넘치는 쇼맨십을 보여주는 최현석 셰프, 요리하는 만화가로 기상천외한 실험 정신을 펼쳐 보이는 김풍 작가, 수줍지만 진심으로 임하는 정호영 셰프의 댄스 등은 출연진과 시청자가 관계의 더께를 두껍게 하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 전문성이 더해졌다. 웃음을 선사하던 출연진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빛이 백팔십도로 돌변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도 있는 재료, 값비싸고 진귀한 게 아니라 우리 일상과 밀착한 재료를 가지고 다채로운 음식을 선보이는 장면은 깊이를 더했다. 이는 셰프라는 고유명사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연복 셰프님이 출연 초창기 때 ‘셰프라고 하지 마. 나 그냥 요리사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냉부>에서는 계속 이들을 셰프라 불렀죠.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셰프라고 말하는 게 어색하지 않잖아요. 직업을 바라보는 인식도 달라졌고요. 그들이 선보인 음식을 통해 대중에게 세계적 요리를 소개하는 역할도 톡톡히 했죠.”
이렇듯 그간에 볼 수 없던 요소를 통해 하나의 장르가 된 <냉부>는 매주 월요일 저녁 시청자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동반자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렇게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보이던 프로그램에도 한계는 찾아왔다. <냉부>는 특성상 시청자가 냉장고를 궁금해할 만한 게스트를 섭외하는 게 중요하다. 시즌 1이 종영할 때까지 약 2백50~3백 명의 인물이 스튜디오를 찾았다. 짧은 시간 내 동일한 게스트가 반복해 나올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보니 섭외 가능한 출연진의 폭은 점점 좁아졌다. 기존 셰프 외에 새로운 인물을 섭외할까 고민했으나 쉬이 선택할 수 없었다. “새로운 셰프를 섭외한다 한들 방송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고, 시청자 또한 캐릭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어느 정도 기간이 걸리다 보니 쉽게 결정할 수 없었어요.” 5년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게 된 배경이다.
하지만 이창우 PD는 ‘언젠가 다시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시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2024년 12월, 그날이 찾아왔다. 변화한 미디어 지형 내 새로운 캐릭터가 우후죽순 등장하며 웃음을 요리하기에 좋은 인물이 냉장고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게스트의 폭도 넓어졌고, 과거 <냉부>에 출연하지 않은 다양한 셰프도 부상했어요. 이때라면 신구의 조화를 만들기에도 적합하다 생각했죠.” 최현석, 정호영, 김풍 등 기존 출연진에 에드워드 리, 손종원, 최강록 셰프와 과거 <냉부>를 보며 자란 윤남노, 박은영, 권성준 셰프가 합류한 화려한 라인업은 친근하던 플롯에 신선함을 가미하기에 적절했다.
“2014년만 해도 김풍 작가 같은 캐릭터는 전무후무했어요. 그런 인물을 찾을 수 있는 창구도 마땅치 않았죠. 10년이 넘은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개인이 특출난 무언가를 콘텐츠로 만들거나, 독특한 캐릭터성을 발휘하는 인물을 SNS를 통해 다양하게 접할 수 있게 됐어요.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이죠.”

매주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배달하는 이창우 PD. 웃음을 요리하는 편집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모두의 ‘밥 친구’가 되는 예능
5년의 공백을 깨고 돌아온 작금의 상황은 처음 <냉부>를 방영하던 당시와는 사뭇 다르다. 정보를 습득하고 표현하는 창구의 다양화, 콘텐츠의 기획부터 송출까지 할 수 있는 인플루언서의 영향력도 커졌다. 하지만 이창우 PD는 이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읽는다. “2014년만 해도 김풍 작가 같은 캐릭터는 전무후무했어요. 그런 인물을 찾을 수 있는 창구도 마땅치 않았죠. 10년이 넘은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개인이 특출난 무언가를 콘텐츠로 만들거나, 독특한 캐릭터성을 발휘하는 인물을 SNS를 통해 다양하게 접할 수 있게 됐어요.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이죠.”
지형이 다양해진 만큼 여기저기 떠도는 콘텐츠의 종류 또한 다채로워졌다. 개인이 매체가 되는 생태계, 먹방, 쿡방, 맛집 소개부터 최근 방영을 마친 <흑백요리사>에 이르기까지 요리를 주제로 하는 콘텐츠의 종류와 규모도 보다 다원화된 것이다. 이 시점 에서 이창우 PD는 <냉부> 이후 시대 요리 예능의 전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음식은 직관적이고 대중적인 소재예요. 요리를 주제로 파생하는 콘텐츠는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나타날 거예요. 보다 더 규모 있는 경쟁 프로그램이 나타날 수도 있고, 혹은 정반대로 소소한 정보성 콘텐츠도 나타날 거고요. <냉부>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만의 포지션을 지켜나갈 거예요. <냉부>에는 쿡방도 있고, 토크도 있고, 인물과 캐릭터도 있어요. 관계망은 물론, 경쟁과 정보도 담겨있고요. 미디어 지형은 앞으로 더욱 다채로워지겠지만 그런 때일수록 방송 예능이 할 수 있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월요일에서 일요일로 방영 시간은 바뀌었지만 그때 그 냉장고와 플롯으로 우리 곁에 돌아온 <냉부>. 이제 1년을 넘긴 이창우 PD에게 다음 행선지에 대해 물었다.
“본방 사수의 개념이 희미해진 시대, 언제 틀어도 부담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여리 예능으로 자리했으면 해요. 하루를 마무리할 때, 혹은 혼자 밥 먹기 어딘지 적적할 때 웃음을 주는 ‘밥 친구’ 같은 예능이 됐으면 해요. 어느 누구도 나빠 보이지 않고 온 가족이 모여서 봐도 편안한 프로그램요.”